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글로벌 기업 라이먼델 디욘사(社) (1)
수요일이 되었다.
구건호는 아미엘이 묵고 있는 강남 고속터미널 옆의 팔레스 호텔로 갔다. 김영진 변호사가 벌써 와 로비에 앉아 있었다.
“차를 두 대씩 가지고 갈 필요가 있겠어? 내 차로 가자.”
“그럴까?”
“아미엘은?”
“아직 안 내려 왔어.”
“평택의 무슨 회사야?”
“이지노팩이라는 회산데? 들어봤어?”
“들어봤지. 꽤 큰 회사인데. 코스닥 상장회사이기도 하고.”
“종업원이 3천명이라는데?”
“아마 그 정도 될 거야.”
아미엘 사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구건호를 보고 손을 번쩍 들었다.
“오우, 미스터 구건호, 하우 아 유!”
구건호는 랜드로버에 아미엘 사장과 김영진 변호사를 태우고 평택시 진위면에 있는 주식회사 이지노팩을 찾아갔다.
정문에서 경비원이 제지를 했다.
“사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어디서온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라이먼델 디욘사의 일본사장이라고 전해주십시오.”
경비가 급히 구내전화를 했다.
“들어오시랍니다. 차량은 앞쪽에 대시고 현관을 통해 2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공장 안에 오고가는 직원들은 큰 회사답게 절도가 있었고 공장은 티끝 하나 없이 청결했다. 건물 앞의 소나무와 향나무 등의 조경도 잘 되어 있었다.
“아, 나도 이런 공장을 갖고 싶다! 종업원 3천명에 매출 1조원이 넘는 이런 회사를 갖고 싶다!”
구건호는 이런 결심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구건호가 차를 주차시키고 건물 현관으로 갔다. 50대의 간부인 듯한 사람이 현관에 마중을 나왔다.
“이곳 영업이사입니다. 아미엘 사장님이시지요? 연락 받았습니다. 사장님 실로 모시겠습니다.”
현관에는 이 회사의 제품인 듯한 완제품 부품들이 조명을 받아가며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는 세련된 디자이너의 솜씨로 보였다.
영업이사가 2층으로 안내했다. 사장실은 넓었다. 초록색 카페트가 깔려 있었고 20대의 젊은 여비서가 정장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여비서는 아미엘 일행이 들어서자 벌떡 일어났다.
“아 유 미스터 아미엘 바이 에니 첸스?(혹시 아미엘씨 아니신가요?)”
여비서는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여비서가 아미엘 일행을 사장실로 안내했다.
사장실은 넓었다. 회의용 탁자의 정 중앙에 앉아있던 사장이 일어났다. 두꺼비처럼 생긴 60대의 뚱뚱한 사람이었다.
“어서 오시오. 아미엘 사장.”
아미엘이 사장 앞으로 가더니 반갑게 악수를 했다.
“같이 오신 분들도 자리에 앉읍시다.”
모두 자리에 앉자 사장이 자게가 박힌 함 속에서 명함을 꺼내 한 장씩 주었다. 아미엘도 사장에게 명함을 주고 김영진 변호사도 명함을 주었다. 사장은 김변호사의 명함을 받자 돋보기를 꺼내더니 읽어 보았다.
“오, 김앤정 로펌에 계신 분이구만. 아직 시작도 안 해 법률자문을 받을 필요는 없는데?”
자동차 타이어처럼 큰 얼굴에 작은 눈을 가진 사장은 웃으며 김영진에게 말했다.
“오늘은 통역 겸 해서 왔습니다.”
구건호도 명함을 꺼냈다. 명함을 주기가 어쩐지 좀 창피했다. 그래도 왔으니 할 수없이 자기 명함을 주었다. 사장은 또 돋보기를 꺼내더니 구건호의 명함을 읽어보았다.
“지에이치개발의 구건호 사장?”
“네, 그렇습니다.”
“지에이치가 무슨 뜻이오?”
구건호는 말문이 막혔다. 자기 이름자의 이니셜이라고 말하기가 쑥스러웠다. 구건호가 주저하자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름자 이니셜인 모양이구먼. 요즘 이렇게들 하는 사람이 많지. 부동산 개발회사요?”
“개발보다는 임대를 하고 있습니다.”
사장은 구건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다니엘에게 말했다.
“지난달 미국에 가서 라이먼델 디욘사의 라인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과연 세계적 기업이라 굉장하더군요. 연구소도 훌륭하고 실험 장비도 대단하더군요.”
김영진 변호사가 즉석에서 사장의 말을 아미엘에게 통역해 주었다. 아미엘이 눈을 깜박이며 듣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들어오면서 보니까 여기 이지노팩도 대단합니다. 공장이 아주 청결해 보였습니다.”
김영진 변호사가 또 통역을 해 주었다.
“우리 공장은 3정 5S 활동을 하는데 잘들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먼.”
김변호사가 구건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사장, 3정 5S가 뭐야?”
“3정은 정위치, 정품, 정량을 말하고 5S는 정리, 정돈, 청소, 청결, 습관화를 말해. 나도 공장 다닐 때 이 운동 많이 했었어.”
“그래? 그런 게 있었구나.”
여비서가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여비서는 상냥한 웃음을 띠며 찻잔을 돌렸다. 찻잔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자, 들면서 이야기 합시다. 참 오비서도 나가지 말고 여기 앉게.”
비서가 주저하더니 조심스럽게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았다.
“우리 오비서도 중고등 학교와 대학교를 미국에서 다녔어요. 영어를 잘 하니 아미엘 선생과 잘 통할 거요.”
“아, 그러십니까?”
김영진 변호사가 오비서에게 명함을 주었다. 오비서가 김변호사의 명함을 쳐다보았다. 구건호는 자기 명함을 주지 않았다.
사장은 차를 한잔 마시더니 천천히 이야기 했다.
“라이먼델 디욘의 일본 합자사는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정서 문제도 있고 일본의 경제 사정에 비추어 인건비 코스트가 높습니다. 한국 합자사를 만든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오비서가 통역 해봐.”
오비서가 은방울 굴러가는 목소리로 유창하게 통역했다. 아미엘과 김영진 변호사가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미국사람하고 똑 같네요. 발음이 말입니다.”
김영진 변호사가 감탄한 듯 말했다.
아미엘이 말했다.
“한국 이지노팩의 기술력은 우리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과 직접 합자를 안 하는 이유는 중국의 기술력이 아직은 일본과 한국을 못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시장에서 구입해야 하는 콤파운드용 안료(顔料)의 질도 떨어져 그렇습니다.”
아미엘의 말은 김변호사가 통역했다.
사장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장은 노련해 보였다.
“공장 부지 구입과 콤파운드를 위한 압출기는 우리가 깔아드립니다. 라이먼델 디욘사는 기술만 가지고 들어오면 됩니다. 중국시장 마케팅도 중국에 나가있는 우리 자회사가 다 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사장은 의자를 앞당기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합자는 51:49로 합니다. 우리가 51, 라이먼델 디욘이 49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영권 방어를 위함입니다. 또 합작기간이 끝나면 기술 양도 조건입니다.”
아미엘은 심각하게 듣고 있더니 이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사장님 말씀은 잘 경청했습니다. 합작의 조건은 제가 판단을 내리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미국 본사와 협의를 하겠습니다. 오늘 사장님과의 시간이 유익했습니다.”
사장은 영업이사를 불렀다.
“자네가 일본서 오신 라이먼델 디욘의 일본사장님께 우리 연구소와 생산라인을 보시고 가게끔 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구건호 일행은 이지노팩의 연구소를 방문했다. 연구소장이 흰 가운을 입고 나왔다.
“우리 연구소는 공학 박사학위를 가진 연구원이 100명이 넘습니다.”
구건호는 이 회사의 인재 규모에 놀랐고 고가의 실험 장비들에 놀랐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고시텔이나 몇 개 가지고 있고 주식 조금 가지고 있는 올챙이에 지나지 않아.”
구건호는 의기소침해졌다. 매출 1조원이 넘는다는 이지노팩 사장의 두꺼비 같은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김영진 변호사의 제안으로 아미엘과 구건호는 골프를 치러가기로 했다.
“머리 얹어주는 날 비기너는 술 사줘야 돼.”
“사지!”
“그런데 넌 근무 중에 골프 쳐도 돼? 주말도 아닌데.”
“이게 근무야. 비즈니스잖아?”
“그런가. 라이먼델 디욘사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있지. 다국적 기업 디욘사의 해외 합자사 성립시 우리 로펌은 수수료를 받게 되어있어.”
“흠, 그런 게 있구나. 그럼 오늘 네 비즈니스에 동참하지.”
“덕분에 너도 머리 얹고.”
김변호사는 초심자가 끼일 경우 36홀을 도는 것은 무리라며 18홀을 돌기로 했다.
안성에 있는 파인크리크 골프장이 18홀과 퍼블릭 코스도 있다고 하여 안성으로 갔다. 날씨도 화창했다.
“야, 좋다.”
넓은 그린은 구건호의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원더플.”
아미엘도 좋아했다.
“자, 쳐봐!”
구건호는 긴장되었다. 우드1번 드라이버를 들고 어드레스 자세를 취했다.
“딱!”
1번티부터 구건호의 공은 언플레이볼이 되었다.
구건호는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얼굴까지 빨개졌다.
“이 힘든 운동을 왜 할까. 시팔, 골프채 집어던지고 집에 가고 싶다.”
구건호는 엉망진창으로 경기를 하였다.
“임팩트 할 때 고개 들지 말고 해. 체중은 왼발에 힘을 싣고!”
구건호의 실력은 하프라운드를 지나면서부터 나아지기 시작했다.
“잘 하는데?”
주위사람들이 박수까지 쳐주자 구건호는 힘이 솟았다.
“의외로 재미있는데?”
구건호는 서서히 골프에 자신감을 갖고 재미까지 느끼게 되었다. 트리플 보기나 더블 보기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흠, 그래서 사람들이 골프를 치는구나!”
이날 골프는 전부 김영진 변호사의 코치로 이루어진 경기였지만 구건호는 기분이 좋았다.
“축하한다. 머리 얹은걸.”
“내가 친 것이 아니고 네가 친 것 같다.”
구건호는 경기가 끝나고 김변호사와 아미엘을 평택에 있는 갈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엉터리집이라고 상호가 붙은 한우 갈비 집이었다.
“유명한 갈비집이야. 마음껏 먹어.”
아미엘도 고기 맛이 좋은지 엄지를 들어올리며 “테이스트 굿”을 연발했다.
아미엘이 귀국하는 날 배웅을 위해 구건호는 팔레스 호텔로 갔다. 김영진 변호사도 와 있었다. 구건호는 김변호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라이먼델 디욘사 하고 이지노팩하고 합자는 잘 될 것 같아?”
“어려울 것 같아. 둘 다 산전수전 다 겪는 빠꼼이들이라 만만치가 않아.”
“흠, 그래?”
말하고 있는 사이 아미엘이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왔다.
“또 만납시다.”
구건호가 악수를 청했다.
“난, 이지노팩 사장보다 구건호 사장이 더 관심 있어.”
“날? 날 왜? 난 그런 합작할 돈과 실력도 없는 사람인데.”
“아니야, 그걸 떠나 친구로서 왠지 정이 가.”
“허 참, 별 소릴!”
“구건호 사장하고 김변호사 한번 일본에 와. 거기도 좋은 골프장 있어.”
“일본 애들도 골프 많이 치나?”
“나는 우리 회사가 있는 동경에서 가까운 요네하라 골프 클럽을 자주 방문해.”
“그래? 그런 곳이 있나?”
“동경 하네다 공항에서 자동차로 50분이면 갈수 있어. 지바현(千葉縣)의 이치하라시에 있어. 자동차도 필요 없고 셔틀버스 이용하면 돼. 가까운 시일 안에 한번 와. 내가 안내할게.”
“그래? 알았다. 비행기 시간 늦겠다. 어서 나가자.”
구건호는 아미엘을 배웅하고 돌아와 사무실에 앉았는데 자꾸 졸음이 왔다. 커피 한잔 마시고 비몽사몽간에 앉아 있는데 이태원 경리단길에서 술집하는 이석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석호냐?”
“바쁘지? 전화 통화 가능한가?”
“응, 괜찮아. 이야기 해봐. 장사는 잘 되지?”
“장사는 그럭저럭이야. 다른 게 아니고 내가 다음 달에 결혼해. 그래서 알리려고 전화했어.”
“어, 그래? 축하한다. 어디서 하는데?”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해.”
“전쟁기념관? 거기도 예식장이 있나?”
“응, 큰 데야. 요즘 시즌이라 겨우 잡았어.”
“내가 꼭 갈게. 진짜 축하한다. 그리고 부럽다. 신부는 뭐하는데?‘
“신부도 자영업이야. 의류가게 해.”
“정말 잘 됐다. 먼저 장가간다니 부럽다. 야. 내가 중국에 있는 민혁이 한테도 이야기 할게.”
“그래? 고맙다. 그리고 너희 집 주소 불러 줘봐. 청첩장 보낼게.”
“주소는 뭘, 그냥 문자 메시지로 보내면 되지.”
“그래도 예의가 있으니 보내야지. 한번 불러봐.”
구건호는 주소를 암기하고 있지 못해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30길 타워팰리스1차 아파트....”
구건호는 주소를 불러주었다.
구건호는 이석호의 전화를 끊고 바로 중국으로 전화를 했다.
“야, 석호가 장가간다고 전화 왔다.”
“그래? 그 놈이 먼저 가네. 그 싸가지 없는 놈.”
“왜 걔하고 무슨 일 있었어?”
“그놈의 자식이 내가 공무원 시험공부 할 때 모임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내 머리까지 툭툭 쳐가며, 그렇게 오래 공부했는데 안 되는 이유가 뭐야? 그러면서 비웃잖아. 확 받아버리고 싶었다.”
“하하, 다 잊어라.”
“학교 다닐 때도 싸가지 없었어. 심심하면 내 머리 톡톡 치고 그랬었어.”
구건호는 이석호가 학창시절 자기 우산 뺏어간걸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걔가 그런 버릇이 좀 있기는 하지. 그래도 장가간다니 축하해 주자. 다음달 6일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한단다.”
“내 이름 앞으로 축의금 5만원만 해라. 돈은 정지영씨 앞으로 송금할게. 난 못가니까 그날 구사장이 대신 전해줘.”
“하하, 축의금은 법인 경비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전할게.”
“그럼 미안한데.”
“미안할 것 없다. 전화 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