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사람 사는 맛 (1)
추석이 되었다.
구건호는 차례를 지내기 위해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인천 구월동 아파트로 갔다. 집에 들어서자 전 부치는 냄새가 났다.
“건호 왔구나. 어서 오너라. 차례 상은 다 차려 놓았다.”
구건호가 엄마와 아빠를 보았다. 좋은 환경에서 더운물, 찬물 나오는 아파트에 살아서인지 전보다 얼굴들이 깨끗해지고 살도 조금씩 오른 것 같았다. 옷도 좋은걸 입었다.
“이 옷 좋지? 네 누나가 한 벌 해 주었다.”
누나와 매형, 그리고 정아가 뛰어 나왔다.
“삼촌이다!”
정아는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었다. 꼭 요정 같았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더 예뻐졌네.”
구건호가 정아를 안아주었다. 누나와 매형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구건호가 사논 아파트에 들어와 사니 겸연쩍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누나와 매형도 얼굴이 아주 좋아져 있었다.
차례를 지내고 나서 가족들끼리 넓은 거실에 차례 상을 그대로 옮겨놓고 밥을 먹었다.
간간히 엄마와 누나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전에는 집에만 오면 엄마의 신세 한탄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표정들이 밝아진걸 보니 구건호의 기분도 좋았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맛이다.”
구건호는 이렇게 생각하며 차례 상에 올렸던 정종을 마셨다.
“엄마, 나 삼촌한테 세배하면 안 돼?”
정아가 자기 엄마의 무릎에 앉아 응석을 부렸다.
“안 돼. 오늘은 설날이 아니고 추석이야. 추석!”
구건호가 웃으며 팔을 벌렸다.
“그래, 괜찮다. 세배 해봐라.”
정아가 구건호에게 냉큼 세배 절을 했다.
“학교 들어갔다지? 공부 열심히 하고 이건 학용품 사는데 써라.”
구건호가 5만원짜리 지폐를 꺼내주자 누나가 황급히 제지했다.
“만원만 줘, 만원만! 큰돈주면 못써!”
“괜찮다. 어서 네 방에 가거라.“
정아가 돈을 들고 쏜살같이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구건호가 엄마를 쳐다보고 말했다.
“여기 고모님도 가끔 오세요?”
“지난번에 한번 왔다갔어. 와서 놀래 자빠지더라. 건호가 50평짜리 아파트 샀다고 해서 농담하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
아빠도 옆에서 미소를 지었다.
“참, 네 고모 너한테 중매 선다고 혹시 전화 안했냐?”
“했어요.”
“마을금고에 다니는 38살짜리 처녀를 소개 했다며? 망할 놈의 여편네. 중매를 하려면 제대로 하지. 신랑보다 나이를 몇 살 더 먹은 처녀를 소개해? 항상 지 아들만 제일 잘났다고 여기지.”
아빠가 핀잔을 주었다.
“에이, 쓸데없는 소리.”
“쓸데없는 소리는 왜 쓸데없는 소리에요. 그 여편네 이제 이 아파트 보고 갔으니 그런 소리는 쏙 들어가겠지.”
매형이 잔을 권했다.
“자, 처남 한잔 하지.”
“아니, 내가 먼저 드려야 하는데.”
구건호가 병을 뺏으려 하자 매형이 한사코 먼저 따라 주었다.
“매형은 요즘 뭐하세요?”
“트럭 운전해. 원단 실고 납품처 다녀.”
“일은 많이 있어요?”
“뭐, 그럭저럭.”
구건호는 급여를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누나가 전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이 집에 들어와 사니 요즘 집 월세가 안 나가. 그래서 정아 아빠도 한 5년간 고생하면 지입차 한 대는 살 거야.”
“지입차요?”
구건호가 지입차가 뭐냐고 물어볼까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아빠가 먼저 말했다.
“지입차는 그 뭐야, 모찌꼬미 차를 말하는 건가?”
“예, 맞습니다. 장인어른.”
매형이 정종 병을 들고 아빠의 술잔에 첨잔을 하였다.
“지입차라는 것이 정확히 뭡니까?”
“아, 그건 자기가 차를 사서 회사에 들어가는 거지. 이를테면 회사에 용역을 받는 거지.”
“흠, 큰 트럭은 가격이 비싸니까 작은 회사들은 그 방법을 취하겠네요.”
“아니, 큰 회사들도 지입차가 많아. 큰 회사들은 트럭이 한 두 대가 아니고 수 십대가 필요하니까 지입차를 쓰지. 또 사고나 보험 등 관리도 편하잖아. ”
“그렇겠네요. 그 트럭의 주인은 회사가 아니고 개인 차주들이겠네요.”
“그렇지. 지입차 차주들은 개인사업자들이지.”
누나가 옆에서 참견을 하였다.
“얘 아빠 꿈이 1억짜리 트럭 사서 대기업 들어가는 거야. 농심이나 롯데 같은 회사도 있고 하이트 진로나 맥주회사도 있고 뭐 들어갈 데는 많은가봐.”
“1억짜리 트럭이요? 그럼 한 달에 얼마 벌어요.”
누나가 고사리나물을 집어 먹으며 매형 대신 이야기 했다.
“한 5백 버나 봐!”
매형이 당황해 하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렇게는 못 벌어. 기름값, 보험료 등은 본인 부담이야. 그래서 월 500만원 벌어도 손에 쥐는 건 300쯤 될까?”
“흠... 1억이라.”
구건호가 혼자 생각하는 표정을 짓자 매형은 술을 목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1억까지는 안 들어갈 거야. 4톤이나 5톤짜리 윙바디 트럭들 중에서 대기업 들어가는 지입차는 8천에서 9천이면 살 수 있어.”
“흠.”
구건호는 혼자 생각해 보았다.
매형이 지입차로 300 벌고 누나가 종이컵 공장에서 160 받는다면 460이 되니 생활 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겠다 싶었다.
“혹시 지금 남아있는 부채가 있습니까?”
매형이 한숨을 쉬었다.
“3년 전에 사업하다가 실수해서 지금 신용불량자이지만 조금씩 갚고 있어. 법원에 개인회생 신청해서 지금 매월 50만원씩 갚아 나가고 있어.”
“흠.”
구건호는 지금 매형 월급이 200만원 내외로 보았다. 그건 자기도 공장 근무를 해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이 아파트로 들어오기 전에 법원에 내는 돈 50만원과 월세 집 매월 50만원 나가면 남는 돈이 없을 것으로 보았다. 누나가 벌지 않으면 안 될 구조였다.
매형이 자작으로 술을 따라 마시며 말했다.
“그래도 처남 덕분에 이 집에 들어와 사니 요즘은 숨을 좀 쉴 수 있어 좋아.”
매형이 웃으면서 구건호에게 술을 다시 권했다.
구건호는 이번 달에 30억원으로 우량주에 투자해 9천만원을 벌었다. 구건호가 한참 생각 끝에 결정을 내렸다.
[이번 달에 주식으로 번 9천만원으로 매형에게 지입차를 사 주자. 식당이나 카페 같은 것 차려주어 봤자 경험도 없는 사람들한테는 위험하다. 괜히 밤늦게 까지 개고생하고 잘못하면 돈 까먹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합시다. 매형.”
가족들이 모두 구건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까 대기업 지입차 윙바디 4톤 짜리가 9천만원 한다고 했지요? 9천만원을 보내 드릴테니 지입차 한 대 사세요. 그리고 아빠 엄마 용돈은 매형이 좀 지원해 주세요.”
가족들 모두 놀란 눈으로 구건호를 쳐다보았다.
구건호는 경인 고속도로를 달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누나와 매형이 엄마, 아빠를 잘 모시면 엄마, 아빠 사후에 지금 살고 있는 구월동 힐스테이트 아파트는 누나에게 주자.”
이렇게 생각하니 가족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 같아 마음이 아주 경쾌해졌다. 구건호는 휘파람을 불며 차를 몰았다.
서울 강동구에 경매 나온 토지 200평이 2차도 유찰되었다. 이 토지는 구건호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토지였다.
강부장은 다음번 3차 경매에서는 응찰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강부장의 보고를 받은 구건호는 달력을 보며 말했다.
“3차 경매 시작가가 얼마지요?”
“지난번 36억이었는데 유찰되었으니 다음번 시작가는 28억 8천만원입니다.”
“한 30억 쓸 가요?”
“글쎄요. 지분 경매라 응찰자가 없다면 시작가에 그대로 응찰해도 되지 않을 가 싶기도 하네요.”
“아무튼 그날은 나하고 강부장님하고 같이 동부 지방법원을 갑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 그리고 사장님.”
“뭡니까?”
“지난번에 개인이 아닌 법인 이름으로 경매에 참여한다고 하셨지요?”
“아, 입찰 보증금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일단 법인 통장으로 3억을 입금해 놓을게요.”
“입찰보증금은 경매가의 10%니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강부장님은 법인 인감증명서나 한통 떼어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증권사 지점장한테 전화가 왔다.
“구사장님 잘 지내시죠? 증권사 강남 지점장입니다.”
“아 예, 구건호입니다.”
“전화통화 가능하지요.”
“예, 말씀하세요.”
“삼성전자 관심 가져보세요. 요즘 일시적으로 주춤했지만 다시 고개를 들 겁니다. 반도체는 아직 호황이니까요.”
“삼성 전자는 워낙 대형주라 움직임이 둔해서... 제약회사 주식은 어떨까요?”
“제약회사는 동호회 애들이 장난이 심합니다. 구사장님 같은 점잖은 큰손에게는 권하고 싶은 종목은 아닙니다. 하하.”
“흠, 삼성전자라...”
“후회는 안하실겁니다. 사놓고 중단기로 3개월 정도 지나면 웃을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삼성전자 주식이 1주당 240만원 정도 하니까 한 1,000주만 사 보지요.”
“감사합니다. 아, 그러시고 필드에 언제 한번 같이 나가시지요.”
“아니, 저 골프는 잘 못 칩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구건호는 삼성전자 주식을 1,000주를 살까 하다가 2,000주를 사버렸다.
“50억이면 3개월 후에 1%만 올라도 얼마야? 허허, 5천만원이네.”
구건호는 지난번에 주식으로 번 9천만원을 빼내 누나에게 보냈다.
“누나야? 지금 9천만원 보냈으니 매형보고 지입차 한 대 사라고 해.”
“벌써? 고맙다. 정말 고맙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책임지고 잘 모시도록 할게.”
누나는 또 울먹거리는 것 같아 전화를 끊었다.
구건호는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기 위해 골프를 배우기로 했다.
“증권사 지점장도 그렇고 김앤정 변호사 사무실의 김변호사도 그렇고, 골프치자는 사람들이 많네. 이놈의 골프를 배우긴 배워야겠다.”
구건호는 언젠가 한번 본 양재역 사거리에 있는 ‘스포타임’이 생각났다.
스포타임은 온천물이 나왔다고 하여 종합 스포츠 센터로 강남지역 사모님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이었다.
“여기 회원권은 얼마나 하지?”
구건호는 전화를 걸어보았다.
“스포타임이지요? 거기, 골프 회원권 가입하려면 얼마나 합니까?”
“종합 회원권을 구입하시면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무슨 시설이 있는데요?”
“골프는 물론 헬스장이나 수영장, 볼링장, 탁구장을 이용할 수 있고 요가나 댄스 등도 할 수 있는 회원권이 있습니다.”
“그래 그건 얼마나 합니까?”
“법인으로 등록하실 겁니까? 개인으로 하실 겁니까?”
“두 가지 다 한번 알아봅시다.”
“골드로 하실 거예요?”
“음? 그, 그것으로 하면 얼마나 합니까?”
“회원권이 법인은 2억 5천만원, 개인 정회원은 8천 3백만원입니다.”
구건호는 회원권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흠, 알겠습니다. 한번 찾아가 보지요.”
구건호는 전화를 끊고 투덜거렸다.
“거, 되게 비싸네. 내가 아직은 그런데 갈 군번이 아니야. 뭐 돈이 있으니까 가면 갈수도 있지만 거기다가 돈 쓰기는 좀 아까운데.”
그래서 구건호는 좀 멀더라도 교육문화회관에 있는 인도어 골프장 3개월짜리를 끊었다.
구건호는 오전에 사무실에 있다가 오후에는 랜드로버를 타고 인도어 골프장을 다녔다.
골프채 한 세트와 신발, 장갑등도 샀다.
구건호는 별도로 코치를 불러 레슨을 받았다.
코치는 20대 여성으로 프로 골퍼 출신이라고 했다. 역시 운동선수 출신이라 체격이 좋고 팔뚝도 두터워 보였다.
“사장님 처음 배우세요?”
“예, 처음이오.”
“아니, 여태껏 골프도 안 배우고 뭐하셨어요?”
“먹고 사느라 바빠서...”
구건호의 말에 코치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코치는 구건호의 골프채 가방에서 가운데 있는 골프채 하나를 쑥 뽑았다.
“여기 7번 아이언만 가지고 우선 연습하세요.”
“알겠습니다.”
“양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시고 손목에 힘을 빼세요.”
구건호는 7번 아이언만 가지고 며칠 동안 열심히 쳤다. 하지만 생각대로 잘 안되었다. 공이 자꾸 빗나기만 하였다. 코치는 구건호가 치는 것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공을 쳐다보시고 허리만 돌렸다 때리세요. 힘을 빼시고!”
“깡!”
공은 80야드도 못나갔다.
“자, 제가 하는걸 잘 보세요. 사장님 하고 어떻게 다른지요.”
코치가 머리털을 날리며 멋진 스윙을 했다.
“깡!”
골프공이 하늘 높이 슁슁 날랐다. 150야드도 넘는 것 같았다.
“와. 대단하네!”
구건호는 코치의 말을 듣고 열심히 공을 쳤지만 늘지를 않았다.
“씨팔! 난 골프 체질이 아닌 모양이다.”
구건호는 골프채를 던져버리고 중국이나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구건호는 왕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수업중인 모양이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왕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구사장? 전화 못 받아 미안하다. 강의 중이었어.”
“내가 곤산시 산업단지를 한번 답사하려고 한다. 너 시간 있지?”
“이번 주는 안 되고, 다음 주는 월요일, 화요일 빼고 모두 가능하다. 한번 와라.”
“다음 주 수요일 소산 공항으로 갈게. 공항에 나올 필요는 없다.”
“공항에 내리면 전화해라.”
“알았다. 그때 보자.”
구건호는 오래간만에 인천 공항엘 도착했다.
“공항이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완전히 시장 바닥이네.”
공항은 해마다 사람이 늘어 구건호가 처음 중국에 들어갈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구건호는 항주시 옆에 있는 절강성 소산 비행장에 내렸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공항이었다.
“벌써 공기부터가 중국 냄새가 나네.”
구건호는 택시 안에서 왕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왕교수가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다. 지금 학교냐? 집이냐?”
"집이야. 도착했냐? 슬슬 나갈게.“
“샹그릴라 호텔 커피숍으로 와라. 밥이나 같이 먹자.”
구건호가 호텔에 도착하여 커피숍에 들어가는데 벌써 왕교수가 와 손을 흔들었다.
“여기. 여기다!”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
“나도 방금 왔어.”
“밥 먹으러 갈까?”
“아직 점심시간은 아닌 것 같으니 차나 한잔 하자.”
둘은 감미로운 섹스폰 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셨다. 색스폰 연주자는 나이가 많은 노신사였다. 그는 올드 팝송을 연주했다.
“금계 산업공단은 아직 벌판이야. 3통 작업 중이야.”
“설계 도면은 나와 있지?”
“도면은 나와 있지. 조금 전에 리스캉 부시장하고 통화 했어. 내일 11시에 곤산시 상무(商貿)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어. 금계건설 사장도 나온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