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81화 (181/501)

# 181

톱스타 설빙 (2)

(181)

상해 국제 도서전은 개막식이 오전 10시에 있다고 하였다.

구건호와 신정숙 사장은 힐튼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도서전이 열리는 남경로의 전람관(展覽館)으로 갔다. 개막식 행사는 전람관 강당에서 열렸다. 단상위에는 프랑카드에 붉은 글씨로 상해 국제도서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구건호는 방명록에 한글로 ‘한국 지에이치 미디어 동사장 구건호’라고 썼다. 접수를 하는 도우미들이 구건호의 한글 글씨를 보고 자기들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방명록은 모두 중국어로 쓰는데 한글을 보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시 정부의 문화담당 부시장이 나와 축사를 하고 박수소리가 끝나자 요란한 축포 터지는 소리가 났다. 단상위의 귀빈석에는 리스캉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구건호는 단하의 외국인들이 앉아 있는 곳에 앉았다.

구건호와 신정숙 사장은 옷에 도우미들이 달아준 꽃을 꽂고 천천히 도서전을 둘러보았다. 어린이용 그림책에서부터 딱딱한 철학서적까지 모두 있었다.

“구건호”

누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리스캉이었다.

“여기 있는 줄 모르고 한참 찾았네.”

구건호는 신정숙 사장에게 리스캉을 소개했다.

“상해시의 문화담당 국장입니다.”

신정숙 사장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 이 분이 지에이치 미디어의 신정숙 사장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신정숙이란 이름까지 아네.”

“조금 전에 방명록 봤어.”

리스캉은 신정숙 사장에게 중국 출판사 사장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중국은 출판사에 대한 영업허가가 엄격하여 출판사의 규모가 제법 컸다. 한국처럼 진입장벽 없이 직원 한두 명 있는 출판사들이 아니었다. 신사장은 중국 출판사 사장들 명함을 수십 장도 더 받은 것 같았다.

리스캉이 구건호의 귀에 대고 이야기 했다.

“구건호 고마워, 방금 중국 출판사 사장들에게 한국의 유명 출판사라고 소개했어. 그러니 저렇게 신사장에게 명함주고 그러는 것 아니겠어? 자기들 출판사 책 좀 한국에서 출간하게 해달라는 일종의 로비지.”

“그런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한국의 유명 출판사 지에이치 미디어의 동사장이 나하고 둘도 없는 친구라고 했어.“

“하하, 맞는 말 했구나.”

“고마워, 둘이 와줘서 내 체면 조금 올라갔어.”

“그래 이제 바쁠 텐데 일 봐라. 우리는 전시된 도서나 천천히 보다가 갈게.”

구건호는 전시된 도서를 구경하다가 신사장에 물었다.

“이 많은 도서 중에서 우리가 정말 판권을 사들일 만한 것이 없나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역사책 몇 권은 관심이 있는 것도 있네요.”

구건호는 신사장에게 말했다.

“그 역사책이 초판만 다 나간다면 계약하세요. 혹시 출판비용이 필요하다면 내가 추가 지원해 드리지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저희 출판사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역사책 3권만 계약하겠습니다.”

“계약할 때 시 정부의 문화 광파영시국의 리스캉 국장이 강력 추천한 책이라 계약한다고 하세요.”

“호호, 알겠습니다.”

신정숙 사장은 도서전 현장 부스에 나와 있는 출판사 관계자들과 즉석에서 계약을 했다. 신사장은 구건호가 한 말을 그대로 중국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이야기 했다.

“상해 시 정부의 리스캉 국장님이 강력하게 추천해서 내용도 안보고 계약합니다.”

“오우, 쓰마(그렇습니까)?”

신사장은 소액의 계약금만 주고 나머지는 한국에 돌아가서 외화 송금하기로 하였다. 신사장이 계약할 때 통역은 구건호가 했다. 신사장이 미안한지 웃으며 이야기 했다.

“호호호, 구사장님이 통역을 하니까 제가 사장이고 구사장님은 직원 같네요.”

“하하, 그렇군요.”

구건호와 신정숙 사장이 간이 의자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데 김민혁이 왔다.

“어, 왔냐?”

“늦어서 미안하다.”

“참, 지에치 미디어의 신정숙 사장님 알지?”

“알지. 안녕하세요?”

김민혁이 신사장에게 인사를 하였다. 신사장도 웃으면서 고개를 까닥했다.

“신사장님은 지에이치 중국 공장 못 보셨지요?”

“못 봤습니다.”

“언제한번 놀러 오세요. 쑤저우에 있습니다.”

“호호, 알겠습니다.”

“너, 청도 갔다 온 일은 잘 됐냐?”

“잘 됐어. 클레임이 걸려서 갔다 왔어.”

“클레임?”

“납품한 것이 1만개 이상 불량이 나왔다고 해서 놀래 뛰어 갔지.”

“그래? 1만개씩이나 왜 불량이 나와. 퇴직한 공장장도 여기 와서 자문역으로 있는데.”

“가서 보니까 우리 것이 아니야. 부품 식별 표시 보니까 다른 업체에서 만든 것이더라고. 육안으로 보면 우리 것하고 똑 같아.”

“다행이구나.”

“그쪽 사장이 미안하다고 하면서 불량품을 반품하고 우리 쪽 물량을 늘려주기로 했어.”

“다행이구나.”

“그래서 공장에 들렸다 오느라고 늦은 거야.”

“그래? 참, 우리끼리만 이야기해서 신사장님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말씀 나누세요. 중요한 이야기들 나누시는 것 같은데요.”

“김민혁, 너 도서전 구경 안했지? 우리 여기 앉아 있을 테니 얼른 구경하고 와라.”

“도서전 구경은 뭐.... 됐어. 그냥가자. 책이 다 그게 그건 거 같다.”

“그래도 왔으니 보지. 그거 보고 점심 먹으면 딱 맞겠다.”

“나중에 시간 있을 때 볼게.”

“너, 장인어른 미술 전시회 하는 데가 어디냐?”

“여기서 가까워. 인민공원 근처야. 슬슬 걸어가도 될 걸?”

구건호, 김민혁, 신정숙 세 사람은 미술 전시회를 찾았다. 미술 전시회는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미술관 입구에 현수막이 있는데 ‘딩펑(丁鳳) 선생 산수화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세 사람이 전시회장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앉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중국인과 약간 다른 세련된 복장의 세 사람이 오자 안내 하는 사람은 웬 돈 있는 사람이 왔나 하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림은 의외로 잘 그렸다. 신선이 살 듯한 구름 낀 산이 나오고 호수 위에 나룻배가 있고 하는 전통 산수화였다.

“야, 너희 장인 그림 끝내준다.”

“평생 그림만 그렸다고 했으니까. 잘 그리겠지.”

그림에 조예가 깊은 신사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데요.”

전시된 그림은 많지 않았다. 20점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구건호는 자기가 왔으니 그림 한 점은 사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안내 직원에게 물었다.

“작품 판매도 하지요?”

“예, 합니다.”

“저기 여섯 번째 산수화는 얼마나 합니까?”

“여섯 번째가 마음에 드십니까?”

직원은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띠며 A4용지에 적힌 가격표를 보여주었다. 구건호가 가격표를 보았다. 작품이름과 그림 사이즈 및 가격이 나와 있었다.

제목은 산중취선(山中醉仙)이고 가격은 3천 위안(한국돈 55만원 정도) 이었다.

김민혁이 말했다.

“산중취선? 술 취한 신선인 모양인데 신선을 작게 그려 잘 보이지도 않네. 산은 웅장하게 잘 그렸군. 그런데 산이 너무 악산이야. 악중선(岳中仙)이라고 이라고 해야 되겠네.”

구건호가 구입 신청서에 이름과 주소를 쓰자 직원이 눈을 크게 껐다.

“오, 한국인이시군요. 저는 손님이 중국어를 잘해 타이완 쪽에서 오신 분인 줄 알았습니다.”

구건호가 돈까지 주자 직원은 돈을 책상에 집어넣으며 눈웃음을 띠고 말했다.

“작품 반출은 전시회가 끝나고 합니다.”

“반출은 표구를 없애고 그림만 구입 신청서에 있는 주소로 보내주세요.”

구건호는 그러면서 인민폐 2백 위안을 추가로 직원에게 주었다.

“EMS우송료 하세요.”

“아? 가, 감사합니다.”

직원은 색연필을 들고 작품 밑에 있는 그림제목을 쓴 스티커에 빨간 표시를 하였다. 빨간 표시는 팔렸다는 표시였다.

구건호가 나가려고 하자 직원이 급하게 불렀다.

“손님, 잠시만요.”

“예?”

“그림 구입 신청하셨으니 작가님과 기념 촬영하십시오. 방금 사신 6호 그림 앞에서 손님과 작가분이 같이 서서 사진 찍으시면 됩니다.”

“아, 그런가요?”

“작가님은 3층에 계시니까 금방 내려오십니다.”

“그런 제도가 있었나?”

직원이 전화를 하자 김민혁의 장인 되는 화가가 나타났다. 60대로 보이는 장인은 예술가 답게 턱수염을 길렀으며 백발이 섞인 머리를 꽁지머리로 묶은 사람이었다.

“이 분이 작품을 사시겠답니다.”

구건호와 장인이 서로 인사를 하였다.

장인은 김민혁을 보았다.

“오, 자네도 왔나?”

“그림 산 사람이 제 친구입니다.”

“그래? 한국에서 오셨나?”

“그렇습니다.”

구건호와 장인은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신정숙 사장이 갑자기 김민혁의 장인에게로 갔다.

“안녕하세요? 이 분하고 한국에서 같이 온 사람입니다. 선생님 그림이 아주 좋네요.”

“고맙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출판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신정숙 사장이 화가인 딩펑선생에게 자기 명함을 주었다.

딩펑은 명함에 있는 한글을 못 읽으니 뒷면의 영어를 보았다.

“국제 도서전 때문에 오신 모양이군요.”

“선생님 혹시 한국에서 전시회를 하신 적 있습니까?”

“한국에서의 전시회는 아직 없습니다. 일본과 홍콩에서는 한번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그림이 참 좋네요. 혹시 명함 있으면 한 장 주시겠어요?”

“그러지요.”

딩펑 선생은 하얀 바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신정숙 사장에게 주었다. 구건호에게도 한 장 주었다.

구건호는 귀국하기 위하여 홍차오 공항으로 갔다.

구건호는 김민혁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쑤저우(소주)에 있는 공장에 들리고 싶은데 아산공장 준공식 날도 가까워 가봐야겠다.

“그래, 언제 한번 오면 단동도 가보자.”

“알았다.”

김민혁은 구건호와 신정숙 사장과 악수를 하고 소주로 돌아갔다.

탑승실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구건호가 신사장에게 물었다.

“미술관에서 딩펑선생 명함을 왜 달라고 했습니까?”

“그림이 의외로 좋았어요. 그래서 혹시 나중에 인연이라도 있을까 해서 그랬습니다.”

“한국에서 실경 산수화는 한물 갔잖아요?”

“그러긴 합니다. 서양화 쪽으로 많이 옮겨갔고 비구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딩펑 선생의 북종화 계열은 또 다른 느낌이 들게 하네요.”

구건호는 북종화가 뭐냐고 물으려다 자기 무식이 탄로 나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비행기 안에서 스튜어디스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였다.

구건호는 스튜어디스들을 보고 갑자기 리국장 실에서 본 영화배우 설빙이 생각났다. 의자를 눕혀놓고 눈을 감으니 더욱 생각이 났다.

“설빙? 빙수가 생각나긴 해도 중국인들에게는 부르기 좋은 이름이군. ‘슈에빙(薛氷: 설빙)’이니 말이야.”

구건호는 설빙과 모리 에이꼬를 비교해 보았다. 모리에이꼬는 어리고 귀여운 토끼 같았지만

설빙은 도도하고 세련된 미인으로 보였다.

구건호는 옆에 있는 신사장에게 물었다.

“신사장님, 혹시 탈랜트 설빙을 아세요?”

“설빙요? 구사장님 설빙 팬이신 모양이네요.”

신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팬은 아니고 어제 리국장 방에서 만나 인사했어요.”

“어머나, 설빙이 상해를 왔어요? 설빙 주연의 드라마가 중국에서 뜨고 있다는 말은 들었어요. 걸그룹 출신이라 노래도 잘 부르고 연기도 잘하지요.”

“유명합니까? 저는 드라마를 잘 안 봐서.”

“지금 한국에서 방영하는 인기 드라마 ‘욕망의 그늘’이 시청률이 엄청 높아요. 거기에 주연으로 나오는 설빙은 지금 한국의 톱스타에요. 화장품 광고나 소주 광고 같은데도 많이 나오는 것 같던데요?”

“그래요?”

구건호는 다시 잠든 척 했지만 설빙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잠들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