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제조업 진출의 꿈 (1)
구건호는 얼굴이 굳어 있다가 바로 미소를 지었다.
“민혁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아니야, 넌 좀 다른 데가 있어. 동창들의 우상이 되고 있어.”
“사진이나 같이 찍자. 마침 자전거 타고 가는 학생이 저기 있다.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하자.”
구건호와 김민혁 두 사람은 양징호 호수를 배경으로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다.
구건호는 동사회도 끝나 그대로 귀국할까 하다가 왕지엔 교수를 만나보기로 하였다. 오래 간만에 왕교수를 만나 술 한잔 하고 싶었다. 전화를 했다.
“구건호? 지금 중국이냐? 어디냐? 곤산시냐?”
“동사회가 있어 곤산시에 와 있어. 회의가 끝나 귀국할까 하다가 네 생각이 나서 항주 절강대로 갈까 한다.”
“그래? 어서 와! 보고 싶다.”
구건호는 항주시로 가기 위해 상해 터미널에서 김민혁과 작별 인사를 했다.
“동사회 때 네 월급 못 올려 미안하다.”
“됐어. 여기 월급 5천 위안이면 충분해. 나만 올릴 수 있나? 종업원 전체가 올라가야지.”
“이거 필요할 때 써라. 총경리 하면 돈 들어갈 때도 많을 거야.”
구건호는 1,000달러가 든 흰 봉투 하나를 김민혁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아, 이러면 안 돼!”
김민혁은 봉투를 다시 꺼내 구건호에게 돌려주었다. 구건호는 고속버스에 올라타면서 김민혁에게 봉투를 다시 던졌다.
“잘 있어! 또 보자!”
“아니, 저, 저.”
김민혁이 땅에 떨어진 봉투를 집어 드는 순간 항주행 고속버스는 천천히 승강장을 빠져 나갔다. 구건호는 봉투를 들고 멍하니 서있는 김민혁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동안 몸이 많이 홀쭉해졌구나. 조금만 참아라. 너도 좋은 날이 곧 돌아올 것이다.”
항주시에 도착한 구건호가 왕지엔 교수에게 전화를 했지만 신호만 갈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업중인 모양이지?”
구건호가 전화를 끊고 서호 주변을 돌고 있을 때 왕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벌써 왔나? 나 지금 MBA 과정생 특강이 있어. 한 시간 후에 끝나니 망호(望湖) 호텔 로비에서 기다려라.”
구건호는 망호 호텔로 들어갈까 하다가 호수 주변을 더 돌았다.
호수 주변에서 삼각형 밀짚모자를 쓴 농부가 연밥을 팔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연밥이었다.
“그거 한 봉지 얼마요?”
“량콰이(2원)입니다.”
구건호는 연밥을 한 알씩 먹으며 망호 호텔로 들어갔다.
망호 호텔 로비에 나타난 왕교수는 수업 때문이었는지 커다란 서류 가방을 들고 왔다.
“구건호, 반갑다!”
“만났으니 또 마셔야지.”
“암, 술 좋고 친구 좋은 강남 지방인데.”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그동안 왕교수가 개발해 놓았다는 풍해찬청(豊海餐廳)이라는 식당으로 갔다.
“여기 진난춘(술 이름) 한병!”
둘은 신나게 떠들면서 마셨다.
"김영진 변호사도 잘 있지? 좋은 친구지. 그 녀석 요즘 라이먼델 디욘사의 합자 주선 일 보러 다닌다고 하던데?“
“응, 라이먼델 디욘사의 동경사장은 나도 만나 보았어. 아직 구체적으로 계약을 맺은 건 없는 모양이야.”
“합자 하는데 지나치게 서로 따지면 잘 안되지. 이를테면 결혼도 합자인데 서로 상대방을 이해해야지 따지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어디 그런가? 돈이 걸린 문제인데.”
“나는 디욘사 사장 아미엘에게 중국과 합자하자고 권했었지. 그런데 아미엘이 싫다고 하더군.중국은 콤파운드 배합 기술력이 떨어지고 약품이나 금형기술도 신뢰할 수 없다고 하더군.”
“중국도 세계적 기업이 많은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안하길 잘했어.”
“왜?”
“중국은 기술이나 자원 문제가 아닌 사업하는 사람들의 도덕성이 문제야.”
“중국도 훌륭한 기업인이 많잖아?”
“물론 있지. 하지만 부도덕한 사람이 일본이나 한국보다 많다는데 문제지. 창피한 이야기지만 중국은 계란까지도 가짜를 만들어 내는 나라네. 부도덕한 안료업자가 판 재료를 콤파운드용으로 사용했다면 어떻게 되겠어? 더구나 수출품도 많을 텐데.‘
“흠.”
“그래서 아미엘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생각을 바꾸긴 했지. 난 구건호 너같은 사람이 부동산 임대업이 아닌 제조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조는 고용 효과가 큰 사업이라 국가에 공헌하는 게 많지.‘
“아휴, 내가 실력이 있나, 돈이 있나. 수분지족(守分之足)하고 살아야지.”
왕지엔 교수는 진난춘 한 병을 더 시켰다.
“구사장, 제조를 한번 해 봐라. 제조가 꼭 사양사업은 아니다. 요즘 너도 나도 IT사업이나 연애사업, 게임사업 찾지만 국가의 기간산업은 역시 제조야.”
“아무튼 네 말 잘 알았다. 기회가 있다면 한번 고민해 보겠다.”
“참, 리스캉은 이번에 성과를 많이 올려 상해로 다시 복귀할 가능성이 많아졌다.”
“오면 뭘로 오는데?”
“현급(縣級)의 작은 도시 부시장이지만 상해로 가면 국장급이 될 거다. 상해 정도의 국장급이면 대단히 승진해서 가는 거야.”
“그럴 테지. 상해시 인구 1천만이 넘을 테니까.‘
이날 술을 많이 마신 왕지엔과 구건호는 2차로 가라오케까지 갔다.
나비넥타이를 멘 지배인이 생글거리며 왕지엔과 구건호를 맞이했다.
가라오케 안은 놀랍게도 팔등신 미녀들이 우글거렸다.
“아니, 지배인. 웬 미인들이 이렇게 많아?‘
“화장품 회사 주최로 모델 대회가 있습니다. 다른 성(省)에서 온 참가자들이 여기 돈 벌러 온 것입니다.”
“모델대회 참가자들이 알바를 위해 여기로 왔단 말이요?‘
“그렇습니다. 여긴 외국인 손님들도 자주 오는 고급 가라오케로 소문이나 여기로 몰려온 것입니다. 학생들도 많습니다. 한번 골라 보시지요.”
“엥이!”
왕교수는 혀를 끌끌 찼다.
“구사장 우리 나가세.”
“왜? 난, 여기가 좋은데.”
“여긴 아무래도 보는 눈들이 많아 안 되겠다. 조용한데로 가자.”
왕교수가 큰 가방을 들고 성큼 성큼 밖으로 나왔다. 구건호는 조금 아쉬웠다.
왕교수는 서호변의 2층 맥주집으로 구건호를 데리고 갔다. 2층에서 서호의 밤거리를 내려다 보며 마시는 맥주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이날 늦은 밤까지 왕지엔 교수는 경영 이론을 떠들었고 구건호는 경영 실무를 떠들었다.
왕지엔 교수는 역시 경영에 대하여 해박했다.
학창시절 절강성 수재 소리를 들었고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그곳에서 교수 생활까지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너는 경영이론에 대하여 아는 게 많구나. 가끔 나를 놀라게 하기도 해.”
“이론뿐이지 실무는 역시 네가 탁월하지. 돈 버는 재주도 탁월하고.”
“그런데 가지고 다니는 가방은 왜 이리 큰가? 머리에 담아 놓은 것도 모자라 자료를 들고 다니나?
“하하, 이건 자료는 아니고 오늘 MBA과정생 특강 때 설문서 받아본 거야.”
“무슨 특강인데?”
“그냥 사례 연습이지 뭐. 나는 오늘 강의는 하나도 안했어. 분임토의만 시켰어. 의외로 학생들이 재미있어 하던데? 나도 배운 것도 있고.”
“무슨 사례인데?”
“사례 1은 마케팅 표적시장(Target Marketing) 관리야. 문제를 하나 냈었지.”
“무슨 문젠데?”
“5명의 여자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는 문제지. 5명의 여자는 한명은 여성 대통령이고, 한명은 노벨상 수상을 한 과학자고, 한명은 재벌이고, 한명은 머리는 나쁘지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인기 여배우고, 한명은 세계적 존경을 받는 여성 종교 지도자야.”
“흠.”
“조종사는 4명을 비행기 밖으로 던져야 비행기가 가벼워져 무사히 착륙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중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할 여자를 고르라는 것이었지.”
“흠, 그게 누군가?”
“알고 싶은가? 이건 내가 미국에서도 강의했던 문제네.”
“흠.”
“답은 없어. 나이에 따라 답이 일정한 패턴을 보이고 있지. 나이어린 학생들은 여배우를 제일 먼저 쫓아내고 과학자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집단일수록 여배우가 살아날 확률이 많아진다네.”
“그으래?”
“나이 많은 집단은 여배우를 살리는 것이 종존 보존이라고 하더군.”
“아니, 머리도 나쁘다면서 무슨 종족 보존이야? 그 여자와 결혼하면 머리 나쁜 자식을 낳을 텐데.”
“그게 상식적이지. 하지만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들은 머리 나쁜 사람들한테도 세월이 가다보면 머리 좋은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이게 마케팅하고 무슨 관계인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상품광고를 때릴 때 역사의식도 없는 무뇌아 여성을 모델로 쓰면 어떻게 될까? 효과가 팍 떨어지겠지?”
“흠.”
“또 하나의 사례는 뭔지 아는가?”
“뭔데? 그것도 궁금하군.”
“부(富)의 형성과정 사례야.”
“흠.”
“가난한 따공(打工: 공돌이) 출신이 호설암(胡雪巖: 중국 전설의 최고 부자)과 같은 부자가 되고 싶었지.”
“공돌이가 무슨 재주로 거부가 되나?”
“그 공돌이가 약종상 회사에 들어가 회사 돈을 빼내 오를만한 약재를 몰래 사서 돈을 벌었지.”
“공금 유용을 했단 말인가?”
“그렇지.”
“그 공돌이는 회사 돈을 즉시 채워 놓고 한 밑천 챙겨 가지고 날랐지. 회사에 금전적 손실을 끼친 건 없지. 공돌이는 그 종자돈을 이용하여 시장골목에서 장사를 했어. 공돌이는 장사와 동시에 여러 곳에 투자하여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네.”
“흠.”
“분임토의의 핵심 주제는 이 공돌이의 공금 유용을 어떻게 처리하나 하는 문제였지.”
구건호는 술이 확 깨었다. 꼭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들렸다.
구건호는 앞에 있는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 그래.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이것도 나이에 따라 처벌 수위가 달라. 청소년은 인성이 나쁜 공돌이니 무조건 관아에 고발해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고, 나이가 많을수록 약종상 회사에 손해 끼친 것 없으니 용서해 주자는 확률이 많지.”
“용서를 해?”
“그냥 용서는 아니고 쫓아내고 마무리 짓자는 쪽이 많더군. 재주 없는 따공이 기적이 없는 한 금생에서는 부자가 결코 될 수 없다는 논리지.”
“흠.”
“물론 친고죄(親告罪)라 약종상의 고발이 없는 한 처벌할 수는 없지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야.”
“흠.”
“참, 이런 문제를 내다보면 나도 착잡해. 중국은 부의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어. 한국은 그래도 발달국가라 기회가 많다는 소리를 들었네. 나는 한국이 부럽네.”
구건호는 말없이 술만 마셨다.
“아, 이 사람아, 왠 술을 그렇게 마시나? 그만 마시게. 큰일 나겠네.”
“한 병 더하자. 빌어먹을 놈의 세상!”
“허허, 이거 안 되겠군. 숙소로 가자. 몇 호실이라고 했지?.”
왕교수는 흐느적거리는 구건호의 몸을 부축하고 호텔 객실로 올라갔다.
구건호는 중국에서 돌아와 피곤했다.
안마방엘 가서 서비스를 받았다.
“두 시간 가까이 찜질하고 서비스 받으니 몸이 풀리는 것 같네. 역시 여행은 피곤해.”
구건호는 사무실에 들어와 증권사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힉! 구사장님, 저한테 전화를 주시고 웬일이십니까?”
“점심이나 같이 하시지요.”
“아이고,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