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31화 (131/501)

# 131

(주) 지에이치 케미칼 설립 (2)

(131)

연구소 직원들은 과장, 부장과 같은 직급은 없었다. 책임연구원, 선임연구원 등으로 불렀다. 일반 직종보다는 학력이 좋고 창의성이 있으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직원들이 간혹 있었다. 구건호 또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30대 후반과 40대들이었다. 구건호는 전 임원들도 모두 배석을 시켜 앞줄에 앉게 했다.

구건호가 앞에 나와 인사를 했다.

“바쁘신데 이렇게 모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경영 위기로 한때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 보다는 회사 전체의 문제라고 봅니다. 연구소 또한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구건호의 말에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연구소의 R&D비용은 한해 인건비를 포함하여 40억이 넘습니다. 전체 매출액의 5.7%를 차지합니다.”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많았던가?”

“인건비 포함이라고 하잖아?”

“그래도 많은데?”

구건호는 경리 출신이라 항상 숫자를 들이대는 버릇이 있었다.

“이 40억이 들어가는 것만큼 여러분들의 연구 성과에 해당하는 아웃풋이 그동안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마른 기침소리가 들렸다.

“우리 회사는 제가 들어온 이후로 임금채권과 일부 급한 상거래 채권을 상환했지만 아직도 금융권에 대한 차입금은 줄어들지 못해 부채비율이 높습니다. 따라서 연구소가 있는 제2공장 부지를 불가피 매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의 핸드폰이 갑자기 소리가 울리자 핸드폰 임자는 당황해 하며 황급히 껐다.

“지금 제 앞에 앉아 계신 연구소장님은 회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연구소 직원들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저에게 강조하셨습니다.”

구건호의 이 말에 연구소장이 엉덩이를 들썩했다. 구건호는 연구소장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이 자리에서 사장인 제가 단호히 말씀드립니다. 회사는 부지가 매각되었다 하더라도 인원 감축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안도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연구소를 이대로 끌고 갈수는 없습니다. 연구소의 업무는 외부 용역기관에 의뢰하고 여기 계신 분들은 부득이 기존 부서에 재배치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흠, 흠.”

마른기침 소리가 또 났다.

구건호의 말은 매끄러웠다. 돈이 없던 시절에는 항상 주눅이 들어 자기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도 조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강남 큰손으로 성장한 그는 꺼리 낄 것이 없었다. 그는 이런 기업 이외 현금만 2천억이 넘는 돈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이가 비록 30대 중반이지만 40대의 연구소 직원들이나 50대, 60대 임원들 앞에서도 꺼리 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구건호는 절대 교만하지 않았다. 자기가 어려웠던 시절이 있어서 남을 잘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알았다.

모인 사람들은 사장이 참 말을 잘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연구소 직원들은 연구심은 좋지만 남 앞에서의 말은 매끄럽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구건호의 말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역시 돈이 말을 한다는 서양 속담이 또 한 번 실감이 났다.

[Money talks everythlng.]

구건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일단은 연구소장님께 가고 싶은 희망 부서를 제출하여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구건호의 이 말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끝으로 질문을 받겠습니다.”

가운데서 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일반 부서로 가더라도 급여는 변동이 없지요?”

“없습니다.”

“사내 이동이라도 퇴직금은 발생하지 않지요?”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간 정산을 원하신다면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승진 같은 것은 차별이 없습니까?”

이 말에 사람들은 웃었다. 구건호도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웃어주었다.

“차별은 절대 없습니다. 오히려 연구소 직원들은 우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앞에 있던 연구소장이 벌떡 일어났다.

“사장님 말씀 잘 들었지요? 그렇게들 아시고 회사 방침에 따르도록 합시다.”

구건호도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인 사람들 앞에 구건호가 크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연구소 직원들도 앉은 채로 구건호에게 인사를 하였다.

구건호는 사장실에 혼자 앉아 자기의 개인통장을 인터넷으로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어? 어디서 3천만 원이 들어왔네!”

송금자는 문재식이었다.

“하, 이 친구! 개인부채 정리하라고 3천만 원 빌려준 걸 단숨에 갚았네. 공모전 상금 탄 모양이구나!”

구건호는 문재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그 3천만 원은 월급에서 떼기로 했는데 이번에 한꺼번에 갚았구나.”

“응, 돈 들어온 김에 갚았어. 그대로 놔두면 또 내가 슬금슬금 쓸 것 같아 네 돈부터 갚았어. 도와주어서 고마웠다.”

“또, 그 소리!”

“동창들한테 이번에 나온 동창회 명부는 전부 발송했어. 몇 놈한테 잘 받았다고 전화도 오고, 어떤 놈은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했어.”

“오, 그래? 잘됐구나. 명예 회복 했구나.”

“명예 회복 뿐이냐? 신용회복도 했지.”

“그런가? 하하.”

“사장님이라 여러사람 상대하느라 바쁠 텐데 전화 끊는다. 고맙다.”

구건호는 전화를 끊고 미소를 지었다.

“짜식! 신세지고는 못사는 놈이 어떻게 하다가 운세가 사나워 돈 떼먹은 놈이 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나? 다, 정직하고 남들 앞에서 사기 칠 줄 몰라서 그래. 소설만 쓰던 사람이 쯧쯧쯧.”

이 말을 하다가 구건호는 흠칫 놀랐다.

둔포에 있는 와이에스 테크의 공금 유용사건 이 생각났다. 이 사건은 구건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아킬레스의 건으로 남아있었다. 구건호는 박영식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접니다. 구건호입니다.”

“아이고, 아이고, 동상 아니신가? 우짠일이신가? 전화를 다 주고!”

박영식 사장은 급할 때 나오는 그의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형님 뵌 지도 오래네요. 오늘 점심 어때요? 약속 있습니까?”

“무슨 소리당가. 약속이 있더라도 동상이 만나자면 달려 가야제. 안 그렁가, 잉?”

“영인산 근방에 산채 음식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 거기서 오후 1시에 뵙죠. 가는 길은 문자 보내겠습니다.”

구건호는 영인산 산채 음식점으로 가는 길에 신제품 AM083 어셈블리 샘플 하나를 주머니에 슬쩍 넣었다.

“산채 음식점에는 손님이 한산했다. 등산객들 때문에 주말에만 장사가 잘 되는 집 같았다. 박영식 사장은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형님!”

“나도 방금 왔네. 상석에 앉으시게.”

“상석은 형님이 앉으셔야지요.”

“무슨 소리당가. 큰 회사 사장이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지.”

박영식 사장은 구건호의 팔을 당겨 자리에 앉혔다.

뚱뚱한 음식점 주인아줌마가 왔다.

“여기는 산채 정식 전문이에요. 특별 주문하시면 돼지고기 수육도 나옵니다. 명태조림도 나오고요.”

“그럼, 그걸로 주세요.”

구건호가 물을 마시며 박영식 사장에게 물었다.

“물파산업 오세영 회장님은 잘 계시지요?”

“잘 있다 뿐이당가? 자네 덕에 그 양반 신평이 펴져있네. 그 아들도 대기업 잘 다니고. 참, 그 아들은 중국 지사로 발령 났다고 하던데?”

“경력사원으로 들어갔으니까 지사장인가요?”

“에이, 아무리 경력사원이라도 그렇게 빨리 될 수 있당가? 지사장 밑에 있는 부책임자나 되겠지.”

“잘 되었네요.”

“들리는 소문에는 지에이치 모빌에서 신제품 개발한다고 했는데 진척은 있는가? 세계 최고의 일본인 기술자를 모셔왔다고 하던데 나도 궁금하네.”

“일단은 시제품 만들어서 대기업인 S기업에 갖다 주었습니다. 검사에 합격해서 그쪽에서 실사를 나온다고 했습니다.”

“오, 그런가? 동상이 잘되면 내가 잘 된 것 같아 반갑네.”

“어이쿠, 이거 돼지고기 수육 맛있네요. 동동주 한잔 하실래요?”

“나는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삘게 지는데 동상은 괜찮은가? 그럼 한잔씩만 하세.”

둘은 한잔씩만 마셨다.

“카, 좋다. 이런 산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동상과 함께 마시니 좋다.”

“형님이 운영하는 와이에스 테크는 요즘 어떻습니까?”

“우리? 동상이 도와준 덕에 우리도 쪼깐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네. 물파산업이 법정관리 들어가기 직전엔 회사 망하는 줄 알았네. 그때는 참 징했지. 동상은 내 은인이네.”

“별 말씀을.”

구건호는 밥을 먹다가 주머니에서 신제품 견본을 꺼냈다.

“한번 보십시오.”

“이게 뭐 당가?”

“이번에 일본 기술자가 만든 신제품입니다.”

“이게 정말 한 압출기에서 나온 건가. 야, 참 묘하네, 잉. 으짜면 요렇게 정교하게 만들었는가? 말랑한 부분, 딱딱한 부분, 투명한 부분, 사람 정말 죅이네.”

와이에스 테크의 박영식 사장은 신제품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문질러 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였다.

“저걸 그대로 납품하는 것은 아니고 손잡이 부분에 알미늄 링을 끼워야 합니다.”

“링?”

“일본인 기술자 말로는 링이 그대로 들어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화공 약품을 넣고 끼우는데 생각보다는 손이 많이 간다고 합니다.”

“흠.”

“우리도 바쁘고 할 일 들이 많아 이 작업을 외주 주려고 합니다.”

“외주?”

박영식 사장이 구건호 앞으로 바싹 다가와 앉았다.

“물량이 많은가?”

“꽤 됩니다.”

“날 주소. 해 보겠네. 우리 공장에 다이캐스팅 기계도 있네.”

“생각보다는 작업이 어렵다고 하니까 잘 연구해 보세요. 그래서 오늘 샘플하나를 가져온 것입니다. 도면도 이메일로 보내 드리지요.”

“고맙네. 동상. 이번 일만 잘 되면 내가 자네에게 빌린 돈 2억도 갚을 수 있을 거네.”

박영식 사장은 구건호가 준 샘플을 자기의 손수건으로 곱게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중국에서 왕지엔 교수가 오래간만에 연락을 해왔다.

“구건호? 넌 내가 전화 안한다고 너도 같이 전화 안 할 거냐?”

“어, 왕지엔. 오래간만이다.”

“회사는 잘 되지? 김영진 변호사 말로는 한국의 충남 아산이란 곳에 큰 회사를 인수했다며? 바쁘겠구나.”

“크긴, 중국에 큰 기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매출이 얼마인데?”

“한국 돈 700억이니까 7천만 달러 정도 돼.”

“야. 굉장하다. 7천만 달러면 중국에서 큰 회사다. 인민들 7천명은 고용할 수 있겠다.”

“여기선 그렇게 못해. 고작 250명이야.”

“한국이니까 그렇지, 중국 같으면 어림도 없다. 중국도 실업율이 높아져 농민공들 생활이 말이 아니야. 리스캉 부시장이나 나나 그래서 요즘 고민이 많다.”

“그런 건 정부에서 알아서 하는 것 아니야?”

“내가 시정부 고용 촉진 위원회 위원이거든. 너, 중국에 좀 투자해라.”

“하하, 그럴 여력 없어. 그리고 중국에 이미 강소성 소주에 부품공장 하잖아.”

“거긴 잘 돼?”

“그럭저럭 하고 있어. 손해는 안보는 모양이야. 지난번에 리스캉 부시장이 창호 회사를 소개해 주어 매출이 좀 늘었어.”

“그래? 그거 다행이구나. 그런데 이번에 리스캉이 상해시로 복귀할 것 같다.”

“복귀? 뭘로?”

“국장급으로 가는 모양이야.”

“부시장에서 국장이면 좌천인가?”

“아냐, 승진이야. 조그만 시골동네 부시장 하고 국제도시 상해의 국장하고는 격이 달라.”

“그럼, 이번에 뭘로 가나?”

“확실한건 모르지만 상해시 문화 광파영시(廣播影視) 관리국장으로 가게 될 것 같다고 그러네.”

“광파영시? 그게 뭐야?”

“신문사나 TV 같은 메스컴이나 음악, 미술, 연예 등을 총 관리하는 부서인 모양이야.”

“어, 그래?”

“아직은 몰라. 시 인사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하고 상부의 비준도 받아야 돼.”

“아무튼 잘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책 한권 냈다.”

“무슨 책인데?”

“경제학자가 경제관련 책이지 무슨 책이냐? ‘21세기 중국 경제의 동향’이라는 책이다. 앞으로는 중국과 미국의 무역전쟁에 대하여도 써볼까 한다.”

“네 책, 한국에서도 출판됐냐? 한번 사보게.”

“아직 안됐어. 책이 학술서적 비슷해서 누가 덤비는 놈이 없네.

“하하, 그래?”

“중국어로 된 책이지만 네 사무실로 한권 보내줄 테니 틈나는 대로 읽어봐라. 이건 교수가 학생한테 내리는 명령이다.”

“하하,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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