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17화 (117/501)

# 117

마마상 세가와준꼬 (瀨川詢子) (2)

(117)

애달픈 듯한 사미센 소리에 맞추어 게이샤 모리에이꼬의 춤이 시작되었다.

[모리에이꼬 보고 싶었다. 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구건호는 앞에 있는 사케의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영업 김상무와 통역은 말을 잊은 채 춤을 감상하였다. 통역은 옆에서 아미엘이 무슨 말을 하는데 통역도 잊은 채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춤을 감상하였다.

춤이 끝나자 아미엘이 크게 박수를 쳤다.

“오우, 원더플!”

아미엘의 박수를 따라 구건호가 박수를 쳤다. 영업 김상무와 통역은 박수도 잊은 듯 했다.

마마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구사쪼상, 모리에이꼬의 오도리(춤)가 마음에 드셨는지요?”

“좋다, 아주 좋아. 상으로 내가 한잔 따라주마.”

마마상이 모리에이꼬 대신 말을 했다.

“원래 요정에 나와서 춤을 선보이는 예기(藝妓)는 손님 술을 받아 마시지 않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한잔을 따라다오.”

“호호호, 그것도 안 되지만 구사쬬상에게는 특별히 따라드리도록 하지요. 에이꼬, 따라드려라.”

모리에이꼬가 무릎걸음으로 구건호의 상 앞에 다가와 술병을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구건호는 현기증이 났다. 손에 든 술잔이 떨렸다.

“호호호, 구사쪼상이 벌써 취한 모양이네요.”

구건호는 단숨에 모리에이꼬가 따라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신 구건호는 장식용으로 갖다 논 화병 속의 꽃 한 가지를 꺼내 모리에이꼬에게 주었다.

모리에이꼬가 우물쭈물하였다.

“받아라.”

마마상이 말하자 모리에이꼬는 꽃을 두 손으로 받았다.

“하, 아리가또 고자이마쓰(고맙습니다.)

구건호는 자작으로 술을 한잔 더 따라 마시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모리에이꼬, 너의 머리를 내가 올려주고 싶다.”

구건호의 말을 통역이 알아듣지 못했다.

“예? 머리를 올리다니요? 머리를 들라는 말씀인가요?”

영업상무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구건호를 쳐다보았다.

“그대로 통역하면 됩니다. 내가 모리에이꼬의 머리를 올려주고 싶다고 통역하세요.”

통역이 통역을 하였다. 이 말에 마마상 세가와준꼬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리에이꼬도 고개는 숙였지만 놀란 눈이 되었다.

마마상이 이내 웃음을 띠었다. 노련한 마마상 다웠다.

“호호호, 구사쬬상은 농담도 잘하시네요.”

“아니요, 진심이요.”

“정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모리에이꼬, 너는 이만 나가보아라.”

“하잇,”

모리에이꼬는 다다미에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 방을 나갔다.

“게이샤의 머리를 올리는 일은 절차가 있습니다. 더구나 구샤쪼상은 외국인입니다. 그리고 모리에이꼬는 마이꼬(어린 무희)라고 불리우는 예기(藝妓)입니다. 일반적 게이샤와는 다릅니다.”

머리 올린다는 말에 대하여 통역과 영업 김상무는 그때야 이해를 하는 듯 했다.

“나는 진심이요.”

“그렇다면 이 문제는 말이 안 통하니 나의 친구 최지연과 상의해 보세요.“

“최지연이라니?”

“아까사카 한국 음심점 사장이에요. 나와는 친구지요. 호호호.”

“유명한 영화배우 출신 아닙니까?”

“통역이 그 여사장을 알아요?”

“여사장님은 잘 모르지만 그 집에서 알바를 했습니다. 여사장님이 옛날에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였다고 합니다.”

“흠.“

최지연이란 말을 듣고 영업 김상무가 말했다.

“최지연이라면 옛날 유명배우였는데 여기서 음식사업을 하는구나. 사장님은 잘 모르셔도 우리 세대라면 잘 압니다. 유명한 배우였습니다.”

“흠.”

갑자기 아미엘이 투정을 부렸다.

“당신들 나를 놔두고 한국말로 계속 이야기 할 거야?”

구건호는 웃으며 아미엘의 술잔에 자기 술잔을 부딪쳤다.

“고맙소, 마마상도 한잔 받으시오.”

마마상이 술잔을 받아 구건호의 잔에 부딪쳤다.

“호호호, 구사쪼상은 역시 대장부입니다.”

구건호는 귀국 날자가 되었다. 영업 김상무만 돌려보내기로 했다.

“상무님은 먼저 귀국하시지요. 나는 아미엘을 우리 공장에 와 보도록 다시 한 번 설득해보지요.”

“아미엘이 원재료를 준다고 해도 우리 실력으로 그걸 콤파운드 하기는 벅찰 겁니다.”

“디욘의 미국 본사에서 기술자를 한 사람 나오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일종의 기술 유출인데 로얄티 달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미엘과 사장님은 친구 지간이라 그런 요구를 안 해도 본사 단위에선 요구할 겁니다.”

“흠,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아미엘을 다시 찾아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꾸 조르면 너무 아쉬워하는 것 같이 보여 전화로 대신하기로 했다.

“아미엘? 어제 과음 안했나?”

“아니, 구사장이 더 과음한 것 같던데.”

“우리 아산 공장에 한번 와. 주말에 바람 쏘일 겸 와서 한국 가야금도 듣고 라운딩도 한번 하자.”

“가야금과 라운딩? 생각만 해도 즐겁다. 이번 주는 미국 본사에서 누가 온다니 힘들고 다음 주에 시간 내볼까?”

구건호는 통역도 보내버렸다. 영어와 일본어를 못하는 구건호는 불편한 것이 많겠지만 크게 상담할 것도 없어 보내 버렸다.

구건호가 뉴오따니 호텔 커피숍에서 멍 때리고 앉아 있는데 아카사카의 한국 음식점이 생각 났다.

“최지연이라는 배우라고 했나?”

아카사카는 뉴오따니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걸어서 가도 되었다. 구건호는 어슬렁 거리며 한국음식점을 찾아갔다. 인테리어가 깔끔한 고급 한정식 집이었다. 규모도 제법 컸다.

오후 1시가 넘어선지 손님은 별로 없었다.

구건호는 안자마자 종업원에게 사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사장님은 안계신데요.”

“언제 나오십니까?”

“이따 저녁 때 8시 넘으면 매출 확인하러 잠깐 나오십니다.”

“서울에서 온 사람이 사장님을 꼭 뵙고 싶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구건호는 지에이치 모빌 대표이사의 명함을 종업원에게 주었다.

구건호는 롯폰기힐스와 메이지 신궁 등을 구경하고 저녁 때가 되어 아카사카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낮에 봤던 종업원이 인사하며 사장님이 저기 계시다고 알려주었다.

사장은 어떤 여자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장과 손님은 고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왕년의 배우라 그런지 옷매무새와 화장이 범상치 않았다.

“실례지만 최지연 사장님이십니까?”

“예, 전데요. 혹시 낮에 다녀가신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리 앉으시지요.”

사장은 의자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신쥬꾸 요정마담 세가와 준꼬를 잘 아십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담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혹시 지에이치 모빌의 구사장님이 다녀가셨냐고 묻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구건호는 앞에 다른 여자 손님이 있어 이야기를 꺼내기가 거북스러웠다. 그런데 여자 손님이 자꾸 구건호를 쳐다보았다.

“혹시 사장님, 저 아시겠어요?”

구건호가 여자 손님을 쳐다보았다. 낯이 익었다.

“한번 뵌 듯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아, 한남동의...”

“맞아요. 한남동 요정의 장미향이에요. 여기 최지연 사장님은 저희 언니에요. 오늘 일본에 쇼핑하러 왔다가 잠깐 들린 거예요. 저희들 얼굴 닮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성씨가 최씨와 장씨라... 사촌이신가요?”

두 여자가 깔깔대고 웃었다.

“우리 친자매예요. 장미향과 최지연은 다 예명이에요. 옛날에 영화 찍을 때 썼던 예명들이에요.”

“흠, 그러시군요.”

“아, 맞다. 생각나네요. 그때 청담동 이회장님하고 같이 오셨지요? 이회장님 손님들은 제가 기억을 꼭 해두어요. 이회장님과 같이 오는 분들은 거물들이 많아서지요.”

“어머머. 이 분이 너희 집에 오셨었냐? 대단하시네요. 장미향도 알고 신쥬꾸의 세가와 준꼬도 아니.”

“안면만 있지 자주 그런데 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시겠지요. 사업하시는 분이니까 비즈니스로 가셨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세가와 준꼬가 왜 전화를 했을까요? 상당히 도도하고 재벌이나 장관들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 여자인데.”

구건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장미향이 먼저 일어섰다.

“언니, 저 이제 가야 되요. 숙소에서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두 분 이야기 잘 나누세요. 그리고 사장님은 한국에 나오시면 저희 집 꼭 한번 들리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구건호가 일어서서 장미향에게 인사를 하였다.

최지연 사장은 구건호를 내실로 안내했다. 한국식 자수 병풍이 펼쳐진 방이었다.

“아늑하군요.”

종업원이 사과를 깎아 접시에 가지고 왔다.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신쥬꾸의 춤추는 게이샤 모리에이꼬의 후견인이 되고 싶습니다.”

“최지연 사장이 놀란 눈으로 구건호를 쳐다보았다.

최지연이 사장은 이내 얼굴을 고치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모리에이꼬의 실물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요정이 모리에이꼬 덕분에 손님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구건호가 사과 한쪽을 집었다.

“게이샤의 후견인이 되는 조건을 알고 계십니까? 장예모 감독의 영화 게이샤에서도 후견인 이야기가 나오지요. 게이샤의 후견인은 첫째 재력이 있어야 하고 게이샤 자신이 흠모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흠.”

“재력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평생 뒷배를 보아주어야 합니다. 또 게이샤가 흠모해야 하는데 서양인은 그런 경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한국인을 흠모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흠.”

“일본인은 아무래도 한국인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지요. 일단 재력은 청담동 이회장님과 함께 어울릴 정도면 인정합니다. 그래도 평생을 책임져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단념하시지요.”

“각오는 하고 있겠습니다.”

“동경 시내에 20평짜리 맨션이라도 사주실수 있겠습니까?”

“원한다면 해 드리지요.”

‘호, 대단하신 각오네요. 동경 치요다구의 맨션은 한국 돈으로 평당 5천만원이 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게이샤 자신이 구사장님을 흠모하느냐 여부는 주위에서 간섭할 성질이 아닙니다. 일단은 게이샤 자신의 선택이니까요.“

“흠.”

“그 게이샤가 만약에 사장님을 선택한다면 평생을 책임지고 사랑해 줄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모리에이꼬를 지켜드리지요.”

“멋진 분이군요. 아마도 모리에이꼬는 사장님을 선택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최지연이 세가와 준꼬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지연 사장의 입에서 유창한 일본말이 흘러 나왔다. 구건호는 최지연 사장의 목소리가 너무 고와 일본 여자 아나운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지연 사장이 전화를 하다말고 구건호에게 질문을 했다.

“지금 어느 호텔에 계시지요?”

“뉴오따니 호텔입니다.”

최지연 사장은 3분 정도 더 통화를 했다.

“내일 토요일인데 모리에이꼬를 12시까지 뉴오따니 호텔의 커피숍으로 보내겠답니다. 가는 것 여부는 모리에이꼬가 결정하므로 장담은 못하겠답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최지연 사장이 전화를 끊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역시 구사장님은 남자 중의 남자입니다.

구건호는 최지연 사장에게 자기의 명함을 받았냐고 물었다.

“아까 종업원한테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에이치 모빌이 무엇을 하는 회사입니까?”

“자동차 부품 생산회사입니다. 아직은 종업원 250명의 작은 회사입니다.”

최지연 사장이 고개를 젓히고 깔깔 웃었다.

“종업원 250명이 작은 회사면 저 같이 직원 12명 있는 식당은 뭐가 됩니까?”

구건호도 따라 웃었다.

“구사장님, 서울 가시면 제 동생 잘 좀 돌봐줘요.”

“한남동의 요정은 잘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웬걸요. 아직도 남편 빚이 있습니다.”

“오, 결혼 하셨군요. 독신인줄 알았는데.”

“남편이 유명한 배우였던 신성훈입니다.”

신성훈은 구건호도 알고 있는 배우였다. 사극에도 많이 출현했던 배우였다.

“신성훈 그 작자가 영화사를 차렸다가 쫄딱 망했지요. 그 바람에 둘은 이혼하고 아직도 빚에 허덕이고 있지요.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분이 청담동 이회장님입니다. 이회장님이 거금을 선뜻 내놓아 한남동 요정을 차린 거지요. 한남동 그 요정은 건물주가 이회장님입니다.”

“호, 그렇군요.”

“이회장님은 전에 가끔 일본에 오시면 저희 집에 들리곤 하셨는데 요즘은 연로하셔서 그런가 통 안 오시네요.”

“실은 나도 이회장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돈을 빌린 적은 없으나 인생에 조언을 많이 해주신 저의 멘토와 같은 분입니다.”

“실례의 말씀 같지만 아까 구사장님을 보는 순간 이회장님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더구나 좋아하는 게이샤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지켜주겠다는 말씀을 듣고 저 역시 감동을 했습니다.”

“흠.”

“저는 동경에 와서 사업을 한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치사한 한국 남자들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구사장님은 정말 멋진 남자이십니다. 모리에이꼬란 여자가 부럽습니다.”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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