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게이샤 모리에이꼬(森 瑛子) (1) - 유료시작 -
(101)
구건호는 아는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동경 가는 비행기표 2장하고 호텔 예약 좀 해주세요. 호텔은 동경 아카사카에 있는 뉴오타니 호텔입니다. 조식은 호텔에서 먹는 걸로 하고요.”
구건호는 많이 변해 있었다.
이제 구건호는 일을 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모든 것이 열등하여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했고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확실히 서양 속담에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말을 하는 것이란 말이 실감 났다. 구건호는 항상 자신감에 넘쳐났다.
김영진 변호사는 구건호가 특급호텔로 숙소 예약을 해주자 미안한 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구사장? 동경에서 묵는 동안 아무래도 일본어 통역이 있어야 할 것 같아 통역을 수배해 놓았어.”
“그래? 그럼 좋지.”
“동료 변호사 동생인데 동경대 박사과정 학생이야.”
“내가 일당을 좀 주지.”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하네다 공항에서 아카사카 까지는 리무진 버스로 이동하나?”
“아냐, 아미엘이 자기 차 기사를 보내준다고 했어.”
“그래? 그거 고맙군.”
“그럼 내일 인천 공항에서 만나자.”
사구라 꽃이 만개한 4월 구건호와 김영진 변호사는 동경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출찰구에 흰종이에 한자로 김영진 이란 이름을 써서 흔드는 두 사람이 있었다. 김영진 변호사가 이들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한사람은 디욘제펜의 사장 운전기사였고 다른 사람은 동경대 박사과정생 한정록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한정록입니다. 한정률씨 동생입니다.”
“오? 그래요? 형님하고 비슷하고 생겼네. 나 한 변호사하고 같이 있는 동료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이분은 구건호 사장님입니다. 인사하시지요.”
안경을 낀 한정록이란 사람이 구건호에게 90도 각도로 인사했다.
“나, 구건호요.”
구건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이제는 목에 힘을 주는 것도 알았다.
“참, 이분은 디욘사 운전기사입니다. 저도 몰랐는데 여기서 만났습니다.”
50대 아저씨가 생글거리며 인사를 했다. 일본어를 모르는 김영진 변호사와 구건호는 인사말만 하고 그 이후부터는 한정록이 통역을 했다.
하네다 공항에서 아카사카까지 가는 동안 한정록이 신나게 떠들었다.
“뉴오타니 정말 좋은 호텔입니다. 제가 지난 겨울에 한국에서 오신 국회의원 두 분 통역 때 그분들이 거기 묵었었습니다. 호텔 안에 400년된 전통 일본식 정원이 아름다워 유명합니다.”
구건호가 말을 받았다.
“한정록씨는 올해 몇이시오?”
“31살입니다. 동생처럼 생각해 주십시오.”
한정록은 말하면서 고개를 까닥거렸다. 꼭 일본사람 같았다.
호텔에 도착하여 구건호는 한정록을 조용히 불렀다.
“사흘 동안 잘 부탁해요.”
구건호가 한정록에게 100달러짜리 지폐를 손에 쥐어주었다.
“헉! 100달러! 가, 감사합니다.”
한정록은 구건호의 가방을 뺏어 대신 들어주었다. 구건호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허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방대 출신의 공돌이가 출세했네. 이젠 동경대 박사과정 학생이 가방까지 들어주니 말이야.“
구건호는 뒤 따라 오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호텔 로비에서 아미엘을 만났다.
“야, 구건호와 김영진 여기서 만나는 구나!”
셋은 반갑게 악수를 했다. 통역 한정록은 김영진과 아미엘이 유창한 영어로 서로 대화하는걸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이렇게 되니 아미엘은 주로 김영진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구건호는 한정록과 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한정록씨 여긴 식사할 때 어디가 좋아요.”
“밖에 나가면 분위기 있는 술집들 많습니다. 식사는 여기서 하셔도 되고 밖에 나가면 한식당도 있습니다. 한국식 설농탕 집도 있습니다.”
“그래요?”
구건호는 일행들을 호텔 안에 있는 레스토랑 석심정(石心亭)으로 데리고 갔다.
“이곳 철판구이가 좋다고 인터넷에 나와 있으니 식사는 여기서 하고 입가심은 밖으로 나갑시다. 저녁 값은 내가 먼저 쏘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행은 철판구이를 먹었다.
“소문대로 와규(일본 소고기)가 맛있네. 육질이 부드럽고 감칠맛이 있어.”
아미엘이 제안을 하였다.
“이렇게 하자. 내일은 먼저 요코하마에 있는 디욘제팬의 공장을 보러가도록 하자. 구건호 사장도 왔으니 구사장 조언도 좀 듣자.”
“조언이라니? 내가 뭘 알아야지?”
“아니야, 넌 플라스틱 공장 공돌이 했다고 했으니 뭔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없어. 그런 거. 하지만 일단 이곳에 왔으니 공장 구경이나 하고 가야지. 안 그래? 김 변호사.”
“좋지. 난 그런 공장 구경도 못해본 사람인데.”
“그리고 모래는 이치하라시에 있는 요네하라 골프장을 가는 것으로 하지. 어때?”
“좋아, 그렇게 하자. 그리고 사흘 후에 한국 돌아가는 것으로 하자.”
“골프는 진 사람이 한잔 사는 거야. 그것도 거나하게.”
“좋아.”
구건호 일행은 요꼬하마에 있는 디욘제팬 공장을 방문했다. 공장은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땅값이 비싼지 규모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공장 내부는 엄청 깨끗했다. 모두 회색 제복과 모자까지 쓰고 일을 했다. 압출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주택가와 가까워 소리를 죽이려고 애를 썼는데 잘 안되네. 이곳은 소리가 나면 바로 민원이 들어와.”
“그래? 여기 일일 생산량은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판매는?”
구건호는 꼼꼼히 체크하고 메모를 했다.“
김영진은 메모하는 구건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야, 넌 합작공장을 할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적냐?”
“응, 그냥. 알아두면 좋잖아.”
화공약품 배합실에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근무했다. 냄새와 가루 때문인지 김영진과 한정록은 들어오다 말고 멈칫했다. 구건호는 비닐 카바 속에 있는 배합표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아미엘, 나 이 공장 내부 사진 찍어도 될까?”
“사진을? 음... 원래 안 되는데 구사장은 찍어도 돼. 밖으로 유출은 시키지 말고.”
구건호는 압출기에서 팥알 만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촬영했다. 제품은 가전용과 자동차 부품용 등으로 구분하여 색깔별로 나오고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물건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이 원료를 받아다 녹여 그릇이나 부품이나 각종 도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성형을 한다고 표현한다.
“여기 나오는 제품들이 수출은 안한다고?”
“일본 국내에 물건 대기도 벅차.”
“흠...”
구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 온지 둘쨋 날 아미엘은 구건호 일행을 요네하라 골프장으로 안내했다.
셔틀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달려 찾아간 골프장은 40만평이나 되는 구릉지에 있었다.
“야, 좋다.”
골프를 많이 쳤던 김영진 변호사도 감탄했다.
“코스가 시원해 보인다.”
클럽하우스는 서양식으로 예쁘게 지어져 있었다.
“왕지엔이 보면 시반야(西班牙: 서반아)식이라고 하겠네.”
구건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김영진 변호사가 들은 모양이었다.
“시반야? 시반야가 뭐지? 이건 스페인식 건물인데!“
“시반야가 스페인이야. 중국애들은 스페인을 시반야라고 하지.”
“그런가?‘
김영진 변호사가 웃었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음? 한국인데. 회사에 무슨 일 있나?“
전화를 건 사람은 대기업 과장으로 있는 동창 조원철이었다.
“건호냐? 나, 조원철이다.”
“어, 그래, 웬일이냐?”
“혹시 이석호한테 이야기 못 들었냐? 동창들 모임 한번 만들자고.”
“응, 들었어.”
“이 문제 상의 좀 하려고 하는데 너 내일 시간 있냐?”
“내일은 안 돼. 나 지금 일본에 와 있어. 전화 로밍 한 걸 받는 거야.”
“그래? 거긴 무슨 일로 갔는데.”
“아는 사람과 골프 치러 왔어.”
“그으래?”
조원철은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이야기 했다.
“골프 치러 간 사람들이 우리 동창이냐? 우리 동창엔 일본으로 골프 치러갈 만한 사람이 없는데.”
“응, 다른 사람이야.”
“누군데?”
구건호는 뭘 그런 걸 꼬치꼬치 묻는가 싶었다.
“김앤정 로펌 변호사로 있는 친구야. 한사람은 라이먼델 디욘사의 일본 사장이고.”
“김앤정 로펌? 야, 너 세게 나가는구나.“
“모래 귀국하니까 그때 다시 연락하자. 지금 그린에서 팁샷 준비 중이다.”
“그래, 전화 끊을게, 미안하다.”
“저는 야외 골프장엔 처음 와봤어요.”
통역으로 따라온 한정록씨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골프 치는 모습을 보았다.
“흠, 그럼 한정록씨는 내가 얼마나 골프를 못 하는가 잘 봐요.”
“예?”
한정록은 구건호를 보고 웃었다.
골프를 잘 치는 김영진과 아미엘은 계속 버디를 잡고 나갔지만 구건호는 보기를 잡고 나갔다. 구건호는 보기를 잡고 나가지만 그런대로 잘 따라 치고 있었다. 8번 홀에서 벙커에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무난했다. 18홀을 다 돌았다.
“거 참, 생각대로 안 되네.”
“구사장, 어쨌든 졌으니 술 한 잔 사라.”
요네하라 골프장에서 돌아온 아미엘은 구건호 일행을 신주쿠에 있는 요정으로 안내했다.
요정은 정말 고급스러웠다. 마당엔 잘 가꾼 화초의 꽃이 피어 있었고 담장엔 벚꽃이 한창이었다.
아미엘이 구건호에게 장난기 있는 말을 던졌다.
“어이, 구사장. 이 요정은 한국 사람들 웬만해서는 못 오는 데야. 장관들도 잘 못올걸? 굉장히 비싼 집이야.”
“비싸야 얼마나 비싸겠어. 들어가자!”
아미엘이 낄낄대고 웃었다.
“왜 웃어?”
“이 요정은 예약 없이는 무턱대고 오는 데가 아니야. 또 아무 손님이나 안 받아.”
“그런가? 그럼 아미엘 사장이 예약을 이미 했단 말인가?”
“했지. 한국에서 재력가 구건호 사장이란 분이 오신다고 했지. 중국에 합자사도 가지고 있는 거물급 사장이라고 마마상(마담)한테 전화했지.”
이렇게 말하면서 아미엘은 싱글거리고 웃었다.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
유가타를 입은 젊은 여성 둘이 마루에 나와 인사를 했다.
“아미엘상 데스카?(아미엘님이시죠)?”
“하이(네).”
마루에 올라서자 역시 유가타를 입은 중년 여성이 나와 인사를 한다.
“오우, 아미엘상 오래간만이네요.”
“마마상도 잘 계셨소?”
방에 들어서자 깨끗한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가운데 한국의 교자상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일행 4명이 좌정하고 앉았다.
일행은 구건호, 김영진, 아미엘, 그리고 통역 한정록이었다. 한정록은 이런데 처음인지 두리번거렸다. 구건호는 최근에 잘 먹고 잘 지내서 그런지 살이 제법 붙어 있었다. 마마상은 구건호를 금방 알아보았다.
“어머 이분이 큰 사업하신다는 구사마(구선생님)입니까?”
마마상은 방바닥에 두 손을 집고 머리를 조아렸다.
“세가와준꼬(瀨川詢子)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마마상은 김영진에게도 머리 숙여 인사했고 한정록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하였다.
정갈한 일본의 고급 요리들이 나왔다.
어떤 음식은 한국의 생선회와 같아 맛이 있었으나 어느 것은 이상한 향료를 넣었는지 먹기가 어려웠다. 술은 사케 종류인데 부드러웠다.
마마상이 나가고 일본 전통악기인 사미센(三味線)을 들고 30대 여성 두 사람이 들어왔다. 이들은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더니 사미센을 튕기기 시작했다.
사미센 소리를 들으며 일본 음식을 먹으니 색다른 기분이 났다. 구건호는 일본의 옛날 영주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분위기가 서서히 올라갈 무렵 아미엘이 마마상을 다시 불렀다. 아미엘은 마마상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였다.
“준꼬상, 오늘은 특별한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꾜또의 기원(祇園: 교또의 유명한 게이샤 거리를 말함)에서 최고 미녀로 이름을 날렸던 춤추는 게이샤 모리에이꼬(森瑛子)를 불러주시오.”
“호호호, 모리에이꼬가 아무 자리나 온답니까?”
“한국에서 유명한 젊은 재벌이 왔다고 하십시오.”
구건호가 발끈 하였다.
“야, 내가 무슨 재벌이냐?"
이번엔 마마상이 말을 받았다.
“호호호, 재벌 맞네요. 내가 요정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해요. 이래 뵈도 관상을 좀 볼 줄 안답니다. 재벌 맞네요.”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웃었고, 구건호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