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85화 (185/501)

# 185

동경에서의 만남 (1)

(185)

준공식 다음날은 금요일이었다.

구건호는 아산의 디욘코리아 공장이 정리가 다 되었는지 보러갔다.

새 건물에 집기는 다 들어 왔는데 직원들이 사물함을 옮기느라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구건호는 자기가 있으면 방해를 받을까봐 다시 지에이치 모빌의 직산 공장으로 왔다.

구건호는 총무이사를 불렀다.

“지난번에 미국을 갔다 온 연구소의 차장과 대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제 아산 공장 준공식에 지원 나갔다가 지금 복귀해 근무하고 있습니다. 불러 올까요?”

“아니오. 아산공장 생산부로 전출 발령을 내세요.”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아산에 있는 김전무를 전화로 불렀다.

“아까 아산에 갔다가 다들 바쁜 것 같아 다시 직산으로 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사장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가셨네요.”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미국에서 연수받고 온 차장과 대리 말입니다. 이제 준공식도 끝났으니 이쪽으로 발령을 내 주십시오. 애덤 캐슬러와 연구소장에게는 제가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내 드리지요.”

“그 두 사람 이쪽으로 오면서 퇴직금 승계는 안 됩니까?”

“그건, 안됩니다. 우선 미국 디욘 본사에서 반대할 겁니다. 만약에 애덤 캐슬러가 그만 둔다면 이제 막 생긴 합자사에서 퇴직금을 줄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긴 합니다만 어제 지원 나갔던 그 친구들이 거기에 집착을 해서요.”

“호봉을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지요.”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연구소장을 사내 전화로 불렀다.

“이제 미국 연수 받고 온 두 사람 합자사로 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난번에 새로 채용한 다섯 명이 있어서 빼도 됩니다.”

“그 두 사람 내방으로 좀 오라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총무이사가 결재서류를 들고 왔다.

“사장님이 지시한 두 사람 전출발령 품의서입니다.”

“검토할 일이 있으니 결재서류는 잠시 내 책상위에 올려놓고 가세요.”

“알겠습니다.”

총무이사가 나가는 것과 동시에 미국 갔다 온 두 사람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모두 경력사원으로 입사하신 것 같은데 얼마나 되셨습니까?”

“저는 4년 되었습니다.”

“저는 2년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제 디욘코리아로 전출 발령이 납니다. 미국 가서 연수도 받았으니 가시면 잘 하실 것으로 봅니다. 국민연금이야 승계가 되겠지만 퇴직금은 승계가 안 됩니다. 여기서 정산하고 가야 합니다.”

“------”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대신 호봉 조정은 해 드립니다.”

두 사람은 다시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였다.

“저는 가겠습니다.”

대리는 경력사원 입사 2년 밖에 안 되어 그런지 힘찬 목소리로 가겠다고 말했다.

차장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제가 4년 근무한 퇴직금은 바로 현금으로 나오는 겁니까?”

“나옵니다.”

“알겠습니다. 가서 열심히 근무하겠습니다.”

구건호는 조금전 총무이사가 올린 전출발령 품의서를 보았다. 품의서 뒤에는 두 사람의 인사기록 카드가 붙어 있었다.

“한 직급에 4년, 2년씩 된 사람들이니까 호봉 조정보다는 승진이 낫겠다. 그래야 신바람도 날 테니까.”

구건호는 총무이사를 다시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전출발령 결재서류는 다시 정정해서 가져오십시오.”

“어떻게 정정하면 되겠습니까?”

“차장은 부장으로 대리는 과장으로 승진시켜 전출 발령을 내시고 퇴직금은 정산해 주십시오. 아울러 김동찬 전무도 퇴직금을 정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김동찬 전무는 퇴직금이 꽤 되겠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장에서 임원 될 때 한번 자동 정산되었고 또 중간에 집을 산다고 중간 정산을 했었습니다.”

“흠,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 결재서류는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경리과장과 총무과장에게 디욘사로 가겠냐고 이사님이 한번 면담을 해보십시오.”

“알겠습니다.”

총무이사가 나가자 구건호는 조용히 사무실을 나왔다. 비서 박희정씨에게 말했다.

“나, 일이 있어서 오늘 안 들어옵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구건호는 차를 김포공항으로 몰았다. 일본에 가기 위해서였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탑승할 때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하고 구름을 뚫고 가니 아직도 해가 쨍쨍했다. 구건호는 비행기 아래에 있는 구름을 보며 모리 에이꼬를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였다.

“에이꼬! 오빠가 지금 간다!”

구건호는 사무실에서 에이꼬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모리 에이꼬는 다행히 동경에 있었다.

비행기 좌석은 만원이었다. 하지만 구건호가 탄 비즈니스 석은 자리가 많이 비어있어 좋았다. 발 뻗기도 편했고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도 달랐다.

“음료수 드릴까요?”

구건호는 위스키를 시켰다.

“위스키 한잔.”

구건호는 위스키 한잔을 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준공식도 끝나서인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더구나 모리 에이꼬를 만나러 가니 더욱 마음이 푸근해짐을 느꼈다.

구건호가 시부야의 다이칸야마에 도착한건 오후 7시가 넘어서였다. 맨션의 키는 아직도 구건호의 전화번호 그대로 였다. 집안은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구건호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침대에 누었다. 모리 에이꼬로부터 문자가 왔다.

[“지금 아카사카의 요정에 있어요. 오늘 관방장관이 오신다고 해서 좀 늦어요. 10시쯤 도착할게요. 사랑해요 오빠. ♡♡♡”]

구건호는 심심했다. 밖으로 나와 시부야의 거리를 걸었다. 휘황찬란한 조명 밑에 예쁜 가게들이 많았다. 구건호는 인형가게에서 커다란 곰 인형을 샀다. 어슬렁거리며 집에 들어갔더니 아직도 9시밖에 안되었다. 재미없는 TV를 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구건호는 문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깨었다. 모리에이꼬가 커다란 비닐봉지 보따리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에이꼬!

“오빠!”

구건호는 에이꼬를 와락 껴안았다. 에이꼬는 방금 뛰어와서 그런지 향수 냄새와 함께 땀 냄새가 났다. 약간의 술 냄새도 났다.

“너 술 마셨구나?”

“응, 관방장관이 춤추고 나니까 수고했다면서 한잔 주었어.”

구건호는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오빠, 이제 그만! 숨 막혀.”

“그 보따리는 뭐냐?”

“무대복이야. 마마상이 주었어.”.

“나도 보따리 하나 있다.”

구건호가 곰 인형이 든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어마나, 곰 인형이네. 킥킥. 오빠처럼 생겼다.”

“까불래?”

구건호는 모리 에이꼬를 침대에 와락 눕혔다.“

“나 씻어야 돼.”

“괜찮아.”

구건호는 서로 씻지도 않고 모리 에이꼬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었다. 침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오랫동안 났다.

구건호는 아침에 모리 에이꼬가 끓여준 일본 라멘을 먹었다. 구건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사과 한쪽을 먹고 나니 조금 나아졌다.

“여기서 롯폰기 힐스가 가깝다며? 오늘 거기나 놀러가자.”

“좋아. 나 거기 롯폰기 힐스 52층에 있는 도쿄 시티뷰에서 빌었어. 좋은 남자 만나게 해달라고.”

“왜, 거기서 빌어. 절에 가서 빌어야지.”

“거기 가면 후지산이 보이잖아. 후지산 보고 빌었어. 마마상하고 같이 놀러간 날 나 혼자서 후지산 바라보고 좋은 남자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어. 그래서 오빠 만났나봐.”

모리 에이꼬가 해맑은 모습으로 웃었다.

구건호는 모리 에이꼬와 함께 롯폰기로 놀러 갔다. 주위에 대사관이 많다보니 외국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모리 에이꼬는 걸음이 빠른 구건호를 깡충거리며 잘도 따라다녔다. 구건호는 롯폰기 힐스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도쿄 시티뷰로 올라갔다. 모리 에이꼬는 정말 후지산 쪽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어스름 저녁때가 되어 구건호와 모리에이꼬는 롯폰기에 있는 유명 클럽에 들어갔다.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스테이지 위에서 젊은 남녀들이 힙합 댄스 같은 춤을 추고 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무대를 바라보던 구건호가 말했다.

“쟤들 봐라. 저기서 엉터리 막춤을 춘다.”

모리에이꼬는 젊은 남녀들이 춤추는 것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안되겠다. 네가 나가서 게이샤 오도리 한번 추어야겠다.”

“호호, 오빠는! 그런 건 여기서 안 어울려!”

모리에이꼬는 작은 주먹으로 구건호의 가슴을 쳤다.“.

일요일 아침이 되었다.

구건호는 모리 에이꼬가 끓여준 흰죽을 같이 먹었다.

“지금 출발한다고?”

“응, 오빠 가는 것 못 봐서 미안해. 이번 공연은 나고야의 니노마루에서 해. 그래서 무대복을 마마상한테 빌린 거야. 공연 끝나면 갖다 줘야 돼.”

“그런 것 하나 사지 그래. 옷 보따리 들고 왔다갔다 힘들잖아.”

모리 에이꼬가 웃었다.

“이런 건 파는 데가 없어.”

구건호는 모리 에이꼬를 보내놓고 다이칸야마에 있는 맨션에서 잠을 잤다. 어제 모리 에이꼬와 함께 롯폰기 일대를 돌아다녀서 그런지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코까지 골며 잤다.

잠을 자고나니 점심때가 거의 다되었다. 구건호는 한국 음식이 먹고 싶었다.

“아카사카의 최사장 식당으로 가자!”

구건호는 아카사카로 왔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아카사카 식당은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최지연 사장은 카운터에 있었다. 손님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식당에 나오는 모양이었다.

“어머! 구사장님!”

“아휴, 장사 잘 되네요.”

“만났어요? 모리에이꼬.”

“만났지요. 어제 롯폰기 힐스에 놀러 가기도 했었는데요.”

“잘 하셨어요. 에이꼬가 이제 생기가 돌겠네요.”

“나도 여기서 밥이나 먹고 갈게요. 일본음식 잘 안 맞네요. 설렁탕 한 그릇 얼른 먹고 나갈게요.”

구건호는 손님들이 많아서 최사장과 길게 이야기 할 수도 없었다. 한쪽 구석에서 설렁탕 한 그릇을 후딱 먹고 나왔다.

“커피를 안 마셨네. 나는 점심 먹으면 꼭 커피를 마시는데. 어디가서 마실까.”

구건호는 커피숍을 찾아다니다가 뉴오따니 호텔 쪽으로 왔다.

“호텔에 가서 마시자. 커피 값이 좀 비싸지만 분위기는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구건호는 호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다. 구건호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슬슬 공항으로 가볼까?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네.”

구건호는 로비 쪽으로 내려 왔다. 로비에는 여행객들이 후론트에서 체크인을 하기 위해서 많이 몰려 있었다. 구건호가 걷고 있는데 누가 불렀다.

“구 사장님 아니십니까?”

돌아보니 BM엔터테인먼트 기획이사였다.

“지난번에 상해에서 고마웠습니다. 일본에도 자주 오시는 모양이지요?”

“사업상 가끔 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공연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화보집 촬영이 있습니다. 스탭들과 같이 왔습니다. 참, 설빙도 같이 왔습니다.”

설빙은 스탭들 사이에서 검은 선그라스를 낀 채 서 있었다.

“오, 설빙씨 여기서 뵙네요.”

구건호가 설빙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스탭들이 구건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설빙이 안경을 벗으며 웃었다.

“지에이치...?”

“오, 우리 회사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 것 같군요. 지에이치 모빌의 구건호입니다. 상해에서 보고 여기서 보니 반갑습니다.”

“동경에 자주 오시는 모양이지요?”

“네, 자주 옵니다. 동경 구상을 할 때는요.”

“동경... 구상요?”

“네, 사업의 중요 결정을 위한 생각을 할 때는 가끔 옵니다.”

설빙은 웃으면서 다시 선그라스를 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상해의 일은 고마웠습니다.”

설빙은 가벼운 목례를 하고 스탭들에 둘러 쌓여 가버렸다.

구건호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방금 비너스 여신하고 이야기 한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