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인사발령 (2)
(166)
지에이치 모빌의 인사발령장을 본 지에이치 미디어의 신정숙 사장이 전화를 했다.
“저희는 인사발령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미디어는 제가 관여 안합니다. 신 사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저희는 생긴 지가 얼마 안 되어 승진이나 전보 같은 인사발령은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물가 상승률과 임금 상승률에 따른 호봉 조정만 할까 합니다.”
“그것도 신사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저는 지에이치 미디어의 직원들에게 7%정도의 선에서 급여를 인상해 줄까 합니다. 다행히 일본 번역책 ‘아침에 기상하는 인간’이 스터디 셀러가 되어 판매 호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하, 그것도 신사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아마존 인기 ‘만화 세계역사’시리즈는 30권 판권 계약을 했습니다. 투자액이 많아 출판계에서 놀라는데 저는 성공을 확신합니다. 이미 1, 2권은 번역에 들어갔습니다.”
“흠, 그래요?”
“그리고 이번 달부터 사장님은 미디어의 이사로 올려 급여가 나갔습니다. 확인해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랬어요? 나중에 확인해 보지요.”
“저희가 직원들 급여 7% 인상하면 사장님 급여도 7% 올라가네요. 호호.”
“하하, 그런가요? 그럼 수고들 하세요.”
신사장의 전화가 끝나자 박종석 이사가 들어왔다.
“왜 왔어?”
“히히, 생각지도 못한 천만 원이 들어왔네.”
“이지노팩 회장이 주고 간 돈 말이냐?”
“15바늘 꿰매고 천만 원 받았으면 몇 번 더 맞고 싶어.”
“미친놈.”
“이거 절반 5백만 원이야. 형은 돈 못 받았지? 형 써.”
“진짜 미친놈이네. 돈 도로 주머니에 못 넣어?”
“형은 서울 가서 돈 많이 썼잖아. 임태영 그놈한테 비싼 술 사주고 용돈도 주었잖아.”
“애들 술 좀 사준 것 가지고 뭘 그래? 천만 원은 당당히 네 돈이다. 그 돈으로 몸보신도 하고 미국 갈 때 비상금으로 써라.”
구건호는 아산에 있는 디욘코리아 신축공장 현장을 가 보았다. 전에는 아산에서 직산공장 신축 현장을 보러 다녔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직산에서 아산으로 가게 되었다.
직산 건설 현장에는 김동찬 전무가 와 있었다. 김동찬 전무는 영업상무를 하다가 이번에 전무로 승진하면서 디욘코리아로 전보 발령을 받은 사람이었다.
“사장님 나오셨습니까?”
“이쪽으로 발령받아 이젠 이쪽 일이 궁금한 모양이네요.”
“이제 관심을 가져야지요.”
“디욘코리아도 중요하지만 아직은 지에이치 모빌 일도 중요하지 않아요? 거기에 있던 영업부장이 이번 인사에 불만을 품고 사직했다면서요?”
“그 친구 딴 데 가도 일 잘 못합니다.”
“새로 영업부로 발령 난 서창훈 차장은 일 잘 합니까?”
서창훈 차장은 총무과장을 하다가 승진되어 영업부로 전보 발령을 받은 사람이었다.
“잘합니다. 원래 그 친구는 총무가 안 어울립니다. 진작 영업 쪽으로 왔어야 했습니다. 얼굴도 미남이고 화술도 좋아 거래처에서 인기입니다. 본인도 영업에 적성이 맞는다고 합니다.”
“허, 그래요?”
“참, 전에 지시한 S기업 부사장님은 만나 뵈었습니다. 점심도 같이 한번 했습니다.”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분당에 사십니다. 그런데 용인 수지로 이사한다고 합니다. 집을 그쪽에 새로 산 모양입니다.”
“그래요?”
“막내아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는데 그쪽이 학군이 좋다고 하네요.”
“학군?”
구건호는 쓴 웃음을 지었다. 부모가 저렇게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 적어도 인서울 대학은 갈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건호는 고등학교 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낡은 운동화가 창피해 변두리 학교조차도 가기 싫어했던 자기 아니었던가?
이지노팩 회장 아들 김동환이를 생각해 보았다. 구건호가 보기에 영 시원찮은 인물이지만 명문 USC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이지노팩 미국 자회사의 대표이사가 아닌가? 이지노팩 회장 딸은 또 어떤가? 지금 수원에 있는 대학의 교수 아닌가? 이지노팩 회장 딸이 강남 대치동에서 고액 과외를 받을 때 구건호는 낡은 운동화가 싫어 밤새워 편의점 알바를 하지 않았던가? 출발부터가 다르면 살면서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구건호는 옛날 같으면 하늘같았던 이지노팩 회장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있다. 돈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무얼 그리 생각하십니까?‘
김동찬 전무의 말에 구건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 아닙니다.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저는 거래처 갈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S기업 부사장님 핸드폰 전화번호는 옛날 그대로지요?”
“예, 안 바뀌었습니다.”
미국에 연수를 받으러 갈 세 사람이 총무이사와 함께 사장실에 인사를 하러 왔다. 세 사람의 얼굴은 상기된 얼굴이었다.
연구소장이 추천한 두 사람은 책임연구원과 선임연구원이었다. 한사람은 차장급이고 한 사람은 대리급이었다. “미국 디욘사에서는 회사 내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을 선발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연구소장님을 비롯한 여러 임원들이 추천하여 선발된 분들입니다.”
구건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세 사람은 구건호의 입만 쳐다보았다. 구건호는 총무이사가 준 선발 연수자 인적사항을 보았다. 박종석 이사가 33세인데 책임 연구원은 박종석 이사보다 5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선임 연구원은 박종석보다 한 살 아래였다. 현장 기술은 박종석이 한수 위였으나 이론이나 스펙에 있어서는 박종석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디욘사는 세계적 기업입니다. 아무쪼록 글로벌 기업의 선진 기술을 잘 배워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명단을 보니까 특히 선임연구원은 미국 교환학생 출신에 토익도 900점이 넘어가네? 영어도 잘 할 테니 책임연구원과 생산이사를 잘 안내해 주면 되겠네요.”
젊은 선임연구원이 쑥스러운지 자기 코를 만졌다.
“자, 준비할 것도 많을 테니 그만 나가봐요. 아, 그리고 총무 최이사님은 이 사람들 출장비는 미리 챙겨 주는 거지요?”
“예, 업무가불 후에 나중에 정산하기로 했습니다.”
“통역은 디욘사에서 구해 준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업무 연락은 서울 디에이치 개발의 비서 오연수씨와 디욘사의 해외담당 안젤리나 레인이 수시로 통화한다고 하니 필요한 것 있으면 최이사님이 오연수씨와 통화하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러왔던 세 사람은 구건호에게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고 나갔다.
구건호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차장급인 책임연구원 나이가 38세, 대리급인 선임연구원 나이가 32세, 박종석 이사의 나이가 33세, 나이는 다 고만 고만 한데 박종석이 대학도 안 나왔는데 이사 직급을 달아서 시샘이나 안할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구건호의 쓸데없는 기우였다. 미국을 가게 된 연구원들은 회사의 실세인 박종석 이사와 함께 가게 된 것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장님과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가깝다고 소문난 박종석 이사다. 박이사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다. 미국에 가서 박이사와 함께하는 자리를 되도록 많이 만들자.]
돈과 권력 앞에선 역시 인간은 약해지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 박종석 이사가 어리다고 뒤에선 깔보아도 앞에서는 길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영업담당 김 전무가 구건호의 방에 들어왔다.
“성일 폴리머 사장이 왔는데요? 만나보시겠습니까?”
“성일 폴리머? 전에 소송 걸었던 사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하네요.”
“마음이 변했나? 들어오라고 하세요.”
똥똥한 성일 폴리머 사장이 들어왔다.
“사장님, 잘 못했습니다.”
성일 폴리머 사장은 들어오자마자 구건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구건호가 놀랐다. 50대가 30대 중반의 구건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할 말 있으시면 이리 앉으세요.”
김전무가 성일 폴리머 사장을 일으켜 세웠다. 구건호가 웃으며 말했다.
“성일 폴리머는 지에이치 모빌의 채권자입니다. 채무자에게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소송은 취하했습니다. 이지노팩 회장의 말에 제가 잠시 눈에 뭐가 씌운 모양입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지노팩과 무슨 거래가 있었습니까?”
“자기들 구매량을 배로 늘려줄 테니 지에이치 모빌의 잔존 채무가 있으면 소송하라고 했었습니다. 최근에 자금도 궁하고 하길래 지에이치에서 돈도 일시불로 받고 이지노팩 거래량도 배로 늘면 수지맞는 장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송했군요. 분할 상환한다는 우리의 각서까지 받으신 분이 말입니다.”
“실은 구사장님이 강남의 리버스타 빌딩을 인수하는 것 보고 돈이 없어서 못주는 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지노팩도 물건 가지고 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이 있었군요.”
“더군다난 이지노팩 회장은 요즘 지에이치 모빌과 잘 지내고 있으니 다툴 필요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사장님, 사장님은 저보다 연배가 훨씬 더 되신 분인데 그렇게 얄팍한 행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거래는 옛날로 되돌려 주겠지만 서로 상처만 남은 상태 아닙니까?”
“제가 부족했습니다. 사장님은 역시 거인입니다.”
성일 폴리머 사장은 눈물까지 보였다. 구건호는 최전무를 돌아다보았다.
“전무님이 성일 폴리머 사장님을 모시고 나가십시오. 따듯한 차라도 한잔 대접해 드리세요.”
“알겠습니다.”
최전무가 비실거리는 성일 폴리머 사장의 팔을 잡고 구건호의 방을 나갔다.
구건호는 자기 방에서 녹차를 마시다가 집에서 쉬고 있다는 S기업 부사장이 생각났다.
전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약간 졸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지에이치 모빌의 구건호입니다.”
“오, 구사장, 반갑소. 전화도 해 주시고.”
“잘 지내시지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아직 아이 볼 나이는 안 되었고... 노는 것도 지겨워 헤드헌팅 회사에 등록이나 해 볼까 생각중이요. S기업 협력회사에선 몇 군데 오라는 데가 있는데 거긴 가고 싶지 않네요.”
“부사장님은 경력이 화려하시니 헤드헌팅 회사에 등록하시면 여기저기서 모셔갈 겁니다.”
“에이, 나이가 많은데 그러겠소? 내 나이가 56세인데.”
“집을 용인 수지로 옮기셨다면서요?”
“이사한지 삼일 되었어요. 이제 겨우 짐정리가 끝났네.”
“짐이 많은 모양이네요.”
“버릴 건 다 버리고 왔어도 물건이 풀어놓으니 많네요. 60평짜리 아파트라 짐 들어오기 전엔 넓다고 생각했는데 짐 들어오니 그것도 아니네요.”
“용인 수지에서 이곳 직산까지는 고속도로로 30분이면 올수 있는 거리네요. 이사도 다 하셨다니 만나서 점심이라도 같이 하시지요. 내일 어떻겠습니까? 여기 새로 개발해 놓은 음식점이 있습니다. 골프치고 나온 사람들이 자주 오는 곳입니다.”
“내일이라... 나야 괜찮지만 구사장은 바쁠 텐데.”
“저도 괜찮습니다. 오셔서 새로 지은 저희 직산 공장도 구경하시고요.”
“좋습니다. 그럼 내일 12시까지 내려가지요.”
“하하, 기다리겠습니다.”
구건호는 퇴근후 집에서 가까운 천안아산 KTX역 앞에 있는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박종석에게서 전화 왔다.
“형? 나야. 시애틀 타코마 공항이야.”
“통역은 만났니?”
“만났어. 지금 같이 시내로 이동 중이야.”
“잘 배워라.”
“형 덕분에 미국도 와보고 나, 출세했어.”
“촐랑대지 말고 잘 배우고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