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18화 (118/501)

# 118

마마상 세가와준꼬(瀨川詢子) (3)

(118)

구건호는 뉴오따니 호텔 커피숍에 앉아 자꾸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그의 왼쪽 손에 차고 있는 오메가 손목시계가 더디 가는 것 같았다.

“약속시간 12시가 넘었는데 안 오네.”

구건호는 하염없이 앉아 모리에이꼬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역시 외국인이라 후견인으로는 부적합 했던 거야. 말도 안 통하는 내가 돈 좀 있다고 일본 제일의 게이샤 머리를 올려주겠다고 주책을 떨은 것부터가 잘못이지.”

구건호는 후회가 되었다.

구건호와 모리에이꼬의 만남을 성사시켜주려고 애썼던 요정 마마상 세가와 준꼬와 아카사카에 있는 한식당 여사장 최지연에게 미안한 감이 들었다.

“내가 졸부와 다른게 뭐가 있나? 내가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 시험공부 할 때나 공돌이 할 때 가장 증오스러웠던 사람들이 강남 졸부들 아니었나?”

구건호는 후회감만 들었다.

구건호가 호텔 커피숍 주변을 돌아보았다.

비즈니스맨 같은 양복 입은 사람들만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푸른색 실크 브라우스를 입은 대학생인 듯한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대학생이 호텔 커피숍을 드나들다니, 부자집 딸인 모양이군.”

대학생인 듯한 여자는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누구를 찾는지 두리번거렸다.

“엄청 예쁜 학생이군. 일본의 부잣집 딸이라 얼굴도 저렇게 예쁜 모양이야.”

여자는 구건호를 발견하자 웃으며 다가왔다.

“고고니 수왓데모 가마이마셍까(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구건호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가온 학생을 자세히 보았다.

“아! 모리에이꼬!”

기모노를 입은 모리에이꼬만 생각하다가 이렇게 청바지를 입고 생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모리에이꼬를 보니 전혀 알아보질 못했다.

“하잇!”

구건호가 손으로 앞의 의자에 앉으라는 동작을 취했다.

“오구레떼 수미마셍(늦어서 미안합니다).”

모리에이꼬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앉았다. 모리에이꼬가 구건호를 보고 살짝 미소를 띠었다.

“역시 아름다운 얼굴에 한없이 귀엽군.”

구건호는 앉은 자리에서 뚱뚱해진 자기의 모습을 싫어졌다. 찻잔을 들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배까지 조금 나와 있는 듯 했다.

‘20살짜리 어린 사람을 두고 35세의 내가 이거 무슨 짓을 하는 건가!“

구건호는 모리에이꼬에게 미안했다.

구건호는 모리에이꼬를 앞에 두고 필담을 하기 시작했다. 구건호는 중국어를 공부했었고 모리에이꼬는 일본 문화속에 자라 한자 실력이 좋았다. 둘은 한자를 매개로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점심 먹었어요?”

“마다(아직), 마다데스(아직요).”

이번에는 모리에이꼬가 백지위에 한자를 썼다. 구건호가 그 뜻을 알자 모리에이꼬는 손뼉 치는 흉내를 내며 좋아했다. 웃을 때 마다 일본여성 특유의 덧니가 보였다. 살짝 가려진 덧니는 그녀의 귀염성을 더 빛나게 해주었다.

구건호는 웃는 모리에이꼬의 목덜미를 보았다. 흰 피부가 눈부셨다.

구건호는 호텔의 양식당으로 모리에이꼬를 데리고 갔다.

비프스테이크와 와인을 시켰다.

모리에이꼬는 스테이크 써는 방법이 서툴렀다.

“이건 이렇게 썰어.”

구건호가 설명하면서 스테이크를 썰어주었다.

“자, 먹어봐.”

구건호가 스테이크 조각을 포크에 찍어 주었다. 모리에이꼬가 오물 거리며 비프스테이크를 먹었다. 도톰한 입으로 오물거리는 모습이 무척 귀여워보였다.

구건호는 점심을 먹고 나와 요요기 공원을 걸었다.

“모리에이꼬, 내가 평생 너를 지켜줄게.”

“정말?”

구건호가 용기를 내어 모리에이꼬의 손을 잡았다. 구건호는 노동을 많이 하여 손에 궂은살도 배었지만 모리에이꼬의 손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요요기 공원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모리에이꼬의 손목을 잡고 걷던 구건호는 벚꽃을 하나 따서 모리에이꼬의 머리에 꽃아 주었다.

“잠깐만요. 구사쪼상(구사장님).”

모리에이꼬는 가방 속에서 작은 거울을 꺼냈다. 구건호가 꽃아 준 머리를 거울 속에 비추어 보았다.“

‘그만 봐, 안 봐도 예뻐.“

모리에이꼬는 구건호가 말하는 한국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미소만 보내왔다. 모리에이꼬는 어려서부터 기원에 들어가 춤만 추어서 그런지 사회에 대하여 돌아가는 건 잘 모르는 듯 했다. 정규 학교를 다니진 못했어도 때 묻지 않고 오히려 순수한 면이 있었다. 심성이 한없이 착하기만 한 것 같았다.

구건호와 모리에이꼬는 요요기 공원의 연못 앞에 앉았다.

“다리 아프지?”

모리에이꼬가 웃으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둘은 또 필담이 시작되었다.

“모리에이꼬, 사랑한다.”

“저도 구사쪼상이 좋아요. 자수성가하셨다고 해서 더 좋아요.”

구건호가 모리에이꼬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지난번에 요정에서 불렀던 노래 가사 좀 적어봐.”

모리에이꼬가 가사를 적었다. 연못앞 잔디에 앉아 흰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는 모리에이꼬의 모습은 게이샤가 아니라 캠퍼스 위에 앉아 시를 쓰고 있는 대학 신입생 같았다.

[아아, 대학을 한창 다닐 나이의 이 여자에게 운명의 신은 어찌하여 밤늦은 시간에 요정에서 춤을 추는 게이샤가 되게 하였나.]

모리에이꼬가 가사를 다 적었는지 흰 종이를 구건호에게 주었다.

구건호가 읽어보았다. 구건호도 일본어의 가다가나와 히라가나는 안다. 뜻은 몰라도 읽을 줄은 알았다.

“한번 불러봐. 그때처럼.”

모리에이꼬가 연못을 바라보며 가만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게이샤가 된 그녀의 운명처럼 슬픈 곡조의 노래였다.

“사다메노미찌와 가데나구모. 가오레요 세메데...(운명의 길은 끝이 없어도 향기를 품으렴...)”

구건호는 모리에이꼬가 적어준 가사를 보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느덧 둘은 합창을 하고 있었다. 모리에이꼬가 슬그머니 구건호의 팔짱을 끼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제 일어서자.”

모리에이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요요기 공원을 나와 시부야 쪽으로 걸었다. 길가의 상점에서 우산을 하나사서 팔짱을 낀 채 걸었다.

비가오자 날씨가 으스스했다. 자연스레 둘의 몸은 더 밀착이 되었다. 모리에이꼬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추워?”

“괜찮아요.”

“어디 가서 뜨거운 것 좀 먹을까?”

“괜찮아요. 고엔도리까지 그냥 걸어요.”

고엔도리에는 젊은이 취향의 음식점이 즐비했다.

“여기 자주 와요?”

“아니, 딱 한번.”

구건호는 고엔도리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무얼 먹을래?”

“오차츠케.“

오차츠케는 밥위에 생선을 얹고 뜨거운 녹차를 부어서 먹는 음식이었다.

“술도 한잔 할까? 옷이 비에 젖었으니 사케 한잔 할까?”

“아니, 저는 비루(맥주)가 좋아요. 하야시비루요.”

“하하, 그래? 좋아. 나도 비루로 하지.”

구건호가 음식점 안을 둘러보았다. 대중음식점이라 그런지 젊은이들로 꽉 찼다. 모리에이꼬 또래들도 많아 보였다.

[미안해 모리에이꼬]

식당 안은 열기 때문에 금방 더워졌다. 구건호는 맥주를 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건호는 백지를 꺼내놓고 또 필담을 하였다. 구건호는 군대 갔다 온 이야기며 화성시와 포천시에서 공돌이 노릇할 때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런 소총을 메고 이렇게 보초를 섰지.”

구건호는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을 했다. 모리에이꼬가 턱을 괴고 구건호의 설명을 흥미 있게 들었다.

“에고, 시간이 많이 되었네. 9시다. 집에 가자.”

비는 계속 쏟아졌다.

구건호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지만 얼른 잡혀지지 않았다. 한참 거리에서 씨름한 끝에 겨우 택시를 잡았다.

“뉴오따니 호텔로 가주세요.”

“저런, 옷이 많이 젖었네요.”

늙은 택시기사는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주었다.

호텔에 도착했다.

“옷이나 말리고 가.”

“모리에이꼬가 주저주저하였다.”

“나, 너 안 잡아 먹을 테니 가자.”

구건호가 웃으며 모리에이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모리에이꼬가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면서 따라왔다.

구건호가 모리에이꼬를 자기 방에 있는 의자에 모리에이꼬를 앉혔다.

“춥지? 오차 끓여줄게.”

구건호가 얼른 커피포트의 버튼을 눌렀다.

구건호는 모리에이코를 일으켜 세워 뜨거운 차를 주었다.

구건호가 차를 마시는 모리에이꼬를 쳐다보았다. 모리에이꼬는 실크 브라우스가 비에 젖어 몸에 바짝 붙어 있었다. 머리도 젖어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어 있었다. 구건호는 모리에이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려주었다. 모리에이꼬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그대로 구건호에게 전해졌다. 구건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모리에이코를 와락 껴안았다.

“모이에이꼬, 사랑해. 평생 너를 지켜줄게.”

구건호는 모리에이꼬의 붉은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대었다. 모리에이꼬는 술기운 때문인지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너를 평생 지켜줄게.”

구건호는 지쳐 쓰러져 있는 모리에이꼬의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 둘은 서로 살을 섞게 되었다.

모리에이꼬는 정말 숫처녀였다.

뉴오따니 호텔 침대위의 하얀 시트를 빨갛게 물들였다.

새벽 서너 시는 되었을까, 잠이 깬 모리에이꼬가 울고 있었다.

구건호는 수건을 가져와 모리에이꼬의 작은 얼굴을 닦아주었다.

“울긴, 바보같이.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구건호가 다시 모리에이꼬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뜨겁게 맞추었다.

아침이 되었다.

욕실에서 모리에이꼬의 목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구건호는 유가타를 입고 모리에이꼬의 목욕하는 소릴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모리에이꼬와 영원히 결혼해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리에이꼬가 얼굴을 닦으며 유가타를 입은 채 나왔다.

모리에이꼬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구건호를 보고 방긋 미소를 지었다.

“목욕하고 나오니 더 예쁘다.”

구건호가 웃으며 말했다.

구건호도 목욕을 했다. 샤워를 하고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어? 방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네?”

흐트러진 방안이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구겨진 시트도 펴져 있었고 이불도 칼같이 개어져 있었다.

“에도(江戶) 시대의 일본여자 같네.”

구건호는 모리에이꼬를 다시 한번 안아주었다.

구건호는 모리에이꼬와 함께 아침 식사를 위해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 호텔 식당은 뷔페식이었다.

구건호는 흰 와이셔츠만 입은 채 모리에이꼬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모리에이꼬가 얼른 일어나 구건호에게 음료수와 네프킨을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구건호가 미소를 보내자 모리에이꼬도 환한 웃음을 지었다.

구건호는 둘이 같이 밥을 먹으면서 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의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구건호는 이 가엽은 어린 새를 두고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건호는 커피까지 마시고 호텔 로비에서 모리에이꼬를 배웅하였다. 모리에이꼬는 머리를 단정히 빗고 옅은 화장까지 하였다. 눈부신 그녀의 미모를 보고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너의 장래 문제에 대하여는 마마상 세가와준꼬를 통하여 전달하겠다. 이것은 내 전화가 적힌 명함이다. 잘 간직해라. 그리고 여기에 너의 전화번호와 주소 좀 적어다오.”

모리에이꼬가 자기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었다. 구건호는 모리에이꼬가 적어준 메모지에 입을 맞추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모리에이꼬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또 연락할게.”

구건호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모리에이꼬는 호텔 회전문을 나가려다 말고 뒤돌아서서 오른 손을 흔들었다. 구건호도 계속 한자리에 서서 모리에이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구건호는 가방을 챙겨 공항으로 가면서 아카사카의 최지연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건호입니다. 어제 모리에이꼬를 만났습니다. 모리에이꼬의 머리를 얹어주었습니다.”

“오, 그래요? 축하합니다. 구사장님 실력 좋으시네.”

“그녀의 후견 문제에 대하여는 최사장님이 세가와준꼬와 의논해 주십시오.“

“우리나라 옛날 말에 중매 잘하면 양복 한 벌 얻어 걸린다는 말 있지요?”

“하하. 내가 최사장님 수고를 잊을 리 있겠습니까?“

“호호, 농담이고요, 사업 잘 하세요. 혹시 나중이라도 모리에이꼬에게 방을 얻어주면 자주 만날 기회가 더욱 있을 겁니다. 미인은 영웅만 얻는 법입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호호호.“

구건호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모두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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