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지에이치 개발 신규 채용 (2)
(159)
지에이치 미디어의 신정숙 사장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새로 발간할 5권의 책에 대한 제목과 저자 및 페이지 수 등이 기재된 내용이었다. 번역은 양이 많아서 두 사람이 나누어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메일 말미에 이런 글이 있었다.
[미국 아마존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만화 세계역사> 시리즈가 있습니다. 30권까지 있는데 한국에서 출판하고 싶어 조심스럽게 구사장님께 연락드려 봅니다.
당초에 투자하신 자본금 3억원은 이미 출판한 5권과 앞으로 출간할 5권의 출간비용 및 운영자금으로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새로 발간할 <만화 세계역사>시리즈는 3도 이상 칼라에 30권이나 되어 부득이 추가로 3억을 투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시리즈 물은 안 해도 되지만 욕심이 나서 부탁드려 봅니다.
다른 출판사가 하기 전에 했으면 합니다. 이 책은 만화이기 때문에 실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공을 확신합니다.- (주) 지에이치 미디어 사장 신정숙 올림 - ]
구건호는 답장 메일을 보냈다.
[요청하신 3억원은 보내 드리겠습니다. 단, 증자는 하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나를 출판사의 이사로 근무하는 것으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급여는 신사장님과 편집주간님 사이로 책정하십시오. 4대 보험 신고가 접수되면 돈은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낸 돈은 지에이치 미디어의 이사 구건호의 가수금으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구건호는 3개 회사로부터 급여가 나왔다. 지에이치 미디어에서 3백만원, 지에이치 개발에서 1,500만원, 지에이치 모빌에서 1,500만원 등 3,300만원이 나왔다. 종합 소득세 대상자이기는 하지만 급여 외에 회사가 잘되면 100% 대주주이므로 100%의 배당을 챙기게 되었다.
구건호가 신정숙 사장에게 3억원을 보내주어 신사장은 미국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 이 소식이 출판계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수근 거렸다.
“신정숙 사장의 뒤에는 큰 기업이 있다고 하네.“
“신정숙 사장과 경쟁하면 안 돼. 우선 자금력에서 우리가 이길 수 없어.”
“언제 또 그런 기업을 잡았지?”
“그래서 출판계의 마이더스 손이라고 하잖아.”
미국 건축설계사 사무소에서 설계도면이 왔다. 조감도의 사진도 함께 보내왔다. 구건호는 설계도면은 잘 모르겠지만 조감도가 근사해 보였다.
“윤 이사님 이것 선명하게 복사 할 수 있지요?”
“할 수 있습니다.”
“이걸 미국 라이먼델 디욘사의 부사장 브렌든 버크씨에게 보내 주세요.”
“이 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하나 쓰도록 하세요. 지난번에 여기에 와서 영어 통역하던 사람 있지요?”
“아, 대기업 지사장을 지냈다는 이선생이란 분 말입니까?”
“그 사람에게 연락해서 브랜든 버크씨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세요. 조감도와 설계 도면을 보내니 빨리 공사를 시작하도록 본 계약을 체결하자는 내용으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즉시 연락하겠습니다.”
건설담당 윤이사는 설계도면과 조감도, 영문편지 등을 시애틀 디욘사에 있는 브랜든 버크 부사장에게 EMS로 보냈다.
지에이치 개발의 강성일 부장이 경리 세 사람과 비서 세 사람을 뽑았으니 최종 면접을 보아달라고 연락이 왔다.
“사장님 최종 면접 일을 다음 주 화요일로 잡으면 되겠습니까?”“화요일은 S기업에서 협력사 사장단 간담회가 있습니다. 수요일로 잡으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요일 오전 11시로 잡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S기업 본사가 있는 서울 삼성동에서 협력사 사장단 간담회가 열렸다. 사장단들은 1차 벤더 회사가 많아 사장들은 거물급들이 많았다.. 구건호도 이들 틈에 끼어 앉았다. 사장단 회의가 끝날 무렵 누군가 와서 진행을 맡고 있던 S기업 사장에게 속삭였다.
“뭐? 회장님이 오셨다고?”
S기업 사장이 20명 가량의 협력사 사장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회장님께서 직접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회장님 들어오시면 환영의 뜻에서 기립하여 박수를 쳐 주시기 바랍니다.”
S기업 회장은 S그룹 회장으로 재벌이다. 구건호가 처음으로 재벌 회장과 상면하는 자리였다.
“회장님 오십니다.”
비서인 듯한 사람이 들어와 큰 소리로 말했고 S기업 사장이 자리에서 황망히 일어났다. 모였던 20명의 협력사 사장들도 일어났다.
회장이 들어왔다. 회장은 70대로 보였다. 가끔 언론에도 사진이 많이 나와 젊게 보았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검버섯이 많이 난 70대였다.
“반갑습니다. 사실상 S기업은 여러분들이 없으면 그 날로 문 닫습니다. 안 그래요? 사장!”
회장은 S기업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이 얼른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물건만 잘 만들면 됩니다. 미국이나 일본에도 뒤지지 않는 물건을 잘 만들면 됩니다. 일본 말에도 그런 속담이 있잖아요. 잇쇼겐메이(一 生懸命)한다고 말입니다.”
구건호는 깜짝 놀랐다. 회장이 하고 있는 말은 바로 일본인 기술자 사카다 이쿠조씨가 강조했던 말 아닌가.
[사카다 이쿠조씨는 제품을 맛본다고 프라스틱 조각을 입에 넣고 씹었던 사람이지. 카본과 유황이 들은 프라스틱 조각을 말이야.]
회장은 무엇이 좋은지 벙긋거리며 말했다.
“잇쇼겐메이가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구건호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목숨을 건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요. 가만있자. 지금 대답하신 분은 상당히 젊어 보이는데 어디서 왔습니까?”
“지에에치 모빌입니다.”
“옳지, 그래. 지에이치 사장이 말한 것과 같이 목숨을 걸고 제품 기술개발에 힘써 달란 뜻입니다. 아마 지에이치 사장은 좋은 제품 만들어 낼 것입니다.”
회장은 몇몇 사장들로부터 애로 사항을 청취하기도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수는 없지. 점심 먹고 갑시다.”
회장이 협력사 사장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삼계탕 집으로 갔다.
뚱뚱한 회장은 식성이 좋았다. 70대의 나이에도 삼계탕을 뼈까지 씹어가며 오도독거리며 먹었다. 회장은 협력사 사장들에게 술도 한잔씩 따라 주었다. 술은 소주였다. 한국의 5대 재벌 안에 드는 S그룹 회장은 의외로 소탈했다. 회장은 평소에는 짜장면을 잘 먹고 특식으로 가끔 삼계탕도 잘 먹는다고 했다.
“역시 거물이구나.”
회장은 구건호가 자기 말에 대답을 해준 사람으로 기억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까 회사 이름이 지에이치 뭐라고 했지요?”
“지에이치 모빌입니다.”
“젊은 사장이라 한창 일을 하겠군. 자, 한잔 받아요.”
“감사합니다.”
구건호가 엉거주춤하며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옆에 병을 들고 따라 다니는 S기업 사장이 회장에게 말했다.
“전에 물파산업이란 회사를 인수한 사람입니다. 최근에 우리 신제품도 개발했습니다.”
“오, 그래요?”
회장은 두툼한 손으로 구건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구건호가 S그룹 회장을 만나고 도곡동 타워팰리스로 돌아왔다. 내일은 면접이 있는 날이라 천안 직산으로 가지 않고 도곡동 집을 들린 것이다. 과일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는데 웬 낯모르는 전화가 왔다.
“광고 전화인가?”
“여보세요?”
“저, 구건호 사장님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어디시죠?”
“저, BM엔터테인먼트의 기획이사입니다.”
“BM엔터테인먼트?”
“전에 상해에서 뵈었지요. 상해시의 문화 예술 담당 국장실에서요.”
“아, 아. 기억이 날것도 같네요.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한 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전에 받은 명함을 보니까 회사 주소가 천안시 직산읍으로 되어 있던데...”
“무슨 일인지 그냥 전화로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일 강남구 신사동으로 와요. 내일은 서울에 있으니까요.”
“신사동이요? 신사동 어디쯤입니까?”
“가로수길 초입에 있는 지에이치 빌딩 19층 지에이치 개발로 와요.”
“지에이치 빌딩요? 아, 알겠습니다.”
구건호가 신사동 지에이치 빌딩으로 출근을 했다. 사장이 온다고 급하게 청소를 했는지 사장실 쇼파에 물기가 있어 보였다.
제복 입은 경비원이 뛰어나와 구건호에게 거수 경례를 붙이고 엘리베이터를 잡아주었다. 사무실에는 강성일 부장 외에 제복을 입은 정수남 반장까지 올라와 있었다.
“정반장 까지 올라오셨네?”
“사장님 오신다고 하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구건호는 강부장에게 간략한 업무 보고를 받았다.
“”오늘 면접은 오전 11시라고 그랬지요?“
“그렇습니다.”
“경리직 응시자 세명, 비서직 세명인 가요?”
“그렇습니다.”
“오늘 면접 본 사람들에게는 모두 교통비를 지급해 주세요. 봉투에 5만원씩 넣어서 주세요.”
“알겠습니다.”
구건호가 사장실에 혼자 앉아 최종 면접 대상자들의 지원 서류를 보았다. 모두 스펙이 어마어마하였다.
“내가 사장이 안 되고 시험 보러 다녔다면 이들에게는 게임도 안 되었겠구나.”
구건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건호가 경리직 세 사람의 서류를 보았다. 전산회계 1급은 물론 각종 금융관련 자격증도 많았다. 한 사람은 세무사 자격증까지 있었다. 외국계 금융사에 근무하여 어학 실력이 유창한 사람도 있었다.
구건호는 또 비서직 세 사람의 서류를 보았다. 세 사람 모두 토익 점수가 950점이 넘었다. 사진으로 보아서는 인물들도 출중해 보였다. 외국대학을 나온 사람도 있었다.
“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 같은데 누굴 뽑나?”
구건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비서직은 한사람 뽑는데 750명이 지원했다니 합격하면 750대 1인가? 영화배우 지원하는 것 보다 더 어렵네. 대한민국이 이렇게 취업난인가?”
구건호는 자기 책상 의자에 길게 누었다.
“탈락된 응시자 750명은 또 어딘가의 회사에 이력서를 넣겠지. 스펙들도 다 고만고만하고 말이야. 떨어졌을 때의 실망감, 그리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불안감 등에 고민하겠지. 이지노팩 회장 아들 같은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알까? 물파산업 오세영 회장의 아들도 이런 경험이 있을까?”
구건호는 창밖의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강남의 신사동 바닥에서 근무하는 델 지원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다 나은 사람들이지. 나는 지방 도시의 영세 공장이나 기웃거리며 면접을 보러 다니지 않았나. 고시원을 전전하면서 말이야.”
구건호는 지원서류들을 덮었다.
“정부는 젊은이들의 취업을 위해서 창업을 하라고 하기도 하지. 창업? 부모님 속을 썩어드리더라도 차라리 노는 게 났지. 창업하다 망해 신불자가 되면 그 주홍글씨가 오랫동안 남아 아무 일도 못하지. 특히 금융권의 푸대접은 이루 말할 수 없지. 문재식 같은 지성인이 신불자가 되었을 때는 동창회 명부나 사기나 치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이 이 사회야.”
구건호는 녹차를 한잔 마셨다.
“만약에 내가 와이에스 테크에서 잠간의 공금을 유용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내가 있었을까? 청담동 이회장님이 젊은 날 돈 놀이 할 때 채무자의 솥단지라도 악랄하게 뺏어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가 있었을까?”
구건호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모두 나 구건호나 청담동 이회장에게 돌을 던져라. 흙수저는 이 길밖에 없었다고 외치더라도 돌을 던져라.”
구건호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