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보은 (報恩) (2)
황선홍 과장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내일 오후에 아무 때고 와도 된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내일 오후 3시경에 찾아가 뵙겠습니다.”
다음날 구건호는 아산을 가기위해 주유소에서 차에 휘발유를 만탱크 채웠다.
“3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점심 먹고 가도 되겠다. 점심을 어디 가서 먹지? 에잇, 집밥이나 먹으러 가자.”
구건호는 식당으로 갈까 하다가 집으로 갔다. 넓은 아파트는 구건호 한사람만 살고 있어서 적막감이 돌았다.
“이 집을 경매 받을 때 투자 겸해서 샀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넓어. 혼자 50평짜리 사니 어느 땐 밤에 무서운 감도 있어.”
구건호는 냉장고에서 김치와 어리굴젓, 도라지 무침, 김 등을 꺼냈다. 도라지 무침은 직접 만든 것이 아니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오는 가사 도우미 아줌마가 만든 것이다. 통닭 튀김 남은 것이 있어서 한 조각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이제 가정을 가질까? 바보처럼 돈 버느라고 연애를 못해봤으니 어쩐다? 이 나이에 새롭게 연애하기도 쉬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괜찮은 여자는 벌써 어떤 놈들이 다 채갔겠지?”
구건호는 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셨다.
구건호는 50평짜리 아파트에서 안방 하나만 쓰고 있다. 넓은 안방에 오동나무 책상과 침대가 있고 책장이 하나 있었다. 책장에는 경영과 관련된 책들이 많았다. 강아지라도 한 마리 사서 가져오려고 했지만 털도 날리고 관리도 해야 하므로 귀찮아 그만 두었다.
구건호는 양치질까지 하고 서서히 아산으로 출발했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르며 신나게 고속도로를 달렸다.
구건호는 북천안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성환읍을 거쳐 아산시 둔포면으로 들어섰다. 아산 테크노벨리를 지나며 결심을 했다.
“여기에 들어선 대형 공장처럼 나도 꼭 큰 공장을 하나 갖는다. 제조를 하는 생산 공장을 꼭 갖겠다. 갖겠다!”
구건호는 서서히 둔포면 신봉리로 접어들었다. 멀리 와이에스테크 공장 건물이 보였다.
“아, 참 감개가 무량하다. 이 길을 다시 밟는구나!”
구건호가 탄 랜드로버가 서서히 공장 마당으로 들어왔다.
와이에스테크는 종업원들이 많이 줄어든 것이 실감 났다. 제복 입은 직원들이 왔다 갔다 했지만 드문드문 했고 구건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역시 중소기업은 장기 근속자가 드물어. 이직률이 많아서 직원들이 확 바뀌었는지 나를 알아보는 인간들이 없네.”
구건호는 2층 사무실 문을 열었다.
“황과장님, 저 왔습니다.“
“오! 왔소?”
“이게 누군가 구건호씨 아닌가?”
영업부의 간부 한사람이 구건호를 알아보아 악수를 청 하였다. 경리 김부장 자리에는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황과장은 구건호가 왔다고 보고 하려는지 사장실로 갔다. 구건호가 황과장의 팔을 잡았다.
“그냥 계세요. 제가 혼자 들어가지요.”
구건호가 사장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사장은 스마트 폰을 보고 있었다.
“사장님, 구건호입니다.”
“아, 구건호씨!“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건호는 카페트 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사장님, 절 받으십시오.“
“아니! 이거, 왜 이러는가!”
“사장님의 은혜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은혜는 무슨 은혜! 나는 은혜를 베푼 적도 없네!”
“아닙니다. 공금에 손댄 저를 그때 사장님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제가 어찌 이것을 잊겠습니까.”
“무슨 소리. 그때 자네는 회사에 금전적 손해는 끼치지 않았네. 다만 그런 일로 내가 자네를 매정하게 쫓아낸 것이 미안할 따름이네. 자, 일어서시고 의자에 앉게.”
사장은 회의용 테이블이 있는 의자에 와서 앉았다. 구건호도 일어서서 맞은편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구건호가 박영식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보다 머리숱도 많이 빠지고 눈가 잔주름도 늘어 있었다. 영화배우 같은 얼굴인데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자네는 신수가 훤한 것 보니 지내기가 괜찮은 모양이네. 그래, 요즘 무슨 일을 하나?”
“부동산 임대업을 하고 있습니다. 고시텔 임대업을 합니다.”
“흠, 고시텔은 밑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열심히 벌은 모양이군.”
“중국 가서 좀 벌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
“식당 했습니다. 거기서 사논 아파트가 올라서 조금 벌었습니다.”
“그러신가? 잘 되었네.”
구건호는 주식으로 돈 번 이야기나 경매 부동산으로 번 이야기, 합자사 투자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부업자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대부업자에게 돈 빌리기는 어려울 것 갔습니다. 담보력이 취약하다면 안 빌려주겠지요.”
“그럴 테지.”
“그래서 제가 고시텔을 하나 더 사려고 모아 논 돈이 있습니다. 사장님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필요하다면 이 돈을 융통해 드리겠습니다.”
“자네가 개인적으로? 뜻은 좋지만 나는 담보가 마땅한 것이 없네. 공장 부동산도 제2금융권 돈까지 몽땅 빼먹은 상태이네.”
“물론 잘 압니다. 돈을 빌려드려도 일시적 미봉책에 불과하겠지요.”
“그런데 왜.”
“사장님께 큰 빚을 진 사람으로 보은은 해야 도리일 것 같아서요.”
“허허. 실없는 소리는!”
구건호는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뭔가?”
“2억원입니다.”
“정말 이걸 빌려주겠다는 말인가? 아산 시내 아파트 한 채 값인데.”
“그렇습니다.”
‘흠.“
박영식 사장은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 한참 후 입을 열었다.
“부동산은 이미 담보가 많아 안 될 것이고 공장 기계를 자네한테 매각한다고 각서를 쓰겠네. 비록 년식이 오래된 사출기들이라 담보가치는 못되지만 여러 대 잡아주면 차용금과 비슷할 것이네.”
“그건, 사장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회사가 어려워 이자는 많이 못주네. 7% 주겠네.”
“그것도 사장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고맙네. 나로서는 완전히 구세주가 나타난 것 같네.”
박영식 사장이 구건호의 두 손을 잡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물파산업은 법정관리에 들어갑니까?”
“들어가고 싶은데 법정관리 신청도 비용이 많이 들어가 못하고 있었네. 마침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지원하는 제도가 있어 현재 추진 작업 중이라고 들었네.”
“아산은 법원이 없으니 신청은 천안지방법원에 합니까?”
“아닐세. 기업 회생은 고등법원이 있는 곳만이 할 수 있어 대전지방법원이 될 것 같네.”
“네, 그렇군요.”
“물파같이 큰 회사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요? 들리는 소문엔 물파 회장님 아드님이 중국에 지나치게 투자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국 강소성 소주시에 공장에 약 100억원 가량을 쏟아 부었네.”
“네? 강소성 소주시라고 하셨습니까?”
소주시는 구건호의 합자사가 있는 곤산시와 아주 가까운 도시이다. 소주는 곤산시와 달라 성도(省都: 한국의 도청 소재지 정도))이므로 아주 큰 도시다.
“그렇다네. 거기 투자하느라 지나친 파이넨스를 일으켜 그 부담 때문에 어렵게 된 거지. 거기다가 중국 매출도 부진하고 불량이 많이 나와 더욱 일이 꼬였지. 그러다보니 회장과 사장의 불화만 깊어졌다네.”
구건호는 조용히 이 와이에스테크와 물파산업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구건호는 와이에스테크 박영식 사장에게 2억원을 빌려주었다.
박영식 사장은 진심으로 구건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더군다나 이자도 제1금융권 이자율로 한다니 눈물 나도록 고맙네.
“더 이상 좋은 조건으로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나. 우리 회사 종업원들도 무척 좋아할 거야. 구건호씨, 나는 내 개인재산을 불리는 것 보다 우리 종업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네.”
“훌륭한 기업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사장님께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존경까지야. 뭘. 참, 이자 보낼 계좌번호를 알려주게.”
“제 통장 사본입니다. 이자는 매월 이 통장으로 넣어주십시오.”
“여기 차용금 상환을 못하면 기계를 양도한다는 각서네.”
구건호는 와이에스테크의 박영식 사장에게 돈을 빌려주었지만 이 회사의 앞길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파산업이 휘청거리는데 살아날 방도가 있겠어? 물파가 정상 궤도에 올라서지 못한다면 와이에스테크도 힘들어지고 나도 돈을 못 받게 된다.”
구건호는 만일 이 회사가 쓰러져 돈을 못 받게 되었을 때 담보 잡은 기계류를 내다 팔면 얼마나 건질까 생각해 보았다.
“한 2천만원도 못 받겠지? 하지만 박영식 사장에게 받은 은혜를 갚은 셈이니 나의 심리적 부담감은 어느 정도 덜은 셈이네.”
구건호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휘파람을 불며 서울로 올라왔다.
구건호는 금호석유화학 주식의 상승으로 매도 물량이 나오는 것을 감지했다.
“흠... 세력들이 일단 이익을 실현하려는 모양이네.”
세력들이 주식을 던지자 주가가 출렁거렸다.
“쨔식들! 그대로 좀 놔두지. 세력치고는 조막손 같네.”
구건호도 세력에 동참하기 위해 주식을 30억원어치 매도했다. 주가가 더욱 출렁거리며 하강했다. 개미들이 아우성 댔다.
“좆같은 놈의 회사 경영진은 뭐하냐? 주가관리 안하냐!”
“주주 총회 때 회사에 가서 책상을 엎어버리자!”
개미들의 아우성대는 소리가 증권사이트 토론장을 달구었다.
다음날 세력들의 매도세가 지속됨을 보았다.
“이놈의 세력들은 돈이 없나? 두 배 올리고 팔아먹네. 이런 호재는 좀 더 가지고 가지.”
구건호가 50억원을 또 매도하자 주식은 더욱 급락하기 시작했다.
개미들이 또 아우성 댔다.
“지하의 밑바닥이 어디냐?”
“회사에 불이라도 났나? 왜 이리 떨어지지?”
최근에 주식이 오르는 것을 보고 들어온 개미들은 손절하기 시작했다.
구건호는 호가창을 계속 응시했다.
“장 시작과 동시에 매도세네. 종가에도 막 던지는구나. 그럼 나도 던진다.”
구건호가 30억원어치를 또 던지자 주가는 또 급락했다. 개미들의 패닉 현상이 왔다. 금호석유화학 주담(주식담당자)은 해명하기 바빴다.
“회사는 아무 일 없습니다. 주식시장의 일시적 수급 현상에 따른 등락일 뿐입니다.”
구건호는 개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가지고 있는 주식 모두를 팔아 치웠다. 세력의 흔들음에 동참한 것이었다.
개미들은 공포를 느끼고 대부분 손실을 본채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구건호는 자기의 주식 계좌를 열어보았다.
“매도가정시의 금액이 300억이었는데 하강 때 같이 던지느라 현금보유액이 280억으로 쪼그라 들었네.”
구건호는 20억원이 날라 갔지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식을 다시 분할 매수해 나갔다. 구건호가 사기 시작하자 세력들도 급했던지 사자 주문을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래량이 말해주고 있었다.
구건호가 280억원어치를 다 사자 주식은 반등했다. 경제신문에 이 주식과 관련된 기사가 나왔다.
[금호석유화학 주식은 그동안 낙폭 과대로 다시 반등했다. 회사는 건전하며 해외시장 매출도 늘고 있고 세계 석유화학 시장도 밝은 편이다.]
이런 기사가 뜨자 구건호의 주식 평가액은 다시 전과 같이 300억원이 되었다. 그러나 구건호는 낙폭 과대인 상태에서 재매입하여 평가액은 300억원이 같아졌지만 주식 수량은 전보다 훨씬 늘었다.
“이 주식은 당분간 횡보한다. 남은 개미들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갈 것이다. 개미들은 나와 다르게 주식 평단가가 현 시세보다 높다.”
구건호는 주식 홈트레이딩 창을 껐다.
“이제 기다리는 것이다. 몇 개월은 이 주식 횡보한다. 빚을 내거나 신용으로 주식을 산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손절할 것이다. 돈은 항상 있는 사람들 편이니까.”
김앤정 로펌의 김영식 변호사로 부터 전화 부탁한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지금 점심시간이니 전화를 받을 수 있겠지?”
신호가 가자 김영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나야.”
“무슨 일 있어?”
“지난번 만났던 라이먼델 디욘사의 리차드 아미엘 사장이 다시 한국 나와.”
“또 술 한 잔 같이 하자는 건가?”
“아니야. 이번에 평택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를 방문한다고 했어.”
“그래?”
“라이먼델 디욘사의 한국 공장 설립에 관해 이 회사와 의논을 하려는 모양이야.”
“음, 잘 되었으면 좋겠네.”
“그런데 이 회사 방문시 구사장하고 같이 가자고 연락이 왔어.”
“나를 왜? 나는 자동차 부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부동산 임대업자인데.”
“아니야. 아미엘 사장이 구건호씨가 과거 플라스틱 공장에서 메카닉으로 있었다니까 높이 평가를 하고 있어.”
“허허, 단순 공돌이였던 사람을 왜 높이 평가해. 부품공장 연구실에 가면 공학 박사들이 우굴 거리는데.”
“그렇지 않아. 그 사람,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시야도 넓힐 겸 한번 가자.”
“가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 도움을 주지. 방해만 할 것 같은데?”
“다음 주 수요일 괜찮겠지?”
“그래, 좋아.”
“그리고 구사장, 골프연습장에 다닌 지 1년 되었으니 머리 안 얹을 거야?”
“그래, 얹자. 내가 골프 회원권 하나 사지.”
“회원권? 그거 비싸. 수 천만원에서 몇 억짜리도 있어. 나도 필드에 나가려면 김앤정 로펌의 법인 회원권 쓰고 있어.”
“그런가?”
“그러지 말고 이번에 아미엘 사장이 오면 우리 로펌 회원권 가지고 같이 한번 라운딩하자.”
“내가 방해만 할 텐데.”
“아미엘도 수준이 형편없어. 회원권은 차차 사도 돼.”
“뭐, 그러지.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