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신축 공장 이전 (3)
(144)
선을 보고 우울한 감정으로 고속도로를 탔다. 차가 서해대교를 지날 무렵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때? 괜찮지? 신부될 사람이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똑똑해 보이더라.”
“나하곤 잘 안 맞는 것 같아.”
“난 좋던데.”
“그렇게 알고 전화 끊어.”
구건호는 누나가 뭐라고 말하는 순간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번엔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 본 것 어떻게 됐냐? 네 누나 말로는 똑똑해 보인다고 했는데.”
“예, 똑똑해 보여요. 하지만 나하곤 잘 안 맞았어요.”
“어지간하면 해라.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어디 있냐? 처음 선본 여자가 제일 좋다더라.”
“안 해요. 그렇게 알고 계세요.”
“이제 고만 부모 속 썩이지 말고 해라. 네 아빠하고 나는 교사 며느리 보나보다 하고 기대가 많았다.”
“사람하고 결혼하는 거지, 교사하고 결혼하나요?”
“기왕이면 다홍치마지.”
“안 해요. 그쪽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예요. 나 운전 중이니 전화 끊어요.”
“예야, 건호야.”
구건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구건호는 핸들을 잡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에이치 모빌이 신 공장 이전 후 생산직 모집 광고를 냈다.
워크넷에 복지와 급여수준, 등도 공개하자 많은 지원자가 몰렸다. 30명 충원에 600명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특히 지원자들은 용역회사가 아닌 제조 회사의 직접모집이라 많이 몰렸다.
총무부장이 지원현황을 구건호에게 보고했다.
“1차는 서류 심사를 저희들이 하고, 2차 면접은 임원들이 하고, 3차 면접을 사장님이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생산직 모집이니까 면접은 2차로 끝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면접 심사는 누구누구가 할 겁니까?”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감사님과 공장장님 등이 할 겁니다.”
“면접은 공장장과 감사, 그리고 총무부장과 생산부의 박종석 부장 등이 같이 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서류심사는 총무부장과 박종석 부장 둘이 보세요. 인사를 담당하는 총무와 직접 신입사원을 데리고 일을 할 생산부장이 하는 것이 좋겠지요.”
“알겠습니다.”
총무부장이 결재판을 들고 나가는데 구건호가 다시 불렀다.
“우리 회사제복은 동복을 다시 주문해야지요?”
“네, 그렇습니다. 2년마다 한 번씩 지급하는데 올해 지급해야 합니다.”
“디자인이 너무 우중충하고 촌스러워요. 물파산업에서 디자인한 것을 이름만 바꿔서 사용하는데 바꾸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디자인 회사를 수배해 보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지에이치 미디어의 디자인팀장에게 물어보세요. 전화번호는 여기 있어요.”
“여기 전화해서 누굴 찾으면 되겠습니까?”
“오민숙 팀장을 찾으세요. 전에 여기서 경비하던 문재식씨도 거기서 근무해요.”
“아, 기억납니다. 지난번 준공식 때 오셨던 여자 분이 지에이치 미디어의 사장님이시지요?”
“맞아요.”
“여기 전화해서 바로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회사와 회사 간 거래니까 디자인 용역료는 세금계산서 발행해 달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총무부장이 나간 후 지에이치 미디어는 자기가 사장을 안 하기로 한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만있자. 만약에 합자사인 지에이치 케미칼이 설립되면 거기 사장도 나고 거기서 생산된 물건을 갖다가 신제품 만드는데 쓰는 지에이치 모빌 사장도 나네.”
계열사간 밀어주기가 확실히 표가 나는 일이었다.
“회사가 여러 개면 그런 문제가 있네. 안 되는 일이야 아니지만 모양이 안 좋군. 아직은 상장 회사도 아니니까 걱정할 것은 없지만 이 문제도 차츰 연구해 보자.”
구건호는 청담동 이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 준공식 때 오셔서 고마웠습니다.”
“고맙긴. 공장이 크게 잘 지어 좋아 보이더군.”
“따지고 보면 이회장님이 공돌이였던 저를 경리부터 배우라고 하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하, 내가 그랬었던가?”
“그래서 회장님을 한번 모시고 싶어졌습니다. 다음 주에 한남동 장마담이 있는 ‘솔’에서 자리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뭘,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아닙니다. 꼭 모시고 싶습니다. 친구 분인 강남 철학원 박도사님도 같이 모시고 싶습니다.”
“박도사? 그럼 이렇게 할까? 박도사가 강남 철학원을 그만두고 낙향을 한다니 송별회 겸해서 한번 할까?”
“박도사님이 돈도 많이 버시고 유명하신데 왜 그만 둔답니까?”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에 청학정사(靑鶴精舍)를 지어 놓고 음풍농월이나 하며 도사처럼 살고 싶다네.”
“하하, 멋진 분이시네요. 날짜만 잡아주시면 제가 예약을 해 놓겠습니다.”
“알겠네. 내가 박도사와 상의를 하지.”
라이먼델 디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락은 김앤정 로펌의 김영진 변호사를 통해서 왔다.
“구사장? 왔어, 왔어.”
“뭐가?”
리이먼델 디욘사로부터 팩스가 왔어.“
“이메일이 아니고 팩스야?”
“응, 팩스야. 원본은 (주)지에이치 모빌로 우편으로 보냈데.”
“그래? 무슨 내용으로 되어 있어?”
“내가 번역한 걸 한번 읽어볼게. 들어봐.”
[한국의 (주)지에이치 모빌의 합자사 설립 의견에 우리는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달 지에이치 모빌의 사장인 구건호 선생과 우리는 인터뷰를 가진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건호 선생의 합작 의지에 대하여 높이 평가를 합니다.
라이먼델 디욘사의 해외투자 심의위원회에서는 (주)지에이치 모빌의 사업계획서와 대표자의 인터뷰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심의위원회에 통과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따라서 다음 달 초에 라이먼델 디욘사의 실무진이 (주)지에이치 모빌을 방문하여 비즈니스 서베이를 할 예정입니다. 단장은 해외담당 부사장인 브렌든 버크씨가 될 예정입니다.]
김변호사가 읽는 내용을 다 듣고 나서 구건호는 반색을 하였다.
“브렌든 버크씨가 오네?”
“잘 됐지. 우리가 아는 사람이 오니.”
“그 사람들 오면 김변호사가 좀 도와줘야겠다.”
“당연하지. 우리 로펌과 (주)지에이치 모빌이 계약을 맺었는데.”
다음날 정말 디욘사로부터 팩스 원본이 우송되어 왔다. 라이먼델 디욘사의 사장 서명이 선명하게 들어간 영문 서신이었다. 구건호는 총무과 직원을 불러 어제 김영진 변호사가 이야기 한 내용을 타이핑하게 하였다.
“워드로 타이핑한 것 열장만 프린트 하세요. 임원회의 때 나눠줘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임원회의가 열렸다.
이 날은 월간 손익보고가 있는 날이라 회의가 좀 길었다.
사장실에 있는 회의용 탁자의 정 중앙에 구건호가 앉아있고 좌측 의자에 은행지점장을 거쳐 은행 상무이사를 지낸 감사가 앉았다. 감사는 물파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법원에서 임명한 관리인으로 왔던 사람이었다. 그 옆에 새로 들어온 서울대 건축과 출신의 윤이사가 앉았다. 오른편 의자에는 독일 박사 출신의 연구소장이 앉았고 그 옆에 경기공전 출신의 공장장이 앉았다. 경기공전은 지금은 4년제가 되어 서울과학기술대로 부르고 있으며 서울 공릉동에 있는 학교다. 60대와 50대인 이들은 모두 30대 중반의 구건호의 입만 쳐다보았다.
“감사님 시작하시지요.”
“예, 그럼 지난달 손익보고를 하겠습니다. 매출액은 신제품 AM083 어셈블리 납품 횩과로 소폭 늘었습니다. 72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월간 100억 목표에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만 여기 계신 임원님들 이하 전 직원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 가까운 시일 안에 달성되리라 봅니다.”
“흠, 비용은 어떻습니까?”
“매출원가도 지지난달 보다는 약간 늘어났습니다. 신 공장 이전에 따른 이사비용 증가가 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관리비는 변동이 거의 없지만 제세공과금이 집중되어 원가가 늘어나 매출이익은 6억입니다.”
“6억이라.... 금융비용 빼면 남는 건 없겠군.”
“아직은 그렇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금융비용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연말 결산에는 소폭이나마 경상이익 증가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흠.”
구건호는 팔짱을 끼고 듣고 있다가 라이먼델 디욘사로부터 온 서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우리가 신제품에 들어가는 원재료를 생산하는 디욘아메리카 본사에서 온 서신입니다. 디욘아메리카의 상호는 정확히 라이먼델 디욘사입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내가 디욘사와 합작회사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디욘사에서 보낸 회신입니다. 실사단을 다음 달 초에 보내겠답니다.”
구건호는 총무과 직원이 복사한 유인물을 임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가 읽어 볼 테니 같이 보아주세요.”
구건호가 읽기를 마치자 임원들은 얕은 신움 소리를 냈다.
“흠, 합자사를.”
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원회의가 끝나자 총무부장이 들어왔다.
“저, 지에이치 미디어에서 제복 디자인 시안을 들고 오민숙 팀장이 여길 오겠답니다.”
“여기를요?”
“오전 12시 안으로 온다고 하는데 사장님 만나보시겠습니까?”
“오전엔 내가 어디 안가니 그러지요.”
“지에이치 미디어에서 디자인 비용을 안 받겠다고 해서 제가 그러면 사장님께 혼난다고 했습니다.”
“세금계산서 끊으라고 하세요.”
“그래서 세금계산서 끊으라고 우리 사업자 등록증을 보내주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오민숙 팀장은 직산 공장을 와 보고 크게 놀랐다. 구건호가 돈이 많은 사람인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큰 공장을 운영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아니 이런 공장을 구경하는 것조차 처음이었다.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큰 출판사가 부러웠는데 여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네.”
방문객 명찰을 단 오민숙 팀장이 요란한 소리가 나는 생산 공장 안을 기웃거리다가 어떤 반장에게 혼이 났다.
“아가씬 누구요? 그거 구경하는 거 아니요. 잘못하면 다쳐요!”
오민숙 팀장은 화들짝 놀라 2층 사무실로 갔다. 제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근무하는 것을 보고 부러웠다. 오피스텔 같이 작은 사무실에 있다가 이렇게 넓은 사무실을 보니 무슨 관공서에 들어온 기분도 났다.
직원들은 근무에 열중하느라 오민숙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저, 총무부장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직원들이 칸막이한 책상을 가리켰다.
총무부장은 열심히 컴퓨터를 보며 무언가 도표를 그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 오민숙 팀장님이시지요?”
총무부장은 금방 오민숙을 알아보았다.
오민숙이 가져온 시안을 꺼내 총무부장에게 설명을 하려고 했다.
“가만, 사장님 계시니까 거기서 같이 설명을 듣지요. 총무부장은 다이어리를 옆에 끼고 오민숙 팀장을 사장실로 안내했다. 마침 사장실엔 협력업체 사장이 왔다가 사장실을 막 나가던 참이었다. 총무부장이 먼저 사장실을 들어갔다.
“지에이치 디자인의 오민숙 팀장이 왔는데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오민숙은 30평도 넘어 보이는 사장실을 들어갔다. 구건호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책상이 아닌 회의용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었다.
“오, 오민숙 팀장님. 어서 와요.”
구건호가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오민숙은 구건호가 위대해 보였다. 이런 공장에 취업하기도 힘들 텐데 사장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강남역에서 본 그때의 구건호는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오민숙은 부끄러워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지에이치 미디어가 이런 큰 공장의 계열사라니 믿음직스러웠다.
오민숙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디자인 시안을 설명했다. 자기가 디자인 한 것을 여러 업체 사장들에게 설명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큰 회사에 들어와 설명을 해 보는 것이 처음이었고 구건호가 너무 큰 사람처럼 보여 떨렸다.
디자인 설명을 다 듣고 구건호가 빙그레 웃었다.
“좋네요. 디자인이 세련되고 산뜻하네요. 총무부장님은 어떠세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공장 분위기가 살아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대로 바꾸지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출판사 사정은 어떻습니까? 왕지엔 교수가 쓴 중국책은 언제 나오나요?”
“그 책은 번역이 끝나고 지금 문재식 주간님이 교정보고 있습니다. 교정과 편집 작업 끝나면 제가 디자인 할 겁니다.”
“그렇군요.”
“교정이나 편집, 디자인은 자체 인력으로 한다고 해서 신정숙 사장님도 좋아하십니다.”
“허허, 그래요? 지난번에 만든 일본책 자기계발서들은 잘 나가나요?”
“예, 초판 다 나가고 재판 찍는 중입니다. 언론에서도 좋게 기사를 다루어 주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민숙 팀장님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낼수야 있나요. 총무부장님이 맛있는 것 좀 사 주세요.”
“알겠습니다.”
총무부장이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