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67화 (167/501)

# 167

동경 구상 (1)

(167)

구건호가 출근하기 위해서 끌고나온 랜드로버의 기름이 앵꼬 직전이었다. 천안 백석동 부근에서 주유 후 다시 출발을 하는데 S기업 부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구사장? 나요. 오늘 구사장과 점심 약속한 날인데 연기해야 될 것 같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

“분당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신 집안 어른이 돌아가셨어요. 이 분이 자식이 없다보니 부득이 내가 가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될 상황이네요.”

“점심이야 다음에도 얼마든지 할수 있으니 일 보세요. 몇 일 고생하시겠네요.”

“미안해서 어쩌나. 구사장이 모처럼 시간을 내어 준건데.”

“아닙니다. 아닙니다. 초상 치루시고 한가해지면 전화주세요.”

구건호가 신문을 보는데 임원들이 들어왔다.

“아, 참 오늘이 임원회의가 있는 날이지.”

회사 제복을 입은 임원들이 다이어리를 옆에 끼고 들어왔다. 나이 많은 공장장과 연구소장이 빠지고 새로 온 임원이 들어오니 칼라가 달라졌다. 구성원이 젊어진 것이다.

영업담당 김동찬 전무이사, 건설담당 윤희병 상무이사, 총무담당 최준영 이사, 신임 연구소장 오준수, 그리고 전에 관리인으로 있던 상임감사 고희석 등이었다. 생산담당 박종석 이사가 미국 출장 중이므로 5명이 들어왔다.

“업무보고는 영업부터 시작하고 관리부서는 나중에 하십시오.”

구건호의 주문에 따라 영업담당 전무이사부터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H모비스에 납품하는 티캡(T-Cap)은 원재료를 다시 성일 폴리머로 하였으며 지난주 5만개를 납품했습니다. 납품 금액은.......”

구건호가 따분한지 시계를 보는 모습을 보이자 전무이사의 보고 속도가 빨라졌다. 이어서 건설담당 상무의 보고와 연구소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보고 받는 데만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중요한 보고는 구건호가 멘트를 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생산부는 공장장도 자문역으로 되셨고 생산부 박종석 이사가 미국 연수중이니까 다른 부서의 임원들이 자주 생산현장을 둘러보세요.”

“알겠습니다.”

“나도 생산 쪽에서 견습공으로도 일해 봤는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래도 느슨해집니다.”

“박이사가 돌아올 때까지 저희 임원들이 순번을 정해서 돌겠습니다.”

임원회의가 끝나면 각 부서의 결재 서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구건호는 어느 땐 대충 제목만 보고 싸인을 할 때도 많았다.

구건호가 대충 결재서류를 처리하면 오전 10시가 넘는다. 이때부터 구건호는 경제신문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하였다. 스마트 폰에서 오늘의 뉴스를 보고 있는데 동경에서 전화가 왔다. 아까사카의 한식당 사장 최지연이었다.

“구사장님? 목소리 듣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요. 동경 나들이는 통 안하시는 모양이네요.”

“요즘 공장일이 바쁘네요. 한번 가야할 텐데.”

“바쁜 건 알아요. 여기서도 한국 경제신문은 보니까요. 구사장님이 미국 디욘사와 합자사를 하기로 한 것과 강남의 리버스타 빌딩을 인수한 기사도 잘 보았어요.”

“그랬군요.”

“하지만 모리에이꼬를 잘 봐주셔야지요. 그렇게 소식 없이 지내면 어떡해요?”

“하하, 한번 시간 내서 가지요.”

“오늘 아침에 신쥬꾸 요정의 마마상 세가와 준꼬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무슨 전화인데요?”

“모리 에이꼬가 입원했데요.”

“예? 입원요? 왜요?”

“신장 결석인가 뭔가 나는 들었어도 잊었네요. 올수 없으면 전화라도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당장 달려가지요. 고맙습니다. 연락 주셔서.”

구건호는 비서 박희정씨를 불렀다.

“일본 동경 가는 항공권 한 장 예매하세요. 내일 출발하는 걸로 하세요. 일본은 비자는 필요없으니 그냥 예약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아카사카의 뉴오타니 호텔에 들려 방을 잡았다. 우선은 짐이 있어 불편하여 호텔 객실부터 잡은 것이다. 면세점에서 산 화장품을 들고 아카사카의 한식당을 찾았으나 최지연 사장은 가게에 나오지 않았다. 종업원에게 선물만 맡기고 전화만 했다.

“최사장님? 아카사카의 식당에 들렸더니 최사장님이 안계시네요. 모리 에이꼬가 입원한 병원이 어디지요?”

“호호호, 애인이 아프다고 하니까 빨리도 오셨네. 전화 끊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최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경여자대학 병원 1206호실이에요. 검사 끝나고 오늘 수술 들어간 데요.”

“동경여자대학 병원이 어디에 있지요?”

“신쥬쿠 가와타죠(河田町)에 있어요. 택시타시면 기사들 다 알아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구건호가 병실에 들어섰다.

환자복을 입은 모리에이꼬가 침대에서 반쯤 일어나 만화책을 보고 있었고 옆의 의자에 마마상 세가와 준꼬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모리 에이꼬!”

“어머! 오빠!”

마마상도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오셨어요?”

“오빠 나, 밉지? 세수 안했는데.”

“아니, 이뻐.”

옆에서 마마상이 말했다

“수술은 오후 3시에 한답니다. 담당 의사가 외래진료가 끝나면 한답니다.”

“병명이 뭐지요?”

마마상이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구건호가 못 알아들은 표정을 짓자 마마상은 에이꼬가 보던 만화책 위에 신장결석(腎臟結石)이라고 한자로 썼다.

“오, 신장결석!”

구건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건호가 병실을 둘러보았다. 3등실이라 그런지 여러 사람이 같이 들어와 있었고 어수선한 기분이 들었다.

“여긴 어수선하니 에이꼬를 1등실로 옮겨주세요.”

마마상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상이 돌아가고 구건호와 에이꼬만 남았다. 구건호가 에이꼬의 작은 손을 잡았다.

“힘내.”

“응.”

“신장결석은 돌만 꺼내면 돼.”

에이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와 간병인들이 자꾸 쳐다보아 구건호는 커텐을 쳤다. 모리 에이꼬가 화보집을 하나 주었다.

구건호가 화보집을 펼쳤다. 에이꼬가 기모노 복장을 하고 찍은 사진들이었다. 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고 대나무 숲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우산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교또의 아라시야마에서 찍은 사진이야. 공원 홍보 화보집이야.”

“그래? 예쁘게 나왔구나.”

구건호는 화보집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점심 식사 후 에이꼬는 잠이 들었다. 구건호는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와 거리를 걸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겟케이사(月桂寺) 절 구경을 하고 수술시간 임박해서 다시 병원으로 왔다. 에이꼬는 아직도 잠이 들어 있었다.

수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취 후 복강경 수술이라 통증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수술했다. 수술이 끝나자 간호사들은 바로 환자가 누운 침대를 일등실로 끌고 갔다. 구건호는 잠든 에이꼬의 모습을 보다가 자기도 간병인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에이꼬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의 에이꼬가 잠든 모습은 동화 속의 백설공주가 잠든 것 같았다. 구건호는 에이꼬의 작은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대었다.

“똑, 똑.”

노크 소리에 구건호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식사 나왔어요.”

에이꼬가 사람 소리에 눈을 떴다. 병실에서 나온 음식은 맑은 죽이었다.

“아프지 않아?”

“괜찮아.”

“죽 먹자. 먹어야 기운 차린다.”

구건호가 죽을 떠서 에이꼬의 입에 넣어 주었다. 에이꼬는 작은 입을 벌리고 제비 새끼처럼 구건호가 떠주는 죽을 잘도 받아먹었다.

구건호가 아까사카의 뉴오따니 호텔에서 일어난 시간은 아침 9시가 넘어서였다.

“이크, 9시네. 어제 몇 시에 돌아왔지?”

구건호는 옷을 대충 입고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제 엄청 피곤했던 모양이네.”

구건호는 호텔 식당에서 흰죽과 과일만 먹고 식당을 나왔다.

호텔은 벌써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장을 입은 신사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로비의 계단 올라가는 곳에 회의장이라고 한문 붓글씨가 쓰여 있어 신사들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쓰루(鶴)? 회의실 이름인 것 같은데?”

쓰루(학)라는 문패가 걸린 회의장 문이 열려 안을 쳐다보았다. 안에 현수막이 보였다.

[201x년 00그룹 신임 임원 연수]

“흠, 여기서 대기업의 임원연수가 있는 모양이구나. 하긴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그룹 사장단 회의를 동경에서 자주 했었다고 했지?”

구건호는 자기 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멀리 일본 영빈관의 숲이 보였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해마다 연말이면 동경에 와서 새해 구상을 했다지? 사람들은 그걸 동경 구상이라고 불렀다는 신문기사를 어디서 본 것 같아.”

구건호는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지에이치 모빌, 지에이치 개발, 디욘코리아, 지에이치 미디어를 앞으로 어떻게 끌고 갈까?

디욘코리아는 공장이 완공되면 적어도 사원을 100명이나 뽑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이 많은 식구들을 어떻게 할까.... 지에이치 모빌도 매출이 늘어나면서 벌써 각 부서에서는 증원을 요청하고 있는데 말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회사들이 모두 획기적인 발명이나 개발품은 없다. 특허 하나 제대로 없는 회사들인데 앞으로 10년이나 20년 후에도 존속할 수 있을까?]

구건호는 뒷짐을 지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옛날 이병철씨가 동경 구상을 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구건호는 담배가 다 타는 줄도 모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무엇을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구건호의 동경 구상은 아무도 몰랐다.

구건호는 다시 동경여자대학이 있는 신쥬꾸의 가와타죠로 갔다. 병원의 일등실에는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에이꼬가 만화책을 보고 있었고 마마상 세가와 준꼬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오빠.”

“간호실에서 수술이 잘됐다는 소리를 듣고 왔다.”

마마상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사흘 후 식사 때 밥이 나오면 퇴원해도 된답니다.”

“그래요?”

구건호가 에이꼬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말했다.

“오빠는 이제 가봐야겠다. 회사 일이 많이 밀려 있다는 구나. 한가할 때 내가 다시 올게.”

에이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구건호가 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거 수술비에 보태 쓰세요.”

마마상이 봉투 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나! 이렇게 많이요?”

“에이꼬 퇴원하면 몸보신도 시켜 주세요.”

“그냥 가시게요? 에이꼬랑 뽀뽀라도 하고 가셔야지요. 손만 잡으면 어떡해요.”

구건호는 에이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구건호는 김포공항에서 돌아오면서 신사동 지에이치 빌딩으로 갔다. 구건호를 보고 경비원이 쫓아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다.

빌딩엔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빌딩에 입주자들이 타려고 하자 경비원이 사람들을 쫓아냈다.

“이 엘리베이터는 점검 중입니다. 다음번에 타세요.”

엘리베이터에 경비원과 구건호만 탔다.

“다음번엔 내가 오면 다른 사람 못 타게 하지 말아요. 저 분들 때문에 우리 회사가 유지 되는 거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구건호가 개발 사무실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몰려와 인사를 했다.

구건호는 비어있는 넓은 자기 방에 들어가 앉았다. 비서 오연수가 따라 들어왔다.

“따듯한 녹차 있으면 한잔 줘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디욘사에 전화해서 안젤리나 레인한테 우리 연수생들이 교육 잘 받고 있느냐고 물어보세요. 내가 묻더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다른데 있던 강이사가 헐레벌떡하고 뛰어왔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예, 일본에 갔다가 바로 이리로 온 겁니다. 별일 없지요?”

“예, 다른 일은 없습니다.”

강이사는 사장실을 나갔다가 서류들을 잔뜩 가지고 왔다.

“뭐요?”

“업무 서류들입니다.”

“내가 피곤하니 업무보고는 내일 받지요.”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자기의 동경 구상을 어떻게 실천 시킬까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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