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글로벌 기업 라이먼델 디욘사(社) (2)
김민혁의 전화가 끝나자 바로 와이에스테크의 박영식 사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구사장? 나네.”
“아, 예. 접니다. 사장님.”
“지난번에 빌려준 2억원에 대한 월 이자 117만원을 자네 통장에 입금 시켰네. 그 돈 덕분에 지금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네.”
”다행입니다.”
“완전히 단비가 되어 타는 콩밭이 살아났네.”
“별 말씀을요. 물파산업은 법정관리 신청했나요?”
“준비작업 중이야. 지금 중소기업진흥공단 자금이 들어와 회계사 사무실에 의뢰해서 신청서를 꾸미고 있다고 하는군.”
“혹시 물파산업이 거래하던 회계사 이름을 알 수 있나요? 물파산업 결산서 가지고 계시면 거기에 나올 겁니다.”
“가만 있어봐. 전화 끊지 말고 있어봐.”
“예.”
박영식 사장은 책장에서 결산서를 꺼내어 보고 회계사 이름을 알려주었다.
“안창 회계법인 이낙종 회계산데?”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왜 알려달라고 하는 거지?”
“아, 예. 제가 잘 알고 있는 사채업 하시는 회장님이 계셔서요. 젊었을 때 명동 사채시장에서 돈을 버신 분입니다. 혹시 물파산업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까 해서요.”
“음, 그래? 알겠네.”
전화를 끊고 구건호는 이낙종이라는 이름을 다시 새겨 보았다.
“이낙종이라... 이 친구를 한번 만나봐야겠군.”
구건호는 금융감독원 다트에서 뽑은 물파산업의 재무제표와 유료사이트에서 뽑은 기업정보 현황표를 들고 청담동 이회장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이분 같으면 무언가 조언을 해줄 거야. 그런데 늘 필요할 때만 찾아서 안 되겠다. 선물이라도 사가지고 가자.”
구건호는 양주나 한 병 사가지고 갈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이회장은 술을 잘 안마셨다.
“그렇다면 뭘 사지? 있을 건 다 있으신 분이니까 안사가도 되겠지. 하지만 예의상 사가지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구건호는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대봉감이 생각났다.
“보약보다는 즉석에서 먹는 대봉 곶감이 좋겠다. 노인이니 연한 것이 좋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반연시 대봉감이면 딱 어울리겠다.”
구건호는 백화점에서 산 10만원짜리 대봉 곶감을 들고 청담동 이회장 빌딩엘 갔다.
“이 빌딩 위치는 노른자위 땅이야. 나는 언제 이런 건물을 사나?”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계시지요?”
“아 예, 혹시 구건호 사장님 아니세요?”
비서의 기억력이 대단했다. 전에 한번 딱 왔었는데 구건호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힉!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
구건호는 대봉 곶감만 사가지고 올 것이 아니라 여비서에게 케이크라도 한 상자 사다줄걸 그랬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비서가 회장실에 들어가 구건호 사장님이 오셨다고 보고했다.
“구사장이? 들어오시라고 해.”
구건호가 들어가 90도 각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길 왔나?”
“자주 찾아뵙질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은 얼마나 바쁜지 낚시터도 잘 안 오데? 그런데 손에 든 건 뭔가?”
“오다가 대봉 곶감이 먹음직스러워 한 상자 가지고 왔습니다.”
“어디 이리 줘 봐요.”
이회장이 직접 황금색 보자기에 싸인 상자를 풀었다.
“반연시구만. 먹음직스러운데?”
이회장은 상자를 열더니 곶감하나를 꺼내 먹었다.
“좋군, 옛날 고향 맛이야. 자네도 하나 먹어봐.”
“예.”
구건호가 하나를 꺼내 먹으려는데 이회장이 비서를 불렀다.
“박양, 박양!”
“예,”
비서가 황급히 들어왔다.
“이 곶감 몇 개 집어가!”
“예? 아 예. 고맙습니다.”
이회장은 물까지 마시고 나서 다시 구건호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사업은 잘 되시나? 얼굴 보니 잘 되는 모양이군.”
“예, 그럭저럭 하고 있습니다.”
“하기사 자네가 하는 임대업은 바람 탈 일도 별로 없겠지. 중국에 합자사를 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거기는 어떤가?”
“거기도 그럭저럭 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그럭저럭도 괜찮은 거야. 기업은 현상유지만 해도 성공한 거네.”
“예? 아, 그렇습니까?”
구건호는 잠시 뜸을 들이고 있다가 대봉투에서 물파산업 관련 서류를 꺼냈다.
“그게 뭔가?”
“실은 회장님께 자문 좀 받을까 해서 왔습니다.”
“싫네. 자문 안하겠네.”
“예?”
“자네는 언제 나한테 자문료를 주었던가?”
“예?”
“하하, 농담이네. 오늘은 대봉 곶감 가져왔으니 그걸로 퉁 치세. 그래 할 말이 뭔가?”
“실은 아산에 물파산업이란 회사가 있습니다. 이걸 보십시오. 대차대조표에 보시는 바와 같이 재작년에 년간 700억 정도 매출을 올렸는데 작년부터 500억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음.”
“종업원은 한때는 400명이었는데 지금은 250명 정도랍니다. 이 회사가 법정관리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이 회사를 사고 싶은가?”
“예, 저는 원래 공돌이 출신이라 공장을 꼭 운영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 희망은 신앙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해외투자자산 100억이 뭔가?”
“거기 회장님 아드님이 중국에 공장을 세웠답니다.”
“연결 재무제표 반영이 안 된걸 보니 망한 모양이군.”
“그런 모양입니다.”
“이 거덜 난 회사를 사서 어쩌겠다는 건가?”
“한번 제대로 운영해 보고 싶습니다.”
“자네는 나 같은 사채업자 출신이 아니고 공돌이 출신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여기 회장은 기업을 팔 가요?”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그동안 채권자들한테 시달렸다면 지긋지긋 하겠지.”
“누군가 M&A를 하겠다면 얼마를 달라고 할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 회사 회장이 아니니까. 그런데 말이야. 이 기업을 젊었을 때부터 운영해 오던 사람 같으면 자식 같은 기업이라는 애착을 가지고 있어 공중분해 될 때까지 안 팔수 있어. 그게 우리와 같은 사채업자와 마인드가 틀린 거지.“
“그러면 많이 부르겠네요.”
“판다면 노후에 편히 살아갈 수 있는 돈은 달라겠지.”
“그럼 얼마나 될 까요?”
“노후에 편하게 살아가려면 얼마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나?”
“한 30억?”
이회장은 말이 없다.
“그럼 50억?”
이회장은 그래도 말이 없다.
이회장의 답은 이랬다.
“그건 나도 모르네. 부닥쳐보기 전에는.”
“50억 주면 될 것 같네요.”
“자네 지금 돈이 얼마 있나?”
구건호는 주식 가지고 있는 평가액이 300억 정도 되므로 300억을 말할까 하다가 100억 정도로 답했다.
“100억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50억은 충분히 살 수 있겠다 그거구먼.”
“그렇습니다.”
“쯧쯧쯧.”
구건호는 이회장의 혀를 차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50억으로 인수한다 치자. 그 다음은?”
“부채는 벌면서 차츰 갚아나가면 안될까요?”
“채권자는 부처가 아닐세. 채권자는 악다구니를 쓰면서 한꺼번에 몰려드네.”
“그럴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채권자도 사람인데 완급을 조정하면 안 될까요?”
“채권자는 탐욕적이네. 자기 것을 우선 달라고 몰려들지. 재무제표에 있는 이 회사의 매출채권 은 모두 허위임은 자네도 경리출신이니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이 회사의 외상매입금과 미지급금은 500억이 넘네. 자산매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회사네. 자네에게 500억이 넘는 재산이 있다면 해보시게.”
“휴.”
“또 말일세. 부채는 여기 재무제표에 반영 안 되어 있는 숨겨진 것도 있을 수 있네.”
“언제 또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해외 투자자산은 정리하면 건질 수 있는 것이 다만 얼마라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없네. 이 회사는 해외투자자산도 100억이 있지만 건질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면 틀림없네. 공장 증설 비용일 텐데 투자당시 기계류는 1억 짜리가 지금은 고물로 되었을 걸세.”
구건호는 이회장의 말이 자기가 걱정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은 자네 생각도 나와 같을 걸세. 단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겠지?”
“휴, 그렇습니다.”
“어때? 대봉 곶감 먹은 값은 했나?”
“하하, 충분하십니다.”
구건호와 이회장은 서로 웃고 말았다.
구건호가 자리에 일어서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회장은 돌아서는 구건호의 등에 대고 말을 했다.
“문제는 채권자들의 종류와 채권의 성질, 채권자들이 소송을 건 법원의 지급명령 등을 잘 관찰해보면 답은 나올 수도 있네. 범을 잡으려면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야지.”
“좋은 말씀 잘 알겠습니다.”
구건호는 이회장의 빌딩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자기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라.”
이회장의 말을 다시 한 번 새겨 보았다.
경리단길 이석호의 결혼식이 내일로 다가왔다.
구건호는 정지영씨에게 축의금 봉투 두 개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10만원씩 봉투에 담아요. 하나는 내 이름으로 하고, 하나는 중국에 있는 김민혁 사장 이름으로 하세요.”
“알겠습니다. 글씨는 붓펜 글씨를 강부장님이 잘 쓰시니 강부장님께 부탁할게요. 강부장님 고시텔 순회 점검 나갔으니 곧 돌아오십니다.”
“그렇게 하세요.”
“사장님, 그리고 청첩장 온 것 있으면 절 주세요. 카피하고 돌려드릴게요.”
청첩장은 복사해 출금전표 뒤에 붙이면 법인에서 비용 정리가 가능했다.
“알겠어요. 집에 있는데 내일 가지고 나오지요.”
구건호는 몇 년 전 동창 조원철의 결혼식 때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는 축의금이 없어서 고민했었지. 이번 결혼식엔 동창들이 많이 오겠군. 이석호나 조원철이나 이 녀석들은 중산층 출신들이라 학교 때 잘 나갔었지. 물론 두 녀석 모두 나보다 공부도 잘했으니까. 버스 운전기사의 아들인 김민혁이나 인천 공단 용역회사의 노동자 아들인 나는 존재감도 없었지.]
구건호는 자기 이름으로 결혼식장에 화환도 보내줄까 생각했다.
[화환을 보내? 그건 나의 한풀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했다가 구건호는 화환을 보내주기로 하였다. 친구들에게 돈 좀 벌었다고 알려졌는데 달랑 10만원만 보내면 욕을 먹을 것 같았다. 또 이석호는 조직생활을 안하고 자영업을 하고 있으니 화환도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구건호는 다시 정지영씨를 불렀다.‘
“우리 거래하는 꽃집 있지요?”
“네, 있습니다.”
“결혼식 축하 화한 두 개만 보내주세요.”
“보내는 분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
“하나는 주식회사 지에이치개발 대표이사 구건호로 하고, 또 하나는 중국 금계산업공단 유한공사 총경리 김민혁으로 해 주세요.”
“예? 금계 산업 뭐라고요?”
정지영씨는 구건호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구건호는 즉시 메모지에 써 주었다.
“이렇게 보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결혼식 날 구건호는 헤어샵을 다녀오고 새 옷을 입었다.
“어머, 사장님 새 신랑 같아요.”
구건호가 웃었다.
“이 넥타이가 지난번 강부장님이 사다준 것입니다.”
“잘 어울리네요. 고급스럽고.”
이석호의 결혼식장에는 동창들이 많이 왔다. 얼굴을 잘 몰라보게 변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구건호 아니야? 반갑다. 지금 큰 사업한다지? 명함 하나 줘라.”
“어이, 구건호? 얼굴 좋다. 역시 얼굴에 기름기가 돈다.”
구건호는 동창들과 대충 인사를 나눈 후 신랑 앞으로 갔다.
“축하한다.”
“고맙다. 화환까지 보내줬더구나. 우리 엄마야.”
이석호는 옆에 선 엄마를 소개시켜주었다.
“이 친구가 구건호예요.”
“오, 이 친구가 바로 큰 사업한다는 친구구먼, 고마워요.”
구건호는 식장을 돌아보았다. 화환이 네 개가 있었는데 두 개가 구건호가 보내준 것이었다. 구건호의 이름과 중국에 간 김민혁의 이름으로 당당히 서 있었다.
친구들이 다시 구건호 옆으로 몰려왔다.
“건호야, 김민혁이 너하고 같이 있다며?”
“응, 중국 합자사에 있어.”
동창들이 화환을 보고 말했다.
“금계산업단지 유한공사 총경리 김민혁? 총경리는 사장 아니냐?”
“맞아. 합자사 사장하고 있어. 초창기라 지금은 고생하고 있어.”
“그래? 나 너희회사 뭐 납품할 것 없냐?”
“하하 우린 부동산 임대업이야.”
“너희 회사 놀러가도 되지?”
“하하, 자리에 없을 때가 많아. 직원 두 명 있는 회사라 오면 앉을 자리도 없어.”
대기업에 다니는 조원철이가 와서 명함을 달라고 하였다. 조원철도 자기 명함을 주었다. 조원철은 과장이 되어 있었다.
“과장 되었구나. 축하한다.”
“너 돈 잘 번다며?”
“대기업이 더 낫지. 연봉이 많잖아. 사업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야 돼.”
“우리 자주 만나자.”
구건호는 세상 참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전 같으면 상대도 안 해 주었을 조원철의 입에서 자주 만나자는 말이 나오니 정말 변화를 실감했다.
“나는 지금 목동 살아. 너는 지금 어디서 사니?”
“도곡동에 살아. 강남구 도곡동.”
“거기도 오피스텔 있나?”
“아파트 하나 샀어.”
“무슨 아파튼데?”
“타워팰리스에 살아. 1차 아파트야.”
“그으래?”
조원철의 표정이 약간 샐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