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왕지엔 교수 (1)
구건호는 만약에 강동구에 있는 땅을 낙찰 받으면 무얼 할까 생각해 보았다.
“호텔을 지어?”
구건호는 이번 경매는 공유지분이므로 낙찰 받는다 해도 50%의 지분만 확보하는 것이 된다.
나머지 반쪽 주인을 만나 설득하여 땅을 매입한다면 땅값만 60억 내지 70억원이 들어갈 것 같았다.
“거기다가 건축비는 얼마나 들까?”
구건호는 백지 위에 그림을 그려보았다.
“200평이면 바닥면적 100평만 잡더라도 평당 건축비 500만원이면 건축비만 해도 5억이 들어가네. 만약 10층짜리 건물을 짓는다면 힉! 50억이 들어간다. 15층짜리를 짓는다면 75억! 그러면 땅값하고 모두 얼마야? 내가 갖고 있는 현금이 모두 들어간다는 이야기네.”
구건호는 강부장한테 그 땅에 건물을 지을 때 몇 평을 지을 수 있고 평당 건축비는 정확하게 얼마나 들어가는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우선 2차 경매 결과를 보고 결정하자.”
그래도 구건호는 미련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다.
“내가 갖고 있는 돈을 모두 꼬라박고 호텔 대표이사나 할까? 서울시내 중심부가 아니고 변두리 호텔이지만 거기다가 실내를 예쁘게 꾸며놓고 호텔사업하면 남 보기도 깨끗하고 얼마나 좋을까? 호텔 사장만 하고 살아도 얼마든지 폼 잡고 살 텐데 말이야.”
구건호는 또 오피스텔을 상상해 보았다.
“오피스텔을 크게 지어놓고 직영으로 운영해 볼까? 150실 정도 빠진다면 월세 60만원만 잡더라도 월 9천만원이 들어오는데 그게 낫지 않을까?”
구건호는 하루에도 백지위에 호텔을 만들었다가 오피스텔 건물을 만들었다가 지우곤 하였다.
구건호는 C일보를 펼쳐 들었다.
인터콘티넨탈에서 하는 동북아 경제포럼 행사 사진이 크게 나왔다.
“세계 석학들의 경제 진단? 거창하군. 킥킥 왕교수 사진도 크게 나왔네. 뭐? 중국과 한국은 동반자적 입장에서 손을 맞잡고 나가야 한다고? 좋은 말이긴 하다. 킥킥.”
구건호는 왕교수가 공식 행사를 마치고 내일쯤 전화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
“구건호? 나야! 왕교수.”
“오, 그래. 왕교수. 전화 기다렸다.”
“내일 호텔로 와. 내일 오후 4시부터 자유시간이야.”
“4시까지 가지. 어디서 만날까?”
“내 방으로 와. 12XX 호실이야.”
“알았다. 그리로 갈게!”
구건호는 코엑스 근방에서 저녁을 먹고 2차로 좋은 델 가고 싶었다.
“경리단길 이석호 친구 누나가 운영한다는 룸싸롱으로 갈까? 여기서 가깝기도 하잖아?”
구건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까지 비싼 술집으로 갈 필요는 없지. 반갑기는 하지만 무슨 큰 거래를 하는 입장도 아닌데.”
구건호는 한남동 비밀요정도 생각해 보았다.
“거기도 너무 비싸. 분위기는 좋은데 너무 고급 집으로 가면 오히려 왕교수 일행이 부담을 가질지도 몰라.”
구건호는 어디가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에효. 장소 구하기도 힘드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 개발을 좀 해 놓을걸.”
구건호는 그런 장소는 경리단길 이석호가 잘 알 것 같았다. 이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석호? 나다. 구건호.”
“오, 구사장님, 웬일로 나를 다 찾아?”
이 녀석은 가끔 삐딱한 구석이 있었다. 본인은 기억하려나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 고등학교 때 내 우산을 빼앗아 간걸 생각하면 기분이 찝찝하기는 하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으니 다 잊어야지 어쩌겠나.
“내가 중국에서 알던 친구들을 한번 대접해야 하는데 좋은 술집 없겠냐?”
“여기가 그 유명한 이태원 아니냐! 갈만한 술집 천지다.”
“그래 어디가 좋겠냐?”
“몇 사람인데?”
“두 사람. 나까지 세 사람이다.”
“뭐하는 사람들인데?”
“한사람은 대학교수고 한사람은 부시장이야.”
“대학교수와 부시장? 그러면 좀 점잖은 데로 안내해야겠는데.”
“안 점잖은데도 좋아. 모두 나하고 나이가 동갑인 친구들이야”
“그래? 어떻게 또 그런 사람들하고 친했어? 그러면 가만있자. 헤밀턴 호텔 근방 ‘아라리요’가 좋겠다. 장고 춤도 나오는 술집이야.”
“장고 춤도 나와? 그게 좋겠다. 약도 자세히 알려다오.”
사무실로 웬 아줌마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저, 정지영씨 계신가요?”
“예, 전데요.”
정지영씨가 찾아온 젊은 아줌마를 회의용 테이블로 안내했다.
구건호가 자세히 보니 누나 친구 박승희였다. 구건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승희 누나 아닙니까?”
“어머! 구건호!”
아줌마가 깜짝 놀랐다. 구건호는 이 아줌마가 옛날의 박승희 누나였던가 하였다. 세월의 때가 묻어서인지 옛날의 깔끔하고 도도한 모습은 사라지고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키도 옛날엔 컸던 것 같은데 오늘 보니 무척 작아 보였다.
“오래간만입니다. 앉으시지요.”
“몰라보겠네. 어쩜 이렇게 훌륭한 신사가 되셨나. 길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칠 뻔 했네.”
정지영씨가 녹차를 가져왔다.
“승희 누나는 지금 어디 사십니까?”
“부천에 그냥 있지 뭐. 아휴, 사무실이 참 아담하고 깨끗하네.”
승희 누나는 녹차를 홀짝거리며 사무실 안을 훑어보았다.
“저희 누나한테 승희 누나가 보험을 취급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응, 어쩌다 그렇게 되었어. 활동적이고 보람은 있어.”
“저희 회사에서 고시텔 3개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번에 화재보험에 들려고요. 저는 중국에서 손님이 와서 지금 나가봐야 합니다. 여기 우리 직원인 정지영씨 하고 말씀 나누세요.”
정지영씨가 고개를 까닥이며 승희 누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 그럼 내가 이분이랑 이야기 나눌 테니 나가봐요. 아휴, 볼수록 어렸을 때보다도 더 미남이 된 것 같네.”
승희 누나는 정말로 감탄한 듯이 구건호를 올려다보았다.
실상 구건호는 요즘 말끔해졌다.
셔츠나 양복, 하다못해 티셔츠나 구두가 모두 명품들이었다. 옷이 날개라던가. 고급의복에 자주 피부샵에서 맛사지를 받다보니 사람의 모습이 점점 달라져 갔다.
이제 누가 보아도 부잣집 아들처럼 보였지 수도권의 작은 영세 공장에서 일하는 공돌이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굴부터 빛이 나고 환해졌다.
구건호가 인터콘티넨탈로 가서 왕교수의 방을 찾았다.
방은 구건호가 올 줄 알고 약간 열려져 있었다.
“왕지엔! 오래간만이다!”
“오우, 쥐지엔하오(구건호)! 반갑다!”
이들은 서로 잠시 포옹을 했다.
“야, 구사장. 너 좀 살찐 것 같다. 한국 물이 역시 좋긴 좋은 모양이다.”
“너도 얼굴 좋다. 공식 일정은 다 끝났지?”
“하루 더 남았어.”
“어휴, 그런데 이게 다 뭐냐?”
방안에는 물건이 담긴 비닐 쇼핑봉투가 잔뜩 있었다.
“응, 선물용으로 좀 샀지. 한국 물건이 품질은 최고야.”
왕교수는 엄지를 들어 척하고 들어 보였다.
“리스캉 부시장은?”
“옆방에 있어. 물건 정리하고 있어.”
“그래? 다들 진짜 반갑다. 저녁때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내려가서 밥이나 먹자. 여기 코엑스몰은 좋은 식당 많다.”
“응, 조금만 기다려. 잠시 한사람 더 올 사람이 있어.”
“누군데?”
“예일대에서 같이 공부한 한국인 친구가 있어. 이리로 온데.”
“그래? 뭐하는 친군데?”
“국제 변호사야. 우리하고 동갑이야.”
구건호와 왕지엔 교수는 호텔 방에서 온다는 사람을 기다렸다.
구건호가 호텔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봉은사 건물이 보였다. 왕교수가 다가와 물었다.
“구사장, 저 건물은 뭐하는 곳이냐? 한옥으로 지은 건물 같은데. 문화재 건물인가?”
“아니야, 절이야. 사찰.”
“절? 그래? 무슨 절인데?”
“봉은사라고 해. 아침에 조기운동 하러갈 때 들려봐.”
“아무나 들어가도 돼?”
“그럼,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 무료야.”
말하고 있는 사이에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미남형의 남자가 들어왔다.
“오우, 김 변호사!”
왕교수와 방문객이 서로 반갑다고 포옹을 했다.
“아 참, 인사해라. 내가 지난번 전화로 말했던 구건호 사장이다.”
“김영진입니다. 반갑습니다.”
구건호는 김영진이라는 사람과 악수를 하였다. 김영진씨가 안 포켓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구건호에게 주었다. 구건호도 명함을 꺼내 주었다.
“김앤정 법률사무소 변호사?”
구건호는 이 사람이 그 유명한 김앤정 로펌의 변호사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법무법인이 아니고 법률사무소라고 되어 있어 의아했다.
“김앤정 로펌은 법무법인이 아닙니까?”
“우리는 조합형 로펌입니다. 글로벌 조합형 로펌인 셈이지요.”
김변호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웃는 모습에 귀티가 흘렀다. 김변호사는 구건호가 준 명함을 다시 쳐다보았다.
“명함 디자인이 예쁘네요. 주식회사 지에이치 개발이면 부동산 쪽입니까?”
“그렇습니다. 직원 두 명이 있는 아주 작은 회사입니다. 회사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습니다. 하하.”
“아휴, 별 말씀을! 그래도 사장님이신데.”
왕교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야, 너희들 명함 나한테도 한 장씩 줘라!”
구건호와 김변호사가 명함을 왕교수에게 주고 있는 사이에 리스캉 부시장이 옆방에서 건너왔다.
“오우, 리스캉!”
“오, 구건호! 반갑다.”
이들은 서로 껴안고 인사를 했다.
“지금 국장 안하고 어디 부시장으로 갔다며?”
“응, 바로 상해 옆 동네야. 너는 요새 뭐하냐?”
구건호가 명함을 리스캉에게 주었다. 명함은 앞면엔 한국어로 되어 있지만 뒷면에는 영문으로 되어 있었다.
“지에이치 개발은 부동산 개발인가?”
“맞아! 방지산(房地産: 부동산)!”
리스캉 부시장과 김변호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왕교수가 서로 소개를 시켰다.
“이 분은 나하고 예일대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고, 이쪽은 현재 상해 옆에 있는 곤산시(昆山市)부시장으로 나하곤 꾀복쟁이 친구지. 서로 인사들 해라.”
두 사람이 같이 인사했다.
“내려가자! 내려가서 밥 먹으며 이야기 하자.”
이들 네 사람은 코엑스 몰을 걸었다.
코엑스 몰의 많은 상점을 보면서 왕교수가 부러운 듯이 말했다.
“역시 한국의 발전은 놀라워. 점포들이 많이 세련되었어. 우리 동양도 이만하면 서양에 지지 않을 거야.”
“중국도 지금 엄청나게 발전하잖아. G2 아니냐?‘
“나라만 컸지 인민들의 생활은 아직 멀었어. 지금 여기 오고가는 한국인들 모두 부유해 보이잖아?”
“오! 저기 식당이 있다.”
“간판 이름이 요상하네. ‘뽀르게따’라고 되어 있어.”
“이탈리아 식당 같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저기 어때?”
“이따리(意大利: 이탈리아)? 허허, 여기서 이따리 음식을 먹게 생겼네.”
이들 일행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구건호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닭고기 요리를 시켰다.
버터 치킨라이스와 봉글레브래드, 크림파스타 등을 시켰다.
“와인도 한잔씩 해야지?”
“맛있는데!”
네 사람은 음식을 먹었다. 왕교수와 김변호사가 서로 영어로 대화를 했다. 구건호는 이들이 환상적으로 영어를 하는 것이 부러웠다. 김변호사는 구건호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 같아 우쭐대며 더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리 부시장도 영어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김 변호사는 영어로 떠들어 구건호에게 미안한지 형식적 질문을 했다.
“구 사장님님은 지금 어디 사십니까?”
“도곡동에 삽니다.”
“오, 저희 동네와 가깝군요. 저는 대치동에 삽니다. 저희 부모님도 대치동 미도아파트에 살고 계십니다. 도곡동에 사시면 혹시 타워팰리스?”
“예, 그렇습니다. 타워팰리스 A동에 삽니다.”
“아, 그렇군요.”
김변호사는 구건호가 타워팰리스에 산다고 하자 조금 대우해 주는 눈치였다.
김변호사와 구건호가 한국말로 대화하자 답답해진 왕교수가 끼어들었다.
“어, 참. 구건호! 리 부시장은 내일 공식 스케줄이 없어. 실은 리 부시장은 첫날 공식 행사만 참석하고 이후 개별 학술 발표회는 참석하지 않아.”
“오, 그래? 그럼 여기 온 목적이 따로 있는가?”
“산업공단을 몇 군데 들리려고 해. 그래서 미안한 부탁이지만 혹시 내일 리 부시장을 안배할 사람이 있는가 알아봐 줄래?”
“그래? 그럼 내가 안내하지.”
“그러면 더욱 좋겠는데, 시간이 있나?”
“없어도 만들어야지! 친구가 멀리서 왔는데!”
“고맙다. 정말 고맙다.”
왕교수와 구건호가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자 이번엔 김 변호사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김 변호사가 부러운 듯이 말했다.
“오우, 구 사장님 중국어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요. 언제 그렇게 배우셨습니까?”
“먹고 사느라고 배웠지요. 하하. 자, 한잔씩 합시다.”
자리는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가 난무하며 무르 익어갔다.
술이 들어가자 이번엔 왕교수와 리 부시장이 서로 대화를 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남방 사투리로 막 이야기를 하므로 구건호가 알아듣기 힘들었다.
“김앤정 변호사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연봉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휴, 말도 마세요. 일이 빡세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밤 11시, 12시까지 근무하는 것은 보통입니다.”
“그래요?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군요.”
“오늘도 일감을 가져와 차에 실었습니다.”
“무슨 일을 주로 하십니까?”
“저는 미국 변호사 출신이기 때문에 기업의 해외 자금조달이나 M&A 업무 같은 것을 주로 봅니다.”
“아, 그러시군요. 원래 중 고등학교도 미국에서 다니셨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압구정동에서 태어나 중 고등학교도 여기 강남에서 다녔습니다. 대학도 서울대학을 졸업했는데 미국도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갔습니다.”
“석, 박사를 예일대에서 공부하셨겠네요.”
“예일대에서 로스쿨 공부를 하고 미국변호사가 되어 돌아왔는데, 와서 보니까 여기 국내 변호사들과 융화가 잘 안될 때도 있네요. 하하.”
김변호사는 번쩍이는 금테 안경을 손으로 올리며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구건호는 이 사람이야 말로 강남 8학군에서 귀족처럼 자란 사람으로 보였다. 거기다가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좋아 말 그대로 엄친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