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2)
10년 전 한반도의 평화 무드로 태어난 평화공단은 처음 1천만 평으로 시작했었다.
그것이 현재는 9천만 평으로까지 확대가 된 상태였다.
비무장지대의 총면적인 2억 7천만 평에서 3분의 1이 공단으로 조성된 것이다.
오늘은 그와 엇비슷한 시기에 추진된 경원선 철도 복원이 완성된 날이었다.
복원에만 이르지 않고 철길을 넓혀 복선화를 이루어 냈다.
이제는 철도로 시베리아를 횡단해 유럽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훤히 뚫린 것이다.
북측의 양해를 얻어 기존의 곡선 구간은 최대한 직선 구간으로 변경했다.
그래서 시속 300km로 달리는 KTX도 최고 200km까지는 고속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만들었다.
용산역은 그 경원선의 시발역이었다.
사업 시행 전에 서울역을 시발역으로 하느냐, 아니면 청량리역으로 하느냐 의견이 분분했지만, 남북으로 단절되기 전 시발역이었던 용산역으로 최종 합의를 본 것이다.
오늘은 바로 용산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북의 끝자락인 함경도 나선 지구까지 시험 운행을 하는 날이다.
그러니 지금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지태가 가슴 벅차 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지태는 속으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아서였다.
* * *
오전 11시.
전국에서 엄청난 경쟁을 뚫고 선발된 200명의 국민 참여단까지 실은 KTX 특별 열차가 드디어 용산역을 출발했다.
“아빠!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지태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아들 한준혁이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보았다.
“뭐가 궁금한데?”
“이 기차를 아빠 회사하고 엄마 회사에서 만든 거예요?”
그러자 지태 대신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김성욱이 대신 대답해줬다.
“준혁아! 아빠와 엄마께선 기차를 만든 게 아니고 이 기차가 갈 수 있는 길을 만드신 거야. 아주 훌륭한 일을 하신 거지. 왜냐? 기차는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이 철길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기차가 다니는 길을 만드는 게 더 어려운 거예요?”
“길을 만드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한준혁이 재차 질문을 던져오자 김성욱은 암담하다는 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태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 왜 굳이 그런 어려운 답을 주셔 가지고…….”
“그렇지? 내 발등 내가 찧은 거지요.”
결국 김성욱이 멋쩍음을 털어내려 호탕하게 웃었다.
KTX 특별 열차는 얼마 후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곧 정차했다.
그곳은 옛 월정리역, 그러니까 남북으로 단절된 시절 민통선 안에 있던 경원선의 남측 마지막 역이다.
현재는 평화공단역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은 곳이기도 했다.
평화공단역에는 수많은 환영 인파들이 나와 있었다.
이곳에서는 약 30분간 정차할 예정이다.
지태는 김성욱과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한스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빵빠빠빠, 빰빠람.
대기하고 있던 관악대가 팡파르를 울리며 지태 일행들을 환영했다.
그리고 죽 도열해 있던 환영 인원들 속에서 두 사람이 퍼뜩 걸어 나와 꾸벅 큰절을 올렸다.
지태가 소리 없이 미소를 그리며 두 사람을 맞았다.
“보스!”
“회장님!”
먼저 알은체를 해 온 이는 후안이었고, 두 번째가 윤학수였다.
남북한 정부의 간섭 없이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평화공단이었다.
한스콤의 인력을 이끌고 이곳의 치안책임을 맡고 있는 두 사람이다.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보스.”
후안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말했다.
물론 이제는 한국말이다.
“후안! 한국말이 정말 많이 늘었어. 이젠 한국 사람이 다 됐네!”
지태가 후안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윤학수를 돌아보았다.
“학수! 얼굴이 많이 탔네? 이제 두 사람은 이곳의 최고 관리자들이 아닌가. 슬슬해. 이제 현장에서 직접 뛸만한 짬밥들이 아니잖아.”
“건달 시절부터 저는 원래 현장 체질이었습니까. 사무실에만 있으면 몸이 근질거려서 못 삽니다, 회장님.”
“에고, 이 친구야!”
지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야! 이제 회장님의 꼬붕이 되었다고 나는 안 보여?”
그때 뒤에서 이돈두가 투덜거렸다.
윤학수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형님이야 하루에도 몇 번씩 안부 전화를 드리지 않습니까.”
“야! 형님이 뭐냐, 형님이. 내가 비록 회장님 소리 듣다가 사장으로 강등되긴 했다만…….”
“그럼 이제부터 형님 대신 사장님으로 불러드릴까요?”
“됐어, 이 친구야. 난 자네의 영원한 형님이야. 그냥 죽을 때까지 형님이라고 해.”
그렇듯 평화공단역에서의 흐뭇하고도 시끌벅적한 환영식은 30분 만에 끝났다.
지태의 여정에 동행하지 못하는 후안과 윤학수를 뒤로하고 특별 열차는 다시 북으로 향했다.
평강을 지나 흥남으로, 흥남에서 다시 동해안을 따라 어느덧 김책시에 이르렀다.
지태는 김성욱 통일부 장관과 정부 관계자들을 뒤로한 채 이곳 김책역에서 내렸다.
김성욱과는 미리 약속된 부분이었다.
경원선의 종착역인 함경북도 나선 지구까지 올라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지태는 이곳 김책시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의미 있는 행사가 준비되어 있는 까닭이다.
“행사 잘 치르고 오세요. 좀 있다가 다시 보십시다.”
김성욱이 열차에서 내리려는 지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태가 악수에 응하며 말했다.
“예, 돌아가는 길에 다시 뵙도록 하죠.”
지태는 아내 임지은과 아들, 그리고 한스그룹 사장단들과 플랫폼을 빠져나와 대합실로 향했다.
대합실엔 북측 관계자들이 떼로 몰려 있었다.
지태의 모습이 보이자 대합실의 정중앙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양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왔다.
“어서 오라요, 지태 동무, 아니디. 한지태 회장 선생!”
김영철이다.
그는 북한 내부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지금은 최연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약칭 조평통의 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웬 존대?”
지태가 새삼스럽다는 듯 되묻자 김영철이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래 사적인 자리가 아니잖네. 공적인 자리니끼니 동무가 리해하라.”
“네에, 네! 조평통 위원장님.”
지태가 농담을 섞어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고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역 광장에 대기하고 있던 수십 대의 승용차와 대형버스에 모두가 올라타자 행렬은 곧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김책항이었다.
짙푸른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화려한 제단이 차려져 있다.
지태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눈앞에 차려진 제단은 지태가 오늘날 이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만든 소울메이트, 바로 최봉준을 위한 것이었다.
그 제단 뒤편으로 높이가 약 5미터쯤 돼 보이는 조형물이 까만 천에 뒤덮여 있었다.
지태가 술을 가득 채운 잔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큰절을 두 번 올린 다음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한 재벌의 반열에 오를 즈음 홀연히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린 최봉준을 가만히 불렀다.
‘어르신! 보고 계십니까. 저 한지태, 어르신의 말씀대로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날에 어르신과 함께할 수 없어서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홀연히 떠나가신 어르신을 다시 뵈올 수 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찌리릿.
이제는 그 감각조차 무뎌진 머릿속으로 예전의 그 느낌이 찾아들었다.
최봉준이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 허허헛. 뭐 이리도 야단법석인가. 아직도 내 도움이 필요한 게 있던가?
‘설마요. 전 단지 만분의 일이라도 어르신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
- 됐네! 내게 감사함을 느꼈다면 자네도 이젠 베푸시게.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네도 후임자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란 말이야. 참! 그 수첩은 다 채웠나?
아버지의 서재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최봉준의 낡은 가죽 수첩을 말하는 거다.
최봉준은 그 비워진 공백에 지태의 경험담을 채워 후임자로 하여금 귀감으로 삼게 하라 당부했었다.
하지만 수첩은 아직 절반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지태가 대답을 망설이자 최봉준이 껄껄 웃는다.
- 하긴 아직 자네의 도전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니까. 자넨 아직 젊어. 앞으로 사십 년은 더 달려야지? 그때쯤이면 그 수첩에 자네의 경험담들이 빼곡히 채워지겠구먼. 그거면 되네. 그걸로 자네의 임무는 다하게 되는 거니까. 잘 사시고 한세상 잘 놀다가 이쪽으로 오시게. 우리 다음 생에서 보세.
‘어, 어르신!’
지태가 다급히 최봉준을 불렀다.
그러자 최봉준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뱉어냈다.
- 뭐 하러 거추장스러운 일을 벌였어. 저 돌탑 하나 세워 놓는다고 내 실패한 인생이 달라질 것도 아닌데……. 하하. 그러나 고맙긴 하네. 나를 기억해주는 후세가 있다는 점에선 나름 잘 살았다고 봐야지. 아암, 그것보다 흐뭇한 일은 없을 게야.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는 지태의 머릿속에 최봉준은 들어있지 않았다.
지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단을 향해 다시금 큰절을 올렸다.
‘제 생이 마감하는 날까지 결코 긴장을 늦추지 않겠습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어르신의 기대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한지태가 되겠습니다.’
지태는 긴 묵례로 최봉준과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기념비 앞으로 다가갔다.
지태가 뒤돌아보며 지은을 불렀다.
“준혁 엄마!”
그녀가 다가오자 지태는 제막식을 위한 금줄의 한쪽을 내밀었다.
이윽고.
“셋, 둘, 하나!”
조현민의 카운터와 함께 베일에 가려있던 기념비의 검은 천이 주르르 벗겨졌다.
[동북아의 무역왕, 최봉준 선생님을 기리며]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였다.
뒤에 도열한 한스그룹 사장단들과 김영철 등 북측 관계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지태는 모두를 주욱 둘러보았다.
지금의 한스그룹을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늘이 맺어 준 소중한 인연들.
앞으로 다시 또 10년, 아니, 그보다 더 먼 훗날까지 같이 달려가야 할 사람들.
지태는 포근하고도 감미로운 시선으로 그들 모두를 제 눈 속에 가만히 담아 갔다.
* * *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함경도 나선 지구까지 달려갔던 KTX 특별 열차가 돌아올 것이다.
지태는 아내 지은과 함께 아들의 손을 잡고 서서히 저물어 가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때 지은이 문득 지태를 돌아보았다.
지태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입술로만 그윽하게 웃었다.
그 미소 하나로 남편 한지태에 대한 지금의 남다른 감회를 모두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지은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 터라 지태가 환하게 화답했다.
그러면서 다시 바다로 시선을 가져가며 혼잣말처럼 뱉었다.
“지난 10년 세월의 흔적이 이 정도야.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어.”
“내 남편이라서가 아니라 당신은 정말이지 최고야. 대단해. 당신은 그 누구도 쉽게 이룰 수 없는 기적을 이뤄낸 사람이야. 자랑스러워, 진심으로!”
아내의 칭찬에 지태가 멋쩍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자신의 도전과 포부를 밝혔다.
“기왕 대단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바에는 세상에 둘도 없을 불세출의 영웅이 돼 봐야겠어. 그리고 내 무덤의 비석에는 이런 말이 새겨지게끔 더욱 정진할 거야. 이 시대의 진정한 기업인 한지태, 이곳에 잠들다.”
“응원할게, 여보!”
지태가 흐뭇한 미소로 지은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고는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준혁이는?”
“저도 응원할게요, 아빠!”
지태가 아들 한준혁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쓸었다.
그들의 눈앞에 넓디넓은 동해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마지막 화려함을 뽐내는 태양빛을 잔뜩 머금은 동해 바다가 황금물결로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