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16화 (116/501)

# 116

마마상 세가와준꼬(瀨川詢子) (1)

(116)

구건호는 영업 상무를 대동하고 일본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통역이 공항에 마중을 나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으로 상당히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궁색한지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제 조카입니다. 일본 유학생인데 최근 휴학하고 알바를 하고 있습니다.”

“오, 그래요?”

구건호가 손을 내밀었다.

구건호는 이제 누가 보아도 사장 틀이 났다. 항상 맛사지를 받아 피부가 깨끗했고 옷도 최고급 명품만 걸쳐서 그런 것 같았다. 공돌이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통역은 구건호를 보자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갑자기 웬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히사시 부리데스! (오래간만입니다.).”

구건호가 돌아보니 디욘사의 운전기사였다.

“오, 반갑소.”

구건호가 손을 내밀었다. 50대의 운전기사는 일본식으로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김상무님 인사하시죠. 디욘사의 아미엘 사장이 차를 보냈네요.”

“옛? 디욘사에서 차를 보내요?”

영업 상무는 깜짝 놀랐다. 일전에 오세영 회장을 모시고 디욘사를 방문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디욘사에서 차까지 보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니혼바시로 먼저 갑시다.”

구건호는 디욘제펜의 운전기사에게 아미엘의 사무실이 있는 니혼바시로 가자고 하였다. 디욘제펜은 사무실은 니혼바시에 있고 공장은 요꼬하마에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뚱뚱한 아미엘은 멜빵이 달린 바지를 입고 무슨 도면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미스터 아미엘!”

“오우, 구건호!”

둘이 부둥켜안고 포옹을 하였다.

영업상무는 이 장면을 감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건호 일행이 자리에 앉자 단정하게 생긴 일본인 비서가 차를 가지고 왔다.

“차 들면서 이야기 하자. 그동안 잘 지냈지.”

“잘, 지냈어. 김영진 변호사가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라.”

“그 친구도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구사장은 골프치러 왔냐? 아니면 신쥬꾸에 있는 요정을 가고 싶어 왔냐?”

“아니야, 비즈니스로 왔어.”

“비즈니스?”

“나, 이번에 자동차 부품공장 하나 인수했어.”

“무슨 공장인데?”

“플라스틱과 고무 제조사야. 주로 샤시 쪽에 들어가고 엔진 쪽에도 들어가.”

“그래? 공장이 어디에 있는데.”

“한국의 충남 아산시에 있어. 현재 종업원은 250명이야.”

“250명? 규모가 꽤 큰 모양이네. 회사는 오래됐고?”

“오래된 회사야. 금융비용을 감당 못해 넘어가는 회사를 인수했어.”

“오, 그랬구나. 공장 운영이 매우 어려울 텐데. 참 구사장은 메카닉(공돌이) 출신이지? 그럼 됐어. 성공할 거야.”

“참, 여기 옆에 앉은 분이 우리 회사의 영업담당 임원이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통역이야. 아미엘 사장이 일본어에 능통하니까 일본어 통역과 같이 왔어.”

“그래?”

아미엘이 손을 내밀어 김상무와 통역에게 악수를 신청했다.

악수가 끝나고 구건호와 아미엘은 더 이상 말을 중지하고 차를 마셨다.

구건호는 입가에 묻은 물을 네프킨으로 닦으며 말했다.

“김상무님, 그 도면 꺼내보세요. S기업에서 준 신제품 AM083 어셈블리 도면요.”

“영업담당 김상무가 도면을 꺼냈다.”

“이번에 한국의 재벌기업인 S기업에서 오더로 주겠다는 도면이야. 이걸 만드는데 디욘사의 원재료가 들어가.”

“흠.”

“그냥 원재료만 들어가면 안 되고 색상과 내구성, 경도 등을 위해 콤파운드를 좀 해야 돼.”

“흠.”

“원재료가 특수 우레탄 계열이라 디욘사 제품을 써야 돼. 여기서 좀 콤파운드를 해 줄 수 없나? 시제품을 한번 찍어 보려고 그래. 금형은 만들었어.”

“흠, 이 도면은 언젠가 한국의 큰 회사에서 나한테 들고 왔었던 것 같은데? 이지노팩도 이것을 들고 왔었지 아마.”

“아, 그랬던가?”

“그런데 곤란한 것이 있어.”

“왜.”

“이걸 만들려면 일시적으로 우리 라인을 중지해야 돼. 구사장도 알다시피 요꼬하마 공장이 도심에 있어 캐파를 늘리지 못하고 있어. 주택가라 증설 허가가 잘 안나.”

“흠.”

구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엘의 말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한국의 이지노팩 사장과 합자사 문제는 잘 되가나? 이지노팩에서 생산한다면 거기에 부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지노팩은 너무 요구사항이 많아서 합자 문제가 진전이 안 되고 있어.”

“그럼 다른 기업과 합작선을 물색하면 되잖아?”

“본사의 선정 기준이 있어. 이를 테면 합작을 할 기업의 자본금이라든가, 판매망이라든가, 심지어는 사장의 의욕이나 자질 같은 것도 봐. 이지노팩이 적당한데 그 사장 너무 욕심이 많아.”

“흠.”

구건호가 결심을 한 듯 의자를 앞으로 끌어 당겼다.

“그 합작 나하고 하면 어떨까?”

“구사장이? 하하하,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돈은 나도 있어.”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야. 압출기도 전부 미국이나 독일 것을 써야 돼. 공장 부지도 넓어야하고. 40피트짜리 콘테이너가 마당에서 회전을 해야 돼.”

“하면 하는 거지.”

“구사장은 이번에 아산에 있다는 공장 인수하느라고 자금도 고갈 되었을 것 아닌가?”

“나는 이제껏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면서 살아왔어. 합작 한번 해보자.”

“의욕은 좋은데....”

통역이 소변을 가고 싶다고 하였다. 자연히 구건호와 아미엘의 대화가 끊어졌다.

한참 후 통역이 다시 들어왔다.

영업상무가 자기 조카인 통역을 나무랬다.

“너는 사장님들 중요한 대화에 소변을 보러 가면 어떻게 하냐?”

“미안합니다. 생리 현상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요.”

구건호가 웃으면서 통역을 감싸 주었다.

“그럼,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지. 자 다시 시작해 봅시다.”

“예.”

통역이 필기도구를 다시 준비했다.

구건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미엘 사장, 한국 아산에 있는 우리 회사를 한번 방문해 보지?”

“아산 공장을?”

“와 봐야 내가 디욘사와 합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네.”

“흠.”

영업상무가 말을 보탰다.

“저는 전에 물파산업 회장님을 모시고 아미엘 사장님을 한번 뵈러 온 적이 있습니다.”

“물파산업?”

“예, 그 물파산업을 이번에 구건호 사장님이 인수를 하셨습니다.”

“오, 그래요?”

다시 구건호가 아미엘을 다그쳤다.

“한번 와라. 한번 와보고 결정해라. 안 되도 좋으니 부담은 갖지 마라, 와서 서울 한남동에 있는 그때 그 집 가서 가야금 소리라도 들어야 하잖아?”

“가야금? 좋지. 난 동양의 음률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하하하. 오늘은 구사장이 왔으니 사미센 소리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어?”

“나는 거기에 있는 춤추는 게이샤를 보고 싶네.”

“아, 그 요정같은 무기(舞妓)!”

“술값은 내가 내겠네. 비즈니스로 왔으니까.“

“하하,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세.”

구건호는 일단 호텔에 돌아와 쉬었다. 아미엘은 저녁 7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 요정을 가기 위해서 였다. 통역이 뉴오따니 호텔 커피숍까지 따라왔다.

구건호는 통역을 불렀다.

“여기서 산지 오래되었어요?”

“일본에 온지는 한 7년 됩니다.”

“대학원 학생인가요?”

“아닙니다. 대학생입니다.”

“아니, 7년 되었다며 아직 대학생입니까?”

“알바를 하느라고 휴학을 자주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흠, 그런가요?”

구건호는 안 포켓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거 식사값 하고 어디서 놀다가 6시 30분까지 이리로 와요. 저녁 식사장소 통역을 해야 하니까.”

“감사합니다.”

통역은 코가 땅에 닿도록 구건호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나갔다.

구건호는 호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몇년씩 노량진 고시원에 쳐 박혀 9급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는 수험생이나 저렇게 남의 나라에 와서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는 것이 좋은 현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6시 30분이 되자 아미엘이 보낸 운전기사가 왔다. 통역도 다시 왔다. 구건호는 뉴오따니 호텔 상가에서 산 밝은 색의 티셔츠를 양복 안에 받쳐 입었다.

“갑시다.”

“정말 요정으로 갑니까?”

“그렇습니다. 김상무님은 사회생활 오래하셨으니 요정은 가보셨지요.”

“아닙니다. 못 가보았습니다. 그런 곳이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영업상무는 구건호의 뒤를 따라가며 구건호의 뒷모습을 보았다. 구건호의 뒷모습이 거인처럼 보였다. 한때는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운 좋게 돈을 번 젊은이가 회사를 인수한 것 같아 아니꼽게도 보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더구나 자기는 구건호보다 15살이나 나이가 많다. 기업 간부인 아버지 밑에서 착실히 공부하여 서울에서 한양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몇 개의 기업을 거쳐 물파산업에 경력사원으로 들어왔던 자기였다.

“내가 아산 신도시에 40평대 아파트를 가지고 있고 기업의 임원이라고 폼을 잡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군. 나는 평생 요정이라는 데를 구경도 못해보았는데 구사장은 노는 게 우리하고 확실히 달라. 노는 것도 그렇고 업무에 대하여도 아주 해박해. 전에 물파의 부사장으로 있던 오세영 회장의 아들 오인철하고는 게임이 안 돼.”

앞서가던 구건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구건호가 미소를 지으며 어서 따라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영업상무는 섬뜩한 생각이 났다.

“구사장은 부드러운 것 같지만 일면 무서운데도 있는 사람이다. 저 미소 속에는 칼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조심하자.”

영업상무는 몸을 움츠리고 구건호의 뒤를 쫓았다.

요정입구의 마당에 있는 대나무가 푸르름을 더했다.

구건호가 영업상무를 돌아보고 말했다.

“일본서도 이런 요정은 아무나 예약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아미엘 사장이나 되니까 예약이 가능하답니다.”

“그렇군요.”

영업상무와 통역은 요정 방문이 난생 처음이라 주위를 둘레둘레 쳐다보았다.

다다미 방에 좌정해 앉자 문이 열리며 기모노를 입은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중년여성이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였다.

“구사쪼상(구사장님) 오래간만입니다. 요정의 마담 세가와 준꼬(瀨川詢子)입니다.”

“준꼬상은 더 젊어졌어.”

아미엘이 농담을 하자 세가와준꼬가 눈을 흘겼다.

“아미엘 사쪼상은 일본식 농담도 잘하네요. 호호호.”

마담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구건호는 마담의 저런 모습은 아주 일본풍이라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마상도 잘 계시었소?”

“구사쪼상 방문에 저희 집이 더 환해지는 것 같습니다. 양복 속의 티셔츠가 아주 멋져 보입니다. 호호호.”

마담은 또 간드러지게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미엘이 마담에게 말했다.

“구사장 왔으니 최고급 음식으로 내 와요.”

“술은 뭘로 하실 건가요? 양주로? 아니면 일본식 사케로?”

구건호가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말했다.

“일본에 왔으니 일본식 사케로 합시다.”

“하잇, 알겠습니다. 쿠보다 만쥬(술 이름)로 준비하겠습니다.”

마담은 이렇게 말하면서 황급히 일어나 구건호의 양복저고리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음식이 나왔다.

구건호와 아미엘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재미있게 떠들었다. 영업상무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통역도 좀 먹어요. 통역하느라 먹지도 못했겠네. 김상무님도 좀 드시고요.”

“알겠습니다.”

아미엘이 마담을 불렀다.

“이제 사미센 소리좀 들읍시다.”

“하잇, 준비하겠습니다.”

유가타를 입은 여성 3명이 와서 사미센 곡을 연주했다. 아미엘은 눈을 지긋이 감고 사미센 곡을 감상했다. 정말로 동양의 음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3번째 연주가 끝나자 마마상이 다시 들어왔다.

“부족한 것은 없었습니까?”

“부족한 것 있지요.”

“예?”

“모리에이꼬의 춤을 감상해야지요.”

“호호호,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마마상이 손뼉을 치자 잠시 후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젊은 무희가 들어왔다.

기원의 최고 무희 모리에이꼬였다.

모리에이꼬는 무릎을 꿇고 들고 있는 손부채를 다다미 위에 내려놓았다.

“모리에이꼬(森瑛子) 인사 올립니다.”

모리에이꼬는 코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하였다.

“반갑소. 모리에이꼬!”

구건호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모리에이꼬가 고개를 들었다. 구건호를 알아보았는지 살며시 미소를 보였다.

“헉!”

이런 모습을 보자 옆에 있던 영업상무와 통역이 감탄의 신음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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