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79화 (17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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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 그늘집 대화 (2)

(179)

중국에서 우편물이 하나 왔다. 리스캉의 친필 싸인이 들어간 상해 국제 도서전 초청장이었다. 초청장은 두 장이었다. 리스캉은 초청장과는 별개로 구건호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중국어 문장으로 된 이메일 이었다. 중국에서 공부한 구건호는 이메일을 읽는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To: 친구 구건호에게

어제 왕지엔을 만났네. 왕지엔은 이번에 한국에 가서 친구 구건호에게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하더군. 그리고 상해의 국제 도서전 소식도 전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한국은 국제도서전이 열릴 때 어느 기관에서 관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은 북경의 경우 신문출판 광전총국(廣電總局)에서 하고 이곳 상해는 문화 광파영시국(廣播影視局)에서 관장한다네.

내가 이곳의 책임자로 있다보니 여러나라에서 참여를 해주었으면 하는데 얼마나 참여를 할지는 모르겠네. 자네가 지에이치 미디어란 회사를 운영한다고 하니 그곳 총경리(사장)와 동사장(이사장)이 참관해 준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느끼겠네.

항상 주는 것 없이 받는 것만 생각해 너무 염치가 없네. 좋은 소식 기다리겠네.

From: 상해에서 리스캉 』

구건호는 이 메일을 받고 지에이치 미디어의 신정숙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사장님 신정숙 입니다.”

“보내주신 만화 세계역사 1, 2권은 잘 보았습니다.”

“만화 역사는 3, 4권도 나왔습니다. 내일쯤이면 사장님도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책은 잘 나갑니까?”

“세계역사 1, 2권은 3쇄 들어갔습니다. 이미 아마존에서 검증된 책이라 기대 이상으로 판매 호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직원들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좋은 일이군요. 에, 그리고 상해에서 국제도서전이 열린다는 소식은 들었습니까?”

“예, 들었습니다. 국내 서적을 출판하는 회사들은 이미 참여 신청을 한 출판사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여 못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로 해외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곳이라 해당이 없겠습니다.”

“거기 참여해서 중국 도서의 판권을 수입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중국 책은 한국 시장에 그리 인기가 없습니다.”

“초청장이 왔는데 한번 참여해 보시겠습니까?”

“글쎄요. 쓸데없는 비용만 나갈 것 같은데요?”

“실은 상해의 국제도서전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내 친구입니다. 물론 중국인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상해 시 정부의 문화 광파영시국이라는 부서의 국장으로 있는데 이번 도서전을 총괄하는 기관입니다. 나한테 초청장까지 보내고 꼭 와달라는 이메일 편지까지 왔네요.”

“그럼 사장님은 안가실수 없겠네요.”

“내가 가봤자 도서에 대해서 뭐 압니까? 마침 초청장도 2장이 왔으니 신사장님과 같이 가면 어떨까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저는... 사장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경비가....”

“경비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이곳 지에이치 모빌에서 출장 경비를 처리해도 되고 또 내 개인 통장에서 지출해도 됩니다.”

구건호는 3군데 회사에서 급여를 받고 있다. 구건호는 이 월급을 거의 쓰지 않아 고스란히 통장에 누적되어 쌓여있는 중이었다.

“그럼 한번 가지요. 실은 국제도서전이라면 출판인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니까요.”

“거기 가서 출판 계약은 안 해도 됩니다. 단지 내 친구인 담당국장 체면만 살려주고 오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가 가는 날자가 확정되면 다시 연락드리지요.”

“예,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리스캉에게 이메일 답장을 보냈다.

『“국제도서전을 개최한다니 매우 큰일을 맡았구나. 나도 출판사를 가지고 있으니 출판사 사장과 함께 도서전애 참가하겠다. 그리고 친구의 얼굴도 보고 싶다,.

언제나 우리 우정 변치 말자.

-한국에서 구건호-』

구건호는 리스캉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김동찬 전무가 젊은 사람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번에 디욘코리아에서 새로 뽑은 직원입니다.”

“아, 그래요? 자리에 앉아요.”

김전무와 신입사원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김전무가 두 사람의 이력서를 내밀었다.

두 사람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해외 교환학생이나 해외 봉사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이는 30세 안팍으로 구건호 보다는 5년 이상 어려 보였다.

구건호는 김전무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맡을 예정입니까?”

“한 사람은 수출입 업무를 맡고 한사람은 영업을 맡길 예정입니다.”

“경리와 총무는 지에이치 모빌의 기존 직원 중에서 차출한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경리와 총무는 아무래도 경험자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지에이치 모빌의 대리나 과장급에서 차출하고 그 밑에 신입사원을 한두 명씩 배치시킬까 합니다.”

“흠.”

구건호가 신입사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입사를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디욘코리아 공장 건물이 아직 완공이 안 되어 당장은 불편하겠는데?”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입을 벌리고 병아리처럼 말했다.

“두 사람 다 이쪽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인가요?”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아산에 계십니다.”

구건호가 다시 신입사원을 향해 말했다.

“좋은 사람들이 들어와 나도 기쁩니다. 옆에 계신 김 전무님 따라 다니면서 부지런히 일을 배우세요. 열심히 하다보면 승진 기회도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공장 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들어와 창업 맴버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잘해봅시다.”

구건호는 한사람씩 악수를 하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김전무와 함께 신입사원들은 구건호에게 크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나갔다.

구건호는 차를 한잔 마시며 방금 본 해맑은 얼굴의 신입사원들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이제 나도 해가 바뀌어 36살이 되었네. 지금 온 친구들이 나를 길에서 보면 형이라고 할까? 아저씨라고 할까?”

구건호는 거울을 보았다.

“이제 나도 삭았어.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왔지. 그러다보니 이렇게 삭았네. 스물 한 살의 모리 에이꼬는 정말 내가 좋아서 따르는 것일까? 아니면 내 재력 때문인가?”

구건호는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얼굴 피부 맛사지를 받기 위해 천안 시내로 나왔다.

구건호는 피부 맛사지를 받고 점심까지 먹었으면 회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오늘따라 회사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돈은 좀 있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나? 회사 내의 골치 아픈 갈등을 처리해야 하고 때로는 판단도 해야 하고 회사의 성장을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 삶이 과연 옳은 건가?”

사장들은 내면적 고충을 어디 가서 상담할 때도 없을 것 같았다.

구건호는 5년 전 자기에게 만석꾼이 팔자라고 말했던 강남 박도사가 생각났다.

“그 양반이나 보러 갈까? 퇴원해서 진작 괴산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괴산을 한번 가봐? 괴산이라면 서울에선 멀지만 천안에서는 한 시간이면 갈수도 있잖아?”

구건호는 승용차를 회사 대신 괴산으로 몰았다. 가다가 중간에 인삼 선물세트를 하나 샀다.

구건호는 괴산에 도착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물어서 청학정사(靑鶴精舍)를 찾았다.

청학정사는 박도사가 직접 지었다고 했는데 생각 보다는 크지 않았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얹어 그럴 듯 했지만 방의 크기는 구건호의 사장실보다도 훨씬 작은 것 같았다. 청학정사의 뒤에는 목조 양옥집이 있어 살림은 그곳에서 하는 것 같았다.

청학정사의 맷돌 위에는 신발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방문객들이 온 것 같았다. 문틈으로 보니 박도사는 사람들 사주를 보아주고 있었다. 교자상을 펴놓고 방바닥에 앉아서 사주를 보아주고 있었다.

“허, 여기서도 사주를 보네.”

그러고 보니 청학정사의 동쪽 공터에 고급 승용차가 두 대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손님들이 타고 온 차인 것 같았다. 구건호가 청학정사 마당에서 30분이나 기다렸다.

“사주 보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걸려. 빨리하지.”

구건호가 시계를 보고 있는데 손님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손님들이 완전히 나온 것을 보고 구건호가 들어갔다.

“안녕하셨습니까?‘

“오, 구사장 아닌가? 아침에 까치가 울더니 귀한 손님이 왔네.”

구건호는 정관장 인삼 선물세트를 조용히 박도사의 상 옆에 놓았다.

“귀한 선물까지 사들고 온 모양이네.”

“바람도 쏘일 겸 해서 나왔다가 한번 들렸습니다.”

“앉으시게.”

구건호가 양반다리를 하며 방바닥에 앉았다.

“답답해서 왔지? 사람은 그럴 때가 있어. 내가 자네 사주를 잊어버렸네. 생년월일을 불러봐.”구건호가 생년월일을 불러주었다.

박도사가 사주를 뽑았다. 박도사는 구건호의 사주가 적힌 종이를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볼 것도 없는 신왕재왕 사주야! 잘 먹고 잘 살겠군.”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아직 결혼도 못했습니다.”

“걱정 마. 마누라 여러 명 데리고 살 팔자야.”

“마누라를 어떻게 여러 명 데리고 삽니까?”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한 명만 마누라 하겠지. 그 대신 애인이 많겠구먼. 그것도 숨겨 논 애인 말이야.”

“돈은 좀 벌었지만 정말 여자는 없습니다.”

박도사는 고개를 구건호 쪽으로 쑥 내밀었다.

“없어? 정말 없어? 숨겨 논 애인도 없어?”

구건호는 모리 에이꼬 생각이 나서 우물쭈물 하였다.

“말못하는 걸 보니 있긴 있는 모양이구먼. 그런데 하나 더 생겨. 애인도 하나 더 생기고 마누라도 생겨.”

“좋아하는 사람 한사람이면 되지 자꾸 생겨 뭐합니까?”

박도사는 싱글싱글 웃었다.

“그게 팔자인 걸 어떡해. 촌구석에서 술사로 살아가는 나보다 백배 천배는 났잖아?”

“그, 그게.”

“자네 사주가 재왕(財旺)하다고 그랬지? 여자들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사주에서는 재와 여자는 같이 취급하네. 재왕 하다는 것은 여자도 왕 하다는 이야기지.”

“그렇습니까?”

“자네 구운몽이란 책을 읽어보았나?”

“조선시대 서포 김만중이 쓴 책 말입니까?”

“그렇지. 시험에 잘 나오니 저자 이름은 아는군. 하지만 읽어보지는 못했지?”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 양소유는 마누라와 첩을 얼마나 데리고 살았는지 아는가?”

“모르겠는데요.”

“2처(妻) 6첩(妾)을 데리고 살았네. 마누라 둘과 여섯 명의 첩을 데리고 살았지. 벼슬도 영의정까지 하고 돈도 많은 부자였지.”

“허, 그런가요?”

“주인공 양소유는 말년에 인생무상을 깨닫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죽어서도 극락을 갔네. 양소유의 삶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꿈이고 로망이었지.”

“하하, 설마요.”

“양소유 처럼 2처 6첩을 데리고 부자로 호의호식하고 지내다가, 죽어서는 극락에 가는 삶도 있네. 반대로 나 같은 삶도 있고.”

“도사님이 어때서요?”

“평생 이렇게 마누라도 없이 가난하게 살다가 죽어서는 지옥에 가겠지.”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네. 자네는 만석꾼이 팔자에 2처 6첩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마누라 하나에 일본과 중국에 애인 하나씩은 두고 살 팔자네.”

“하하, 말씀 들으니 맞을지 안 맞을지는 몰라도 기분은 좋네요.”

구건호는 두둑한 복채를 주고 청학정사를 나왔다.

“올라가서 청담동 이회장 만나면 안부나 전해 주시게. 그 친구 생각보다는 멋있는 친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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