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 큰손 이야기-12화 (12/501)

# 12

청담동 건물주 이회장 (2)

(12)

이회장은 낚시대를 길게 드리우고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연세가 많은 분이라 뽕짝을 듣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클라식 음악이었다. 제지 회사 회장에다가 청담동에 빌딩을 갖고 있다니 이런 분과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아니 따리를 붙고 싶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더 이상 기회를 안주고 대화를 중지한 채 낚시를 하니 계속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낚시와 음악 삼매경에 빠진 어르신을 방해할 수는 없지.”

구건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장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건너편에서 루어 낚시를 하겠습니다.”

“아, 그럼 그렇게 하세요.”

이회장이 흰 치아를 들어내고 웃으면서 말했다.

호수의 건너편 쪽으로 가서 루어 낚시의 낚시줄을 연신 감아 올렸다.

“형, 저 이회장이란 사람 말이야. 우리가 인연 닿기 어려운 부류인데 잘 해봐.”

“뭘 말이야.”

“제지회사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취직 좀 시켜 달라고 해.”

“취직이 금방 되냐? 제지회사에 맞는 스펙이 있어야지.”

“아무 일이나 시켜 달라고 해. 회장 빽으로 들어가면 중간 간부들 누가 갈구는 놈은 없을 것 아니야?”

“그만해라. 낚시터에서 한번 만난 사람을 누가 선뜻 취직시켜 주냐.”

“계속 추파를 던져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어.”

“야 야, 시끄럽다. 낚시나 해라. 나, 아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언젠가 형이 그랬잖아? 누가 돈 많이 준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공장에 출근했더니 상무가 현장을 돌아다니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은 플라스틱 분쇄 작업을 중지하고 대청소를 합니다. 협력사에서 나온다고 하니 작업복도 단정히 입고 안전화와 안전모는 꼭 써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나오면 나왔지 작업까지 중단할 필요가 있습니까?”

사출반 반장이 구건호의 머리를 툭 치며 말했다.

“야, 우리가 정품 원료 쓴다고 하는데 분쇄한 재생원료 섞는 거 알면 좋아하겠어?”

상무가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현수막도 걸었다.

“품질 제일 이라고 쓴 현수막이네. 품질 제일 찾는 놈들이 재생원료 섞어 써?”

구건호가 내 뱉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인도인 근로자 알리가 웃었다.

오전 11시가 넘어 협력사 사람들이 나왔다. 이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납품 받는 주요 공급처였다. 모두 3사람이 나왔는데 구건호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기계가 너무 낡았네요. 몇 년 식이죠?”

상무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비비며 말했다.

“년 식은 좀 되었으나 제품 나오는 데는 손색이 없습니다. 이것 보세요. 방금 나온 제품입니다.”

“이물질이 끼어 있는 것 같은데요. 혹시 재생원료 쓰는 것 아니에요? 분쇄기도 있던데.”

“아이고 분쇄기에서 나온 건 다른 회사 제품 찍을 때 사용합니다. 요즈음은 분쇄기 잘 돌리지도 않습니다.”

한바탕 소란을 떤 후에 협력사 실태 조사가 끝났다. 협력사 직원들이 돌아가려고 하자 상무가 그들을 붙들었다.

“식사 시간도 다 되었는데 식사를 하고 가시지요. 여기 한우 고기가 유명합니다.”

조사 나온 협력사 직원들이 머뭇거리며 시계를 보았다.

“그럼 여기서 먹고 갈까?”

“자, 차에 타시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이, 김부장, 이과장도 따라와.”

상무가 협력사 직원들과 함께 나가자 세척반 김 반장이 소리쳤다.

“자, 경계경보 해제입니다. 우리도 밥 먹으러 갑시다.”

구건호는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나는 한심해.”

학력도 보잘 것 없고 특별한 자격증이나 기술이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야, 구건호. 밥 빨리 먹어. 오전에 분쇄기 못 돌려 일이 많이 밀렸어!”

분쇄반 반장의 말에 밥도 허둥지둥 먹고 마스크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반장이 분쇄할 폐 프라스틱 통들은 지게차로 밀어가지고 오는데 금방 동산 만하게 쌓였다.

“에이, 지겨워! 오늘 또 야근해야 되겠네.”

구건호는 작업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자격증이 있어야 해. 이번 일요일엔 낚시 가지 말고 꼭 기술학원을 방문해 보자. 자격증 따려고 마음먹었으면 빨리 실천에 옮겨야지.”

저녁에 지친 몸으로 원룸에 돌아와 후배 박종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자격증 따는 것 결정 했냐?”

“했어. 용접기술 배우려고 해.”

“용접? 좋지. 경찰관 시험 가산점 아니더라도 그거 따놓으면 좋다.”

“좋긴 뭘 좋아. 그래 보았자 경찰관 안 되면 공장 같은데 가서 반장 정도나 해 먹을 텐데.”

“아니야. 용접기술 가지고 호주나 카나다 같은데 이민가면 월급 무지무지하게 많이 받는 다더라.”

“이민 갈 생각은 없어. 내가 외아들인데 이민가면 되겠어? 그거 좋으면 형이나 해. 형은 정했어?”

“아냐. 알아보고 있어.”

“그걸 뭘 그렇게 오래 생각해. 아무거나 배우지. 혹시 공인중개사나 노무사 시험공부 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야?”

“내가 노무사 되겠냐. 다음 생에서나 가능하겠다.”

“해 봐. 부천에서 내가 과외 받던 학원 선생님 알지? 그 선생님도 감정사 공부한다고 했어.”

“감정사? 보석 감정사?”

“아니, 그 감정사가 아니고 감정 평가사 말이야.”

“아무튼 난 일요일 기술학원 순례나 해야 되겠다. 낚시는 다음 다음 주에 가자.

“알았어. 나도 이번 일요일엔 큰아버지 문병 가야 돼.”

2주 후에 구건호와 박종석은 포천 낚시터에서 만났다.

“난, 여기만 오면 좋아. 물에서 민물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

“오늘은 이회장님이 안보이네.”

“형은 낚시보다는 청담동 빌딩과 제지회사를 가지고 있다는 이회장 만날 생각만 하고 있군. 어떻게 해서든지 접근해 보려고 말이야.”

“이 자식이! 그런 노인들 만나 뭐하니.”

“뭐하다니, 내가 그 동일제지란 회사 알아보았어, 코스닥 등록업체야.”

“그래?”

"형 다니는 공장 이름도 동일테크지? 어째 상호가 같냐? 희한하다.“

“그러게 말이야. 참 묘하네.”

“이회장 잘 엮어봐.”

“코스닥 등록업체라며? 그런덴 사원모집 공채야. 낚시터에서 만나면 인생 이야기나 듣는 걸로 만족해야지. 엮긴 뭘 엮어. 엮어질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어? 저기 제네시스 리무진 왔다.”

“오면 왔지. 자, 우리들은 낚시나 하자.”

이회장이 차에서 내리자 호수가로 내려왔다. 뒤에서 짐을 진 권부장이라는 사람도 따라서 내려왔다.

“오늘은 젊은이들이 먼저 왔네.”

“안녕하세요!”

“뭘 좀 잡았나?”

“저희들도 방금 왔습니다.”

“지난주엔 안보이던데. 어디들 갔다 오셨나?”

“예, 기술자격증을 따볼까 해서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기술 자격증?”

“예, 환경기사나 전기기사 자격을 따려고요.”

이회장은 자격증 소리를 듣고 구건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가만히 가로 젓는 것이 아닌가? 네 주제에 그런 자격증 따기 어려워 하는 것만 같았다.

“어렵더라도 악착같이 해 보려고 합니다.”

“기술자격증도 좋지만 다른 것을 배워 보게.”

이회장은 얼마 전까지 존대말을 하다가 반말을 하였다. 구건호 입장에서는 그게 더 편했다.

“다른 것 뭐 배울만한 것이 없어서요.”

“아니야.”

이회장이 또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자네는 신왕재왕한 사주야. 강남 철학관 박도사 이야기 생각 안나나?”

“신왕재왕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많은 재물이 들어오는 사람은 몸이나 기가 왕 해야 이를 감당하네. 사주에서는 신왕재왕을 부자가 되는 사주로 보지. 신왕재왕 사주는 기술보다는 부기(簿記)를 배우게.”

“예? 부기요? 부기가 뭡니까?”

“흠, 요즘 부기란 용어 잘 안 쓰는가? 기초 회계학 정도 되겠지. 부기는 회계장부를 기록하는 것을 말하네.”

“어휴, 회장님. 제가 어떻게 회계를 배웁니까. 상과대학을 다닌 사람도 아닌데요.”

이회장은 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부기는 초등학교만 나와도 배우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나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젊었을 때 모두 부기를 배운 걸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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