# 199
동경의 연가 (2)
(199)
구건호는 와인 잔을 들고 창쪽으로 갔다.
“기획사의 아바타 같은 삶을 살고 있네요. 그러고 보면 기업인이 더 창조적이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이네요. 위험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설빙은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스타의 직업을 가졌어도 숨을 쉴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되겠지요. 자의에 의한 연애와 스스로 결정할수 있는 결혼 같은 것 말입니다. 하긴 나도 모든걸 내가 결정하고 선택하지만 스스로 짜논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결혼을 못했네요.”
설빙이 약간 고개를 들었다.
“아직... 미혼이세요?”
“그렇습니다.”
“기업을 여러 개 가지고 계신 줄 아는데 아직 결혼을 안 하셨군요.”
구건호는 와인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설빙씨가 한 사람 소개해 줄래요? 설빙씨 닮은 여자로 말입니다.”
설빙이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와인을 가져가 마시지는 않고 입술만 적시는 것 같았다. 설빙은 잔을 내려 놓으면서 선그라스를 벗었다. 눈부신 그의 미모가 드러났다.
“역시 미인이군요.”
“구사장님도 상해에서 뵐 때 보다는 젊어 보이시네요.”
“젊긴요. 올해 한국 나이로 36살입니다.”
창 밖에 바람이 불더니 이슬비라도 내리는 모양이었다. 차창 밖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와인 드세요. 괜찮아요. 여기는 우리 둘 밖에 없어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할텐데 목이라도 축이세요.”
설빙은 와인을 아주 조금 마셨다.
“사실 오늘 여기 온건 스이도바시(水道橋)에 있는 도쿄돔에서 행사가 있어 왔어요. 스탭들 일부는 돌아가고 저는 몸이 아프다고 내일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랬군요. 스타의 귀중한 시간을 뺏은 것 같아 미안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설빙씨도 결혼 적령기이신 것 같은데 곧 결혼을 하셔야겠군요. 톱스타니까 좋은 사람이 주변에 많을 것 같네요.”
“의외로 없어요.”
“제가 좋은 사람 소개할 가요?”
설빙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사업을 하는 친구인데 성실하고 아주 의리있는 친구입니다. 여자들에게 너그럽고 희생할줄도 알고 봉사정신도 있습니다. 예의도 있는 친구지요. 재산도 어느정도 있습니다. 재벌 아들은 아니지만 자수성가했고 몇 개의 기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향은 인천이지만 현재 강남에 살고 있습니다. 나이는 36살이고 이름은 구건호라고 합니다.”
설빙이 픽 웃으면서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가 마셨다.
“오우, 잘 마시네요.”
구건호가 박수를 쳐주며 설빙의 빈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설빙은 와인 한잔을 마셨지만 구건호는 석잔을 마신 상태였다. 취할 정도는 아니지만 열기는 몸에서 솟아올라왔다.
구건호가 덥석 설빙의 손을 잡았다.
“설빙씨. 아무리 톱스타라고 해도 인기는 시들게 마련입니다. 이제 가정에 안주하실 때도 됐잖아요? 내가 설빙씨를 지켜줄게요.”
설빙은 손을 빼지 않았다.
“우리 자주 만나요. 설빙씨도 기획사의 스케줄에 따라 바삐 살고 나도 내가 쳐놓은 그물에서 바삐 살지만 서로 만나 괴로움이 있으면 위로하고 미래를 설계해보도록 해요.”
설빙이 웃으면서 구건호가 잡은 손을 슬그머니 빼더니 와인 잔을 잡았다. 그리고 설빙은 두 번째의 잔을 마셨다.
두사람은 의자를 돌려 나란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깔려 빗줄기 속에서 가로등이나 상점의 불빛만 보였다. 설빙이 먼저 말했다.
“비가 많이 오는 모양이지요?”
“그러네요.”
“기획사 사무실은 어디 있나요?‘
“청담동이요.”
“나, 있는 곳에서 멀지 않군요. 나는 신사동에 있어요.”
“신사동에 빌딩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네요.”
“누가 이야기해 주었나요?”
“변이사님이 이현만 BM엔터테인먼트 사장님께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어요.”
“변이사? 그 눈웃음 잘 치며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사람 말입니까?”
“호호호, 맞아요.”
처음으로 설빙이 크게 웃었다.
그 빌딩 지하에 ‘지에이치 갤러리’란 화랑을 만들었습니다. 인테리어 공사가 끝났기 때문에 곧 오픈합니다. 첫 전시회로 중국 청년 작가들의 아방가르드전을 열려고 합니다.
“아방가르드요?”
“전위예술이라고 하지요.”
“사업만 하시는줄 알았더니 그림에 대해서도 많이 아시는 것 같네요.”
“오픈하는날 설빙씨를 정식 초대합니다.”
“스케줄이...”
“스케줄이 맞으면 꼭 오세요.”
구건호의 말에 설빙은 미소만 띠었다.
뉴오따니 호텔 웨이터가 들어왔다.
“식사 주문하시겠습니까?”
구건호가 설빙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설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겟규 정식 2인분 가져오세요.”
“더 오실분 안계시지요.”
“없습니다.”
“하잇, 시바라꾸 오마찌구다사이(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식사는 일본이라 그런지 생선요리 위주로 나왔다. 참치회와 연어구이등이 나왔다.
“둘이 이렇게 식사를 하니 아주 오래 전에 만난 것 같아요.”
구건호의 말에 설빙은 미소만 띠었다.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고 난 설빙이 말했다.
“식사 잘했습니다. 이제 숙소로 가야겠네요.”
“오랫동안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가신다니 할수 없군요. 우리 다음에 여기서 또 만나요. 장소가 조용하고 좋네요.”
설빙이 일어나면서 코트를 입으려고 하였다. 구건호가 얼른 일어나서 코트를 입혀주면서 말했다.
“다음에 만날 날자를 정하지요. 다음 다음주 일요일 여기서 어때요?”
“다음 다음주 일요일은 어려워요. 16일 일본 NHK방송국에서 시상식이 있는데 제가 게스트로 참석해요.”
“그럼 시상식 다음날 여기서 만나지요.”
“여기는 너무 비싸요. 둘이 만나면서 너무 큰 홀을 빌리는건 비경제적이에요.”
“제가 동경 지리를 잘 모릅니다. 비싸기는 하지만 조용하니 그냥 여기로 하지요. 오늘 고마웠습니다.”
구건호는 일본에서 돌아오자 바로 디욘코리아로 갔다.
“3기와 4기 기계장비가 다 들어왔나?”
기계장비는 들어와 있었다. 웅장한 기계장비가 1호기부터 4호기까지 있으니 제법 큰 공장처럼 보였다.“
“종석이 왔구나.”
“어, 형! 언제왔어?”
“설치는 다 되었니?”
“아직 전기선 연결 덜됐어. 그래도 전에 혼자할 때보다도 공무과장이 새로 들어와 좋아. 작업속도가 빨라졌어.”
“새로온 공무과장 어떠냐?”
“잘 해.”
땅땅 소리가 났다.
뭔가 잘 안맞는지 공무과장이 망치로 압출기 스크류 부분을 치고 있었다.“
박종석이 소리쳤다.
“과장님! 쇠는 때리면 안됩니다. 쇠는 달래야 됩니다.”
구건호가 박종석의 이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뭐? 쇠를 달래? 짜식 도사같은 말을 하네.”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구건호가 박종석에게 질문을 했다.
“야, 박이사! 쇠는 때리는 것이 아니고 달래야 된다는 소리는 누구한테 들었냐?”
“응? 그거? 사카다 이쿠조씨 한테 들었어. 쇠는 망치 같은 걸로 때리면 안되고 '나구사메루(달래다)' 해야 된다고 했어.”
“그래? 좋은거 배웠구나.”
“형, 일요일 어디 갔다왔어? 얼굴이 아주 좋아보이네. 아주 밝아보여.”
“그래? 그렇게 보이니까 그렇지.”
구건호는 기분이 좋았다.
벌려논 사업체들이 그런대로 순항을 하고 있고 설빙과 데이트도 성공한 것 같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설빙과 식사를 같이 했지. 톱스타하고 말이야. 그것뿐이야? 다음에 만날 것도 약속했지. 16일이 언제야? 빨리 왔으면 좋겠다.”
윤상무가 서울에 있는 강이사를 만나고 온 것을 보고했다.
“옥상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을 강이사와 함께 검토하고 왔습니다. 토목공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조립식 건물을 올리는 것이므로 공사는 간단합니다.”
“빨리 끝나겠지요?”
“북카페 용도라고 해서 앞의 통유리를 크게 확대했습니다. 앞에는 옥상 정원이 보이고 뒷쪽으로는 신사동과 압구정동 일대가 다 보이도록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구건호는 김동찬 전무를 불렀다.
“3호기와 4호기 기계장비가 가동되면 우리의 생산 능력이 커지겠지요?”
“영업을 좀더 확대해야 겠네요.”
“우선 지에이치 모빌의 거래처부터 공략하고 있습니다. 그쪽 거래처는 생산제품의 원재료 쓰는 곳을 대게 제가 압니다. 그런데 사실 원재료는 이제껏 아무 말썽이 없다면 잘 바꾸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격이나 품질이 월등하면 모를까 약간 난 것 가지고는 바꾸었다가 불량이 나온다면 큰일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면 영업의 확대가 더디겠군요.”
“그래서 신제품을 공략해야 합니다. 송장환 사장이 창원에 납품하는 S기업 신규 물량은 디욤코리아 제품을 씁니다. 물량도 차츰 늘어나고 있습니다. 의료용 병을 생산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디욘코리아 제품을 쓰기로 했습니다. 주문은 가끔 홈페이지를 보고 연락이 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홈페이를 하나 만들까 합니다.”
“우리가 홈페이지가 없었던가요?”
“지에이치 모빌은 있는데 디욘코리아는 아직 없습니다.”
“그건 지에이치 미디어의 디자인 팀장에게 연락을 해보세요. 전에 홈페이지 제작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아, 거기다가 부탁하면 되겠군요. 그러면 디자인 팀장을 한번 이곳으로 내려오라고 하지요. 어떻게 만들것인가 서로 의논해야 하니까요.”
“연락 알지요?”
“압니다. 전에 신정숙 사장님 명함을 받은적이 있습니다.”
“거기 오민숙 디자인 팀장을 찾으면 됩니다. 홈페이지 제작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당연히 지불해야지요.”
“혹시 영업지원을 위해 신문광고나 방송광고 같은건 안해도 될까요?”
“디욘코리아의 생산제품은 일반인을 상대로 판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문적으로 플라스틱 성형업체인 사출기나 압출기를 갖고 있는 공장에 판매하는것이니까 매스콤 광고는 필요없습니다.”
“참, 이지노팩을 방문해 보십시오.”
“에? 이지노팩이요?”
“이지노팩에 가셔서 다른 사람은 만나지 말고 김승각 회장님을 바로 만나세요. 내가 보내서 왔다고만 하시고 디욘코리아의 제품 설명서나 갖다주세요.”
“그렇게만 말하면 됩니까? 이지노팩은 지에이치 모빌과 어쩌면 경쟁업체일수 있는데요.”
“전에 나한테 디욘코리아의 제품을 써주겠다는 약속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렇게만 아시고 내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만 하세요.”
“알겠습니다.”
김동찬 전무는 디욘코리아에서 생산한 원재료 샘플과 제품 설명서를 들고 평택시 진위면에 있는 이지노팩 공장을 찾아갔다. 바로 김승각 회장실로 올라갔다. 회장실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김승각 회장님 계시지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나, 디욘코리아의 김동찬 전무요.”
“잠깐 기다리세요.”
비서가 회장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김동찬 전무는 이지노팩 회장에게 90도로 인사를 하였다.
“김이사, 아니 김전무 어서 오시오.”
김동찬 전무의 영업이 시작되었다.
“회장님은 아직도 옛날 모습 그대로입니다. 물파산업 오세영 회장님도 가끔 회장님 말씀을 합니다. 신세를 많이졌는데 보답도 못하고 은퇴하셨다고 합니다.”
“허허, 물파 회장이 그랬어요? 그 양반은 지금 잘 있지요.”
“뭐, 수원에서 작은 빌딩 하나 가지고 있으면서 마음은 편하다고 합니다.”
“물파의 오세영 회장하고 골프치러 다닐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많이 갔네요. 그때 김이사, 아니 김전무도 30대라 우리 시중들고 그랬는데 김전무도 이제 세치가 많이 났네?”
김동찬 전무는 역시 영업맨 출신이라 노련했다. 구건호가 말한 것을 바로 전하지 않았다. 이지노팩 회장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 옛날 향수부터 슬슬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