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디욘사의 세계적 기술자 (3)
(129)
구건호가 사장실에 앉아서 경제신문을 읽고 있는데 문재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웬 일이냐?”
“할 이야기가 있어."
"와서 이야기 하지 같은 회사 안에서 무슨 전화냐?“
“경비원이 사장실 들어가는 것이 남들 눈에 안 좋을 것 같아서 전화로 했어.”
“별걸 다 걱정한다. 그래 무슨 일인데?”
동창회 명부 원고 교정이 끝나고 편집도 다되었어. 표지 디자인도 마쳤고. 인쇄만 들어가면 돼.”
“그럼 됐지 뭐.”
“너한테 보여주고 인쇄 들어가려고.”
“하하, 안 봐도 된다. 그냥 인쇄 맡겨라. 나, 회사 일도 바쁘다.”
“출판 제작비는 잘 받았어. 정산 결과는 나중에 보고할게. 그리고 내 채무 정리하라고 보내준 3천만원도 잘 받았다. 내 빚은 싹 정리 했다.”
“잘했다.”
“내가 월급을 받으면 50만원을 지난번 가르쳐준 네 계좌로 매월 보낼게.”
“그렇게 해라.”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났으니까 이제 은행거래를 마음대로 해도 돼. 월급 압류 걱정도 없고.”
“그건 좋은데 월급에서 나에게 50만원 보내면 남는 것이 없겠구나.”
“회사 다니면서 교정일 일감 있나 찾아보려고 해. 회사 종업원이 사장님께 이런 소리하면 안 되지? 회사에 충실하지 않고 투잡 갖는다고 말이야.”
“하하, 업무에 지장 없으면 된다.”
“고마워 그럼, 동창회 명부는 인쇄 후에 제본 나오면 바로 보여줄게.”
“그렇게 해라.”
구건호는 문재식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했다.
“경비원으로 놔두기는 아까운 인물인데 그렇다고 회사형 인물은 아니라 문제군.”
구건호는 문재식을 키워줄 마땅한 직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구건호는 모리에이꼬의 잔금을 치루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니혼바시에 있는 아미엘 사무실을 들리지 않았다. 잔금을 치루고 맨션 열쇠를 받은 구건호는 등기부등본과 열쇠를 마마상 세가와준꼬에게 전했다.
“모리에이꼬가 지방 공연 끝내고 모레 올라옵니다. 새 맨션이니까 도배는 필요 없으니 간단한 가재도구는 제가 장만해 비치하겠습니다.”
“가구 비용을 드릴까요?”
마마상이 웃었다.
“거기까지 후견인에게 부탁할 수는 없지요. 가구 비용은 그동안 모리에이꼬가 적립한 돈이 있습니다. 요정에 나가면서 차곡차곡 모아둔 돈이 있습니다. 냉장고나 세탁기 등 가구를 살 정도는 됩니다.”
구건호는 뉴오따니 호텔에서 이틀을 더 묵었다. 구건호는 마침 지바현의 마쿠하라 멧세에서 열리는 자동차 부품 전시회에 참관을 하였다. 하루에 다 볼 수가 없어서 이틀에 걸쳐서 구경을 했다. 팜프렛을 챙기고 있는데 영문 메세지가 왔다.
「모리에이꼬입니다. 동경에 왔습니다. 오늘 오후 6시 시부야 다이칸야마에 있는 맨션으로 오세요.“」
구건호가 과일 바구니를 하나 사들고 다이칸야마의 맨션을 찾았다. 들어가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는 알고 있지만 구건호는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분홍색 앞치마를 입은 모리에이꼬가 뛰어 나왔다. 집안에서는 음식을 만드는지 음식 냄새가 났다.
“오빠!”
모리에이꼬는 언제 한국어를 배웠는지 오빠를 크게 불렀다. 모리에이꼬는 구건호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깡충 깡충 뛰면서 수없이 구건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야야, 이거 넥타이 좀 풀고 하자.”
구건호는 과일 바구니를 식탁에 내려놓고 모리에이꼬를 안아주었다.
구건호가 집안을 둘러보았다.
마마상 세가와준꼬는 안목이 있었다. 비싸지는 않지만 세련된 가구들을 가지런히 준비했다. 쇼파와 식탁, 침대 등은 아기자기해 보였다. 거실 벽에는 커다란 액자가 걸려있는데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화사하게 웃는 모리에이꼬의 모습이었다.
“이건 교또 마츠리에 나왔던 포스터 사진이구나!”
거실에서 모리에이꼬 포스터를 감상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모리에이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쇼구노 준비가 데기마시다 (저녁 식사준비 다 되었어요.).”
“저녁 식사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 같은데? 좋지, 좋아. 이이데스.”
구건호는 웃으며 식탁으로 왔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이 있었고 생선 한 토막, 김치와 김, 미소시루 일본 된장국 등이 차려져 있었다. 모리에이꼬가 준비한 모양이었다. 사케(술)도 있었다.
“도오저(어서 드세요).”
구건호는 행복했다. 모리에이꼬도 행복한지 자주 구건호를 쳐다보고 웃었다.
구건호와 모리에이꼬는 과일을 먹으며 거실에서 함께 TV를 보았다. 그리곤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가 동원된 여러 나라 말을 섞여가며 대화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구건호는 행복한 모습으로 잠이 든 모리에이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모리에이꼬가 잠시 눈을 떴다.
“이리 와.”
구건호가 모리에이꼬를 끌어당기자 모리에이꼬가 구건호의 품속을 파고 들어왔다.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아아, 한국에 가지 않고 이대로 여기서 살고 싶다.”
구건호는 소등을 하고 모리에이꼬를 더욱 힘껏 껴안았다.
구건호가 한국에 돌아오니 디욘사 최고 기술자였던 사카다 이쿠조씨는 2차 개발 실험을 하고 있었다. 목욕을 하고 면도를 하고 머리를 뒤로 묶은 그는 비장한 눈빛을 하고 압출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박종석은 이쿠조씨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였다.
“뭔 기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랄이야? 하여간 원숭이 쪽발이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
그러나 박종석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이쿠조씨의 눈빛이 너무도 비장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적은 저 압출기다. 미야모도 무사시가 검을 뽑을 땐 무아의 경지에 이르렀다. 나는 검을 뽑아 저 압출기를 공격한다.”
이쿠조씨가 서서히 일어났다. 앙다문 입과 날카로운 눈빛은 사무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압출기 실린더 온도와 스크류 회전을 점검하겠소. 압출 온도와 다이 팽창을 점검 하겠소. 박종석 부장은 호퍼 안에 있는 카본블랙과 가황촉진제를 다시 살펴보시오. 산화아연이 배합 표와 맞는지 살펴보고 오일 량을 체크하시오. 공격한다! 스위치를 넣는다.”
압출기가 굉음을 내면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압출 제품을 냉각시키기 위한 냉각수가 뿜어져 나왔다.“
“나온다!”
압출 신제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쿠조씨는 방금 냉각수에 들어갔다 나온 젤리형의 플라스틱 조각을 떼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아, 향긋해.”
이쿠조씨는 눈을 감은 채 플라스틱 조각을 계속 씹었다.
박종석이 불안한 눈빛으로 이쿠조씨를 바라보았다.
“저 양반이 저러다가 플라스틱 조각이 목구멍에 넘어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박종석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이쿠조씨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다.
“삼키지 않는다고 해도 저 씹고 있는 플라스틱 조각에서 오일 찌꺼기나 카본 같은 찌꺼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갈 텐데.”
박종석은 이쿠조씨가 무서워 보였다.
“일본 쪽발이들, 장인정신 하나 만큼은 높이 사줄만 하네.”
박종석은 최종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제품을 수거하여 경도측정과 인장강도 측정을 하였다.
이쿠조씨는 아직도 플라스틱 조각을 씹고 있었다.
“됐다. 적이 피를 흘리며 서서히 무너지는 것이 보인다.”
이쿠조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쿠조씨와 공장장, 박종석과 통역 등이 구건호 사장실로 신제품을 들고 왔다.
“한번 보십시오.”
구건호가 신제품을 살펴보았다. 전자제품과 자동차 부품에 들어가는 제품으로 이중 압출 형태의 제품이었다. 이중 압출이므로 한쪽은 단단하고 접힌 부분은 물렁했다. 투명도가 산뜻했다. 제품에는 방향제를 넣었는지 냄새도 좋았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걸 S기업에 들고 가서 거기의 테스트에도 합격해야 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구건호는 영업담당 김상무를 불렀다.
“상무님이 S기업에 다녀오십시오. 신제품 개발에 성공했다고 거기 부사장님을 만나고 오십시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S기업 연구소에는 수많은 박사급 연구원들이 있습니다. 실험 통과하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회사입니다. 일단은 시험성적서와 시제품 20개만 박스에 담아 가지고 가겠습니다. 혹시 기술적으로 제가 막힐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 박종석 부장과 함께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박종석 부장! 상무님 모시고 같이 갔다 와.”
“알겠습니다.”
박종석은 구건호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
구건호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데 S기업 부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구사장? 신제품 샘플은 잘 받았어요. 이거 정말 거기서 만든 것 맞아요?”
“예, 저희가 만들었습니다.”
“원재료는 어디 것을 쓴 거요?”
“디욘제펜입니다.”
“거기서 순순히 물건 줘요?“
“실험용이라 많은 양이 아니라서 몇 포대 공급받았습니다.”
“미국에서 만든 디욘아메리카 제품을 쓰면 좋은데 운송비가 많이 들어간단 말이요. 어쨌든 만들었으니 우리 연구소에서 실험 분석중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육안으로 봐서는 합격이지만 분석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요. 작은 회사에서 저걸 만들다니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구건호는 가슴이 뿌듯했다.
S기업은 국내의 유서 깊은 대기업이다. 한국에서 스카이 대학을 나와야 입사를 할 수 있고 인적성 검사를 통과해야 본 시험을 볼 수 있는 회사다. 연봉은 높지만 들어가기가 빡세기로 유명한 회사다.
구건호는 이런 회사의 박사급 연구원들이 달라붙어 만들지 못한 것을 자기네 회사에서 만들었다는데 한없는 자부심을 느꼈다.
퇴근시간 무렵 경비원 제복을 입은 문재식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문재식은 구건호에게 거수경례로 인사를 하였다. 구건호가 이런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옆구리에 끼고 온건 뭐냐?”
“동창회 명부가 나왔어.”
“그래?”
문재식은 250페이지 정도의 책자를 구건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구건호는 책의 냄새를 맡았다.
“금방 만든 책이라 냄새도 좋다.”
구건호가 책자를 열어보았다. 책자의 내용은 3부로 되어 있었다. 1부는 동창회 주소록이었다. 실제 사는 집 주소는 빼고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현재의 직장 등이었다. 2부는 회원 동정 란이었다. 구건호의 기사가 가장 눈에 띠었다.
[구건호 회원: 충남 아산의 주식회사 지에이치 모빌 인수. 회사 매출액 700억, 종업원 250명.아울러 구건호 회원은 김민혁 회원이 운영하고 있는 중국 강소성 유한회사에도 투자를 하였고 서울에 부동산 개발회사인 지에이치개발을 소유하고 있음. 이번에 동창회 명부 제작에 인쇄비 전액을 지원하기도 했음.]
원래의 원고는 제작비 전액이라고 했는데 구건호가 제작비 전액보다는 인쇄비 지원만 넣으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3부는 학교가 걸어온 길을 소개해 실었고 은사님들의 소식을 넣었다. 은사님들 중에는 작고한 분들도 많았다.
“고맙다. 구사장.”
“또 그 소릴!”
“이 책자 내일 전체 동창들한테 뿌릴 거다. 네 덕분에 이제 찬조금 5만원 떼어 먹었다는 소리는 듣지 않게 생겼다.”
동창회 명부가 배달되자 구건호가 다녔던 인천 학교의 동창들은 크게 놀랐다.
“와-, 구건호 대단하네. 엄청 큰 회사 사장인데? 종업원 250명이면 엄청 큰 회사 아냐?.”
“구건호? 헤어진 츄리닝이나 입고 다니던 놈이 어떻게 이렇게 출세했어? 로또에 당첨됐나?”
“로또에 10번을 당첨해도 그런 회사 인수 못하네.”
“참, 사람 팔자 알 수 없네.”
조원철이 회장으로 있는 동창모임 서향회 회원들도 놀랐다.
“구건호가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큰 회사를 인수한지는 몰랐네. 이제 우리하고는 게임이 안 된다.”
회원들은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