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왕지엔 교수 (2)
이탈리아 식당 ‘보르게따’에서 네 사람은 와인을 두 병째 마시고 있었다. 구건호는 해산물 셀러드 등 안주를 더 시켰다. 술은 주로 중국인들이 마시고 구건호와 김변호사는 차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한잔 이상 마시지는 않았다.
왕교수와 리 부시장은 남방 사투리 중국말로 자기들 끼리 계속 떠들고 있어 구건호는 김 변호사에게 말을 다시 걸었다.
“김변호사님은 그럼 일요일 날은 보통 어떻게 보내십니까? 혹시 등산 같은걸 가십니까?”
“등산은 안갑니다. 가끔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치지요. 참, 구사장님도 언제 한번 같이 골프나 치실까요? 골프 잘 치시지요?”
“예? 골프요? 저, 저는 잘 못합니다.”
구건호는 그동안 공돌이 생활과 식당 같을 걸 하느라고 골프는커녕 골프채도 만져보지 못했다.
김 변호사가 생각났다는 듯이 왕교수에게 물었다.
“어이, 왕교수, 자네 중국서 골프 안치나?”
“칠 사람이 있어야지.”
“우리 네 사람이 같이 중국 가서 한번 칠까? 딱 좋네. 네 사람이라.”
“아냐, 리 부시장 잘 못 쳐. 여기 구사장이야 잘 치겠지만.”
“응? 나, 나도 잘 못 쳐.”
구건호는 전에 증권사 강남지점장이 라운딩 한번 하자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오늘 또 이렇게 골프 이야기가 나오니 구건호는 이놈의 골프를 배우긴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많이들 먹었네. 자, 이제 일어나지. 내가 이태원에 2차를 마련했으니 그리로 가세.”
“이태원? 관광안내 책자에 있는 이름인 것 같은데, 좋지!”
김변호사가 계산서를 들고 조르르 카운터로 갔다.
“아니, 계산은 내가 하지요.”
“아닙니다. 내가 계산 하지요. 나는 내일 업무 때문에 2차는 못갑니다. 그 벌로 오늘 식대는 내가 계산하겠습니다.”
김변호사는 기어코 식대를 자기가 계산했다.
“왕지엔, 그리고 리스캉 부시장, 미안해. 내일 아침 회의에 중요한 보고가 있어. 그래서 오늘밤 일을 좀 해야 될 것 같아.”
“그래? 그럼 가 봐야지. 2차는 구사장하고 놀게.”
“그럼 난 간다. 내가 한가해 지면 중국 한번 들어갈게. 우리 넷이서 라운딩이나 한번 하자.”
“그래, 좋아. 리 부시장 그동안 인도어 연습 좀 시켜 놓을게.”
구건호는 왕지엔과 리스캉을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자, 타라. 내 차다.”
“오우, 루후(路虎: 랜드로버 중국식 이름)! 차, 좋다!”
구건호는 이태원을 향했다.
“구건호, 고맙다. 더구나 내일 산업단지까지 같이 가겠다니 말이다.”
“산업 단지는 왜 가는 거야?”
“응, 곤산시 외곽에 금계(錦溪jinxi) 산업단지를 만들어. 그래서 한국의 산업단지를 벤치마킹 해보고 싶은 모양이야.”
리스캉 부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건호는 이석호가 알려준 이태원 “아라리요”란 술집을 찾았다.
“여기는 유명한 외국인 거리야. 저기 봐. 서양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잖아. 흑인도 있고.”
“흠, 그러네.”
“어서 오십시요!”
아라리요 술집 밖에서 웨이터들이 큰 소리로 안내했다. 술집은 지하였다. 거울이 죽 달린 긴 복도를 지나 홀 안으로 들어갔다.
“둥다당, 둥당!”
벌써 장고 소리가 들렸다. 둘러보니 좌석은 거의 찬 것 같았다. 가운데 무대가 있고 한사람의 무희가 나와 춤을 추고 있었다. 무대 아래 테이블에선 춤을 감상하며 술들을 마셨다.
“기레이! 기레이!”
손님들은 일본 사람들이 많은지 기레이(아름답다)를 외쳤다.
구건호 일행은 웨이터가 안내한 테이블에 앉았다. 손님 좌석은 약간 어두운데 가운데 무대는 밝아 춤추는 무희의 모습이 잘 보였다.
“한국의 전통 춤이야.”
“오, 그래?”
병맥주와 과일 안주가 나오고 한참 홀 안이 무르 익어갈 무렵 무희가 갑자기 격렬하게 장고를 추며 빙글빙글 돌았다.
“기레이! 기레이!”
일본 사람들은 손벽을 치며 좋아했다. 왕교수가 주의를 돌아보았다.
“중국인 관광객은 없고 전부 일본인 관광객뿐이네.”
장고 소리가 느슨해지며 춤을 추던 여자가 웃 저고리를 벗어 던졌다. 하얀 속옷만 입은 채로 춤을 추었다.
“더운 모양이지?”
리스캉 부시장이 춤추는 모습을 열심히 보며 말했다.
무희가 이번엔 속저고리까지 벗어 던졌다. 알몸 위에 장고를 메고 춤을 추었다.
무희가 이번엔 치마까지 벗어 던졌다.
홀 안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일본인 관광객은 물론 왕교수와 리스캉이 목을 빼고 쳐다보았다. 침을 꼴깍 삼키는 사람도 있었다.
“아하, 이래서 이석호가 이 집을 추천했구나. 색다른 집이기는 하지만 이거 어디 원, 외설스러워서.”
그래도 손님들은 열심히 구경했다.
(이하 장면 생략함).
구건호는 술을 몇 잔 마셨더니 운전하기가 어려워졌다.
“대리를 불러야겠다.”
“대리가 뭐냐?”
“대신 운전해줄 사람!”
“여기도 음주 단속이 심하지?”
“심해. 걸리면 벌금이 엄청나. 잘못하면 면허 취소도 되고!”
“조심해야겠다. 오늘 고마웠다.”
“내일 리 부시장 데리러 호텔로 10시까지 갈게. 푹 쉬어라.”
구건호는 대리 운전사를 불러 이태원에서 인터콘티넨탈 호텔과 자기 집이 있는 도곡동 타워팰리스로 돌아왔다.
구건호는 리스캉 부시장과 같이 산업단지로 출발했다.
구건호가 옆 좌석에 탄 리스캉을 보고 말했다.
“안산이나 평택에 국가 산업단지가 있는데 거길 갈까?”
“국가 산업단지? 아니, 작은 지방도시의 산업단지를 보고 싶어.”
“그래? 너희 시에서 조성하고 있는 산업단지는 규모가 얼마나 되는데?”
“1,000무(畝) 정도 돼.”
“1,000무?”
구건호는 중국식 단위인 무라고 이야기 하자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1000무면 얼마나 될까?”
“평방미터로 따지만 70만 평방미터가 조금 못돼.”
“헉! 70만 평방미터? 평수로 따지면 20만평이 넘을 것 같은데?”
구건호는 전에 자기가 근무했던 와이에스테크의 근처에 있던 아산 테크노벨리가 생각났다.
“아산으로 가자! 거기 갔다가 천안 공단이나 구경하면 되겠지.”
구건호는 아산 테크노벨리를 구경시켜 주었다.
“어휴, 여긴 좋은데? 규모도 크네. 한국같이 작은 나라가 지방 산업단지도 크네. 여기 넓이는 얼마나 될까?”
구건호가 관리사무실에 가서 팜프렛을 들고 나왔다.
“헉! 298만 평방미터!”
구건호도 의외로 규모가 커서 놀랐다. 298만 평방미터면 90만평이 넘는다는 이야기였다.
“여긴 광고에 일터, 삶터, 쉼터 가 있다고 소개한걸 보니 아파트 단지와 상가까지 합쳐서 그럴 거야. 공장 자체만으로는 그렇게 안 되겠지.”
“흠,”
리스캉이 공장 건물과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신음 소리를 냈다.
“좋군. 훌륭해. 잘 만들었어.”
리스캉은 수첩을 꺼내 무언가 메모를 하고 공장 전경을 사진 촬영했다.
구건호는 리 부시장을 천안 공단도 구경시켜 주었다.
“구사장은 전에 공장에서 근무했다고 했지?”
“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했어. 사출공으로 일했지. 넌 철강공장에서 일했다고 했었나?”
“오래는 안했어. 한 3년 하다가 공회(工會: 노조) 주석이 되었지. 참, 네가 근무했다는 공장은 이 근처냐?”
“아니야. 난, 이곳저곳 옮겨 다녔어.”
구건호는 천안 제3공단과 제4공단, 외국인 공단을 구경시켜주었다.“
“흠, 외국인 공단이 따로 있네.”
리스캉 부시장은 열심히 메모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여긴 천안 ‘백석 농공단지’라고 간판이 있는걸 보니 농공단지인 모양이다.”
“농공단지? 거기 한번 가보자!”
리 부시장은 농공단지에 관심이 많았다. 자기가 있는 곤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산업단지가 지방의 작은 도시라 그런 모양이었다.
리 부시장은 차에서 내려 농공단지를 둘러보았다.
“여긴 관리 사무실이 없나?”
“관리사무실?”
구건호는 지나가는 사람한테 관리사무실을 물어 찾아갔다. 마침 관리 사무실엔 소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는 규모가 어느 정도 됩니까?”
“36만 평방미터입니다.”
구건호가 리 부시장에게 통역을 해 주었다.
“구사장, 입주 기업체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봐줘”
구건호가 관리소장에게 입주기업체 수를 물었다.
“처음엔 50개 기업이 들어왔는데 지금은 100개 기업 정도 됩니다. 공장을 같이 쓰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여기는 도심이 가까워 땅값이 비싸겠는데.”
리 부시장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천안에서 산업단지를 구경하고 서울로 향했다.
차속에서 리 부시장은 팔짱을 끼고 무언가 생각을 한참 했다.
“어이, 구건호. 네가 하고 있는 부동산 개발회사는 자본금이 얼만가?”
“작아. 3억이야. 미화 30만 달러 정도야.”
“매출은 얼마나 되나?”
“매출이라고 할 것도 없어. 한국 돈으로 년 간 한 5억 나올라나?”
“재무제표를 볼 수 있나?”
“그건 왜?”
“너, 우리하고 합자회사 한번 안할래?”
“합자회사?”
“응, 합자회사 하려면 너희회사 재무제표가 있어야 돼.”
“나, 시작한지 얼마 안 됐어. 1년 결산도 안했는데 뭐.”
“12월말 결산이면 얼마 안 있어 나오겠구먼. 부채는 얼마나 되나?”
“부채는 없어.”
“한 푼도?”
“그래.”
“그으래?”
리 부시장이 약간 미소를 띠었다.
리스캉 부시장은 차창 밖의 경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실은 내가 있는 시 정부에서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어. 내가 기획한 거지. 거기에 외자기업을 유치하려는데 걱정이 많다.“
“분양이 안 될까봐?”
“분양으로 하려는데 입주기업이 없으면 이 일을 추진했던 내가 곤란해지지.”
“분양이 잘되면?”
“외자기업을 유치하면 실적이 올라가지. 상해시로 금의환향 할 수가 있겠지. 그래서 합자회사를 만들려고 해. 해외 외자기업 유치도 하고, 공장 건물 건설도 하고, 조경도 하고, 이후 관리까지 할 수 있는 회사 말이야.”
“어휴, 그런 거창한 것 난 못해. 돈도 많이 들어갈 것 같은데?”
“자본금은 3백만 달러로 시작하려고 해.”
“거 봐. 3백만 달러면 금액이 크잖아. 나 그런 돈 없어.”
“합자사이기 때문에 중국 측이 50%, 한국 측이 50%로 하려는데 어제 기업들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 했더니 모두 할 의사가 있는 것 같던데? 그런데 난 믿을 수 있는 구사장하고 하고 싶은데 안타깝게 되었군.”
구건호는 생각해 보았다.
“자본금 300만 달러 회사의 50%면 15억원 정도인데...“
15억원 정도면 구건호가 개인재산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돈이었다. 현재 구건호는 현금만 164억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합자사는 왕지엔 교수도 약간 지분 참여하기로 했어. 사실 우리가 300만 달러가 없어서 합자회사를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야. 문제는 외자기업 유치인데 구건호가 참여해서 중국에 진출할 한국기업을 소개하면 좋을 것 같아 제의하는 거야.”
“왕교수는 얼마나 참여한데?”
“아직 정하지는 않았어. 왕교수가 미국회사를 소개하면 좋겠는데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아무래도 중국과 인접해 있는 한국기업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가 생각해.”
“흠... 합자사는 언제 만들 건데?”
“3통(通) 작업이 완료되는 내년 4월경 시작해 볼까 해.”
“3통 작업이 뭐야?”
“응, 그건 첫째 전기를 통하게 하고, 둘째는 수도, 하수도를 통하게 하고, 셋째는 도로 등 진입로를 통하게 하는 작업이야. 보통 전통(電通), 수통(水通), 도통(道通)이라고 불러.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잘 한번 생각해 봐라.”
“재미있는 표현이군. 그럼 합작하게 되면 곤산시와 합작인가?”
“시 정부가 직접 할 수는 없고, 시가 출자해 만든 건설회사가 있어. 금계건설이라고 있는데 이를테면 국영기업이지. 이 회사와 합자를 하는 거야. 국영기업과의 합자라 안전하고 과실송금 또한 보장이 될 수 있어.”
“흠.”
“구사장 회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그것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부채가 없는 회사라니 한번 추진해 볼만도 해. 더구나 재무제표도 3통 작업이 끝나면 나올 수 있으니 말이야. 공장 건물 건설이나 조경 등은 합자 파트너인 금계건설에서 다 할 수 있어. 거긴 고급 기술자들이 우굴 우굴 한데 뭐.”
“흠.”
구건호가 생각하기에 솔깃하기는 하였다.
왕교수와 리 부시장이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왕교수는 리 부시장은 단체로 움직이기 때문에 주최 측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기로 했다.
구건호가 인터콘티넨탈 정문 앞에서 배웅을 하였다.
왕교수가 손을 내밀었다.
“구사장 덕분에 한국에서 잘 지내고 간다. 중국한번 놀러 와라.”
“그래, 추석 지나고 한번 갈게. 금계 산업단지도 구경하고.”
“거긴 아직 허허 벌판이야. 왜, 관심 있어?”
“봐야 뭘 알 수 있지. 그런데 합자사를 꾸미면 너도 참여한다며?”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일단 의향만 있어. 생각 있으면 중국서 다시 만나 이야기 해보자.”
“그래, 잘 가거라. 리스캉도 잘 가고.”
구건호는 리 부시장과도 악수를 했다.
구건호는 증권사에서 추천한 주식이 얼마나 변동이 있는 가 컴퓨터를 열어보았다.
“한 달 만에 약 3% 올랐네.”
증권사는 등락폭이 큰 주식은 추천하지 않았다. 서서히 움직이는 대기업 우량주를 추천하여 상승폭이 크지 못했다.
“그래도 거금 30억을 투자했으니 9천만 원을 벌었군. 한 달 만에!”
역시 돈이 돈을 벌었다. 전에는 햇살론 융자받은 돈 1천만원을 투자 했을 땐 3% 상승이면 수익이 30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30만원 빼내 방값 지불하는데 쓰거나 차량 찌그러진데 수리나 하고 술이나 한잔 마시면 금방 없어지는 돈이었다, 더구나 이자가 나가기 때문에 남는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손실이라도 발생하면 이자와 손실금이 합산해서 빠지기 때문에 손해가 많았다. 결국 카드 돌려막기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우량주는 이렇게 3%만 먹어도 투자금 30억이 움직이니 9천만 원 버네. 한 달 만에 대기업 사원들 연봉을 벌었어. 스카이 대학 나와 대기업에 들어간, 우리 동창들의 우상 조원철이 들으면 졸도 하겠군.”
구건호는 통장을 열어보았다.
정지영씨가 보내준 급여 400만원과 오피스텔 임대료 200만원이 들어와 있었다.
“급여는 정지영씨가 갑근세를 공제하고 400만원 실수령을 맞추기 위해 애쓴 모양이네. 세전 총액 급여는 400만원 넘게 잡아준 모양이야.”
구건호는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고 있었다.
공돌이 생활할 때는 숨만 쉬어도 한 달만 되면 버는 것 보다 나가는 것이 많아 항상 적자였는데 지금은 숨만 쉬어도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