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02화 (102/501)

# 102

게이샤 모리에이꼬(森 瑛子) (2)

(102)

술잔이 몇 번 더 돌았다.

구건호는 이날 운동을 해서 그런지 술이 땡겼다.

사미센 소리가 그치자 방문이 열리고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성이 들어왔다. 게이샤 화장을 한 것으로 보아 아미엘이 말한 그 모리에이꼬란 예기(藝妓: 춤추는 게이샤) 같았다. 젊은 여성은 손에 든 부채를 다다미 위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방바닥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모리에이꼬라 합니다.”

모리에이꼬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일행들은 크게 놀랐다.

“헉! 이런 미인이!”

조명이 어두워서 잘 안보였는데 밝은 조명에서 보니까 얼굴이 천하일색이었다.

동양 미인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는 미국인 아미엘을 제외하고 구건호와 김영진, 그리고 통역 한정록은 눈을 크게 떴다. 특히 한정록은 안경을 다시 닦아가며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사미센을 들고 있던 여자 두 명이 다시 사미센 줄을 퉁기기 시작했다.

“팅”

“팅따다당땅.”

무릎을 꿇고 앉았던 모리에이꼬가 부채를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모리에이꼬가 사미센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헉!”

완전히 천상의 선녀가 하강한 것 같았다. 김영진 변호사는 침을 꼴각 삼켰고 구건호는 어딘가가 근질거림을 느꼈다. 한정록은 입만 벌리고 있었다.

사미센의 음률은 어딘가 처량했다. 현대 음악이 아니고 옛날 가락이므로 좀 청승맞았다. 에이꼬는 사미센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슬픈 노래였다.

“사다메노 미찌와 가데나구모.....”

구건호는 옆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한정록을 툭 쳤다.

“지금 저 노래 가사가 무슨 말이오?”

“운명의 길은 멀어도 향기를 품으라는 말입니다.”

“흠.”

구건호는 노래하는 게이샤 모리에이꼬가 왠지 모르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곡조가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구건호의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운명의 길, 멀기만 하겠지.”

구건호는 돈만 벌려고 달려온 자기 인생이 과연 옳은 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리에이꼬는 춤이 끝나자 부채를 접고 다시 다다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다다미에 짚고 머리를 조아렸다.

“부족한 춤,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인 세 사람은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미엘이 호탕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원더플!”

아미엘의 박수 소리를 듣고 그제야 정신이 퍼뜩 난 한국인 세 사람이 박수를 쳤다. 옆에 있던 마마상이 말했다.

“감상 잘 하셨습니까? 도꾜의 춤추는 게이샤 중에서 가장 예쁘고 인기 있는 아이입니다.”

“아주 훌륭해요.”

“에이꼬는 아무 자리나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특별히 아미엘상과 구사장님이 오셔서 불렀습니다.”

에이꼬는 뒷걸음으로 물러나드니 다시 인사를 하고 나갔다.

아미엘이 마마상에게 기분 좋은 듯이 말했다.

“에이꼬는 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소. 미국인인 내가 보아도 그렇소.”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데 아직 머리를 못 올려 걱정입니다. 더구나 올해 나이도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머리를 못 올려?”

구건호는 이 여자도 골프를 배우나 생각했다. 골프를 연습장에서 배우고 난후 처음으로 선배를 따라 필드에 나가는 것을 머리 얹는다고 표현하지 않던가! 에이꼬라는 춤추는 게이샤도 그런가보다 하고 추측했다.

구건호가 물었다.

“마마상, 에이꼬가 머리를 못 올렸다는 것이 무슨 말이요? 골프를 배우나요?”

“호호호, 골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머리를 못 올렸다는 것은 아직 숫처녀 딱지를 떼지 못했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요? 그럼 연애하면 될 것 아니요?”

“머리 올려줄 사람을 아직 못 찾았다는 뜻이지요. 게이샤이기 때문에 머리 올려줄 사람을 손님 중에 찾으려고 합니다.”

“손님 중에 찾아?”

“머리 올려줄 사람은 예의와 절도가 있는 신사이어야 하고, 평생 후견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게이샤는 든든한 후견인을 가질 뿐 대개 결혼하지 않습니다. 후견인은 신사중의 신사를 본인이 선택합니다.”

“흠.”

구건호는 게이샤의 관습이 흥미로웠다.

“인물이 천하일색이라 머리 올려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텐데요.”

“줄 섰지요. 하지만 에이꼬는 천하의 대장부가 아니면 머리 올려줄 사람으로 선택하지 않겠답니다.”

구건호는 그 머리 올려줄 사람은 외국인도 가능하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런데 구건호가 말하기도 전에 통역 한정록이 마마상에게 슬며시 질문해 보았다.

“미국이나 영국인도 머리 올려줄 사람이 가능한가요?‘

“호호호, 아미엘상을 두고 말하나요? 아미엘상은 결혼했잖아요. 에이꼬가 까다로워 기혼자는 원치 않는답니다. 하지만 총각은 이런 고급 요정에 들어올수 있는 사람이 없겠지요.”

“재벌 아들들이 있잖습니까?”

“재벌 아들은 망나니 같아서 에이꼬가 제일 싫어한답니다.”

“흠.”

“따지고 보면 에이꼬도 불쌍한 아이에요. 삿뽀로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엄마, 아빠를 교통사고로 잃고 고아로 컸으니까요.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교또의 기원에 14살에 들어왔지요. 호호호, 그런데 술보다는 전부 에이꼬에게만 관심이 있는 모양이네요.‘

“아니요, 사케 한 잔 더 합시다.”

구건호는 뉴오따니 호텔에 돌아와서도 에이꼬의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짙은 눈썹, 반짝이는 눈동자, 도톰한 입술이 생각났다. 무엇보다도 눈부셨던 그녀의 피부는 구건호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모리에이꼬, 한 번 더 그녀의 춤을 감상하고 싶다. 그 요정은 내가 혼자 갈수 있을까? 그런데 일본어를 알아야 뭘 하지.”

구건호는 속이 타는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대고 마셨다. 구건호는 훗날을 기약하고 일단 귀국하기로 했다. 김영진 변호사의 휴가기일도 다 끝났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귀국후 다시 조원철한테 연락이 왔다.

“구건호? 일본은 잘 갔다 왔지?”

“응, 잘 갔다 왔다.”

“동창들 모임은 내일 모레 이석호 가게에서 하기로 했어.”

“경리단길 이석호?”

“이석호가 그날 가게 문 닫고 우리한테 홀 빌려준데.”

“그래? 알았다. 나가도록 할게.”

구건호가 경리단길 이석호 가게를 갔을 때 동창들 10여명이 와 있었다. 이들은 벌써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여, 구건호! 몰라보겠다. 이제 사장 틀 난다.”

조원철이 일어났다.

“일본은 잘 갔다 왔냐? 골프 치러 갔었다며?”

“야, 구건호 세월 좋다. 잘 나가는 모양이다. 일본까지 골프나 치러 다니고.”

이석호가 자리를 권했다.

“네 자리 비워 놨다. 강남에서 여기까지 차 많이 밀리지?”

구건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반가량은 넥타이를 메고 절반은 잠바 같은걸 입고 있었다. 넥타이를 멘 사람들은 전부 월급쟁이 같았다.

음식이 나오고 소주를 박스채 갖다 놓았는데 금방 동이 났다. 분위기는 자연히 시끄러워졌다.

“야, 씨발아, 석호야! 너도 술 쳐먹어라. 주인이라고 안 먹는 거냐?‘

“씨발놈아 너나 먹어라!”

“야, 황병철! 너 넥타이 맸다고 폼 잡는 거야? 너희 연구소 찾아갔을 때 내가 존나 자존심 상했다. 뭐? 회의 중이라 못 나온다고? 오늘 너 벌주로 이거 한잔 마셔라.‘

“야, 소주를 맥주잔에 가득 부면 어떻게 하냐?‘

“쳐 먹어 시키야.”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시끄럽고 담배연기 또한 지독했다. 나이 30대 중반이면 점잖을 나이도 되었지만 오래간만에 부담 없는 동창들 끼리 만나서인지 시장통 같았다.

구건호는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원철이 옆에 붙어서 자꾸 마시라고 권해 마시기는 했지만 생각은 딴데 가 있었다. 한남동 비밀요정이나 일본 신주쿠에 있는 조용한 요정이 생각났다. 구건호의 체질은 서서히 귀족화되어가고 있었다.

“혹시, 고3 때 내 앞에 앉았던 문재식은 안보이네.”

구건호는 문재식이란 동창이 갑자기 생각나 앞자리에 있던 친구에게 물었다.

문재식은 할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던 아이였다.

“재식이? 걔 택배 차 몰아. 그 빙신이 내가 하지 말라는 주식은 해가지고 거덜 났잖아. 지금 걔 신불자가 되어서 여기도 못 와.”

“그래?”

구건호는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주식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 그들의 돈을 혹시 훑는 게 아닌지.”

갑자기 이석호가 소리를 질렀다.

“야, 이제 그만 떠들고 내 말 좀 들어봐. 오늘 모임을 주선한 조원철이 한 말씀 한데.”

떠드는 소리가 가라앉았다. 조원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아, 본론만 말해봐!”

“그래서 이제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서로 우정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 유인물을 가져 왔으니 한번 보십시오.”

“친목회 이름을 서향회로 한다? 이게 무슨 말이지?”

“에, 우리가 인천 주안이나 부천이 집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학교도 그쪽에 있고요. 그래서 서쪽에 있던 우리의 추억의 고장을 기리기 위해 서향회라고 했습니다.”

“어째 사양회 같다.”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원철이 유인물을 다 읽었다. 내용은 서향회라는 동창 친목회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친목회 구성은 다 동의했지만 입회비를 3만원으로 할 것인가, 5만원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또 30분간 티격태격하였다. 구건호는 그 돈을 몽땅 다 내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구건호 생각은 어때?“

“난, 다 좋아. 그냥 따를게.”

입회비 다음으로 회장을 뽑는 일도 시간을 끌었다. 모두 돈 많은 구건호를 추천했다. 구건호는 펄쩍 뛰었다. 회장이 되어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직했다.

“조원철이가 이 모임을 발기했으니 조원철이 하는 게 좋겠다. 나는 안한다. 적성에도 안 맞고. 찬조금을 내라면 좀 내겠다.”

구건호는 한사코 거절했고 조원철은 은근히 자기가 회장을 하고 싶어 했다. 은둔형인 구건호와 정치성이 강한 조원철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구건호는 얼른 행동을 보여주었다.

“자, 친목회 회장은 조원철이 되었으니 크게 박수 한번 쳐주자.”

한 두 사람이 박수를 치더니 이윽고 다들 박수를 쳐 주었다. 구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주에 내가 일본에 갔다가 출장비 남은 것이 좀 있습니다. 오늘 모인 것이 뜻 깊은 일인데 2차는 내가 쏘겠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그 유명한 이태원 아닙니까? 이태원까지 와서 목구멍에 때를 좀 벗기고 가야지 그냥 가면 서운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맞아! 맞아! 구건호가 말도 잘한다. 학교 다닐 때는 별로였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다. 구건호 덕에 오늘 나발 좀 불자.”

“가자!”

“가자!”

동창 십여 명이 우르르 떼를 지어 이태원으로 향했다.

구건호는 출근하자마자 김영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변호사? 통화 가능하지?”

“어, 가능해. 참, 지난번 일본 가서 미안했다. 너 돈 많이 썼지?”

“쓰긴, 뭘.”

“신주쿠에 있는 그 요정 엄청 비싸다고 소문난 집이라던데.”

“괜찮아. 내가 재미있게 놀았는데, 뭘.”

“그런데 아침부터 웬 일이야?”

“회계사 좀 찾아보려고. 너의 로펌에 회계사들도 많이 있지?”

“있지.”

“혹시 아는 회계사 있으면 안창 회계법인의 이낙종 회계사를 한번 찾아봐 달라고 전화했어. 아침부터 바쁜데 미안하다.”

“그건 회계사 협회 같은데 가면 금방 찾을 탠데. 네가 거래하는 회계사 사무실에 먼저 물어보지 그러냐?”

“우리 거래하는 회계사 모르게 하려고 그래. 일감 자기 달라고 하면 나중에 귀찮지. 기왕이면 아는 사람 통해서 소개 좀 받으려고.”

“뭘 또 꾸미려고 그래?”

“그런 일이 있어. 자세한건 나중에 알려줄게.”

“알았다. 한번 알아볼게. 회계사가 한둘이 아니라서 금방 알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 김 변호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낙종이라는 사람을 직접 아는 사람은 없고 우리 동료 중에 안창회계법인의 대표를 아는 사람은 있어.”

“그럼 알 수 있겠는데?”

“그 대표한테 물어보니까 이낙종 회계사는 천안에 있는 사람 같다고 하던데?”

“맞아! 그럴 거야!”

“전화번호 적어줄 테니 적어봐. 개인 휴대폰은 아니고 사무실 전화야.”

“그래, 불러봐.”

이낙종 회계사는 물파산업이 거래하는 회계사다.

구건호는 생각에 잠겼다.

“물파산업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냐고 물어봐?”

구건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불쑥 찾아가 물파산업의 속사정을 물으면 안 가르쳐 주겠지. 고객에 대한 비밀은 지켜줘야 하는 게 회계사의 도리일 테니까. 그럼 어떻게 접근할까?”

구건호는 팔짱을 끼고 다시 긴 장고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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