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자리(2) & 에필로그(1)
저녁 식탁엔 메인 요리로 소고기 버섯 샤브샤브와 생선찜 등이 올려져있었다.
소주로 반주를 곁들이면서 세 사람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저녁상이 차려진 것은 8시 무렵이었지만 거실에서의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식탁에 앉은 것이다.
식사를 마쳤지만 세 사람은 좀처럼 식탁을 떠나지 않았다.
반주에서 시작된 술자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보다는 임상만 회장의 갑작스러운 진지함 때문이었다.
지태는 정색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하기는 저녁이나 먹자고 자신을 부른 것은 아닐 터.
이제야 망설이고 망설이던 본론을 꺼낼 모양이라고 지태는 생각했다.
이윽고 임상만 회장이 입을 열었다.
“한바탕 태풍이었지? 그래, 아주 엄청난 태풍이었어!”
“……!”
“그게 자네와 우리 집안, 아니, 딱 꼬집어 말하자면 우리 경남이! 그리고 최근에 불어 닥친 일련의 사건들까지 모든 게 상처 아닌 게 없었네.”
임경남과 맺어진 악연부터 그로 인해 강성원이 희생당한 일, 그리고 최근에 벌어진 지은의 납치 사건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지태는 그저 묵묵히 임상만 회장의 말을 경청했다.
아직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배기가 안 나왔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육지에 불어 닥친 태풍의 위력이었고 그 피해 사례라고 치세. 반면에 태풍이란 것은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네. 적어도 육지가 아닌 바다의 측면에서 보자면…….”
후자는 태풍이 바다에 주는 긍정적인 면을 말하는 듯했다.
태풍으로 인해 큰 너울을 만들어지면 바다 밑바닥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
그러면 바닥에 침잠돼 있던 유기물질들에 산소가 공급되어 분해를 촉진시키고 해양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적조도 몰아내게 된다.
또한 바다가 정화되고 먹이가 풍부해져 물고기들이 살찌게 되는 것이다.
지태가 경건한 눈빛으로 임상만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윽한 미소로 마주 보았다.
“우리 이제 긍정적인 측면만 생각하세.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들은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긍정적인 측면만.”
“……!”
“우리들 가슴 속의 상처를 걷어내고 이제는 새 살을 틔워야 할 때라고 생각하네.”
“무슨 말씀이신지……?”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지태가 반문했다.
임상만 회장이 쓸쓸한 미소를 보내왔다.
“이제 그만 우리 지은이를 책임지라는 얘기네. 자네와 우리 집안이 상처를 걷어내고 새로운 살들로 그 자리를 채우는 마지막 작업, 즉 모든 과정의 끝을 알리는 방점을 찍자는 얘길세.”
“아빠아!”
그제야 지은이 질색하며 나섰다.
임상만 회장의 그 말이 결코 싫어서가 아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지태를 몰아붙이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를 따지는 것이리라.
지태가 지은을 미소로 돌아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마.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면.”
그러고는 임상만 회장을 똑바로 주시했다.
“아직 앙금이 채 가시지 않으셨을 텐데 제가 꺼내기 어려웠던 말씀을 먼저 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임씨 가문의 사윗감, 더 나아가 부경그룹 후계자의 배우자로서 많이 모자란 놈이라고 절 나무라지 않으시겠다면……. 예!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지태가 그간 가슴속에 차곡차곡 쟁여 놓았던 진심을 꺼내 보였다.
그러자 임상만 회장이 지극히 만족한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모자라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넨 이미 스스로 정상을 밟았어. 자네가 일군 그 탑은 이미 높고 견고할 뿐만 아니라 숭고하기까지 하네. 우리 재벌가의 선대들이 써 오셨던 재벌신화를 오늘날에 다시 썼지 않은가. 자네가 모자라? 에끼, 이 사람아! 자넨 너무 넘쳐서 우리가 오히려 부담스럽다네.”
“좋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회장님이라니! 자네 입으로 방금 우리 지은이와 결혼하겠다고 승낙을 했지 않나. 그것은 이미 절반은 우리 집안사람이라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이제 호칭을 바꿔야지. 장인어른, 이렇게 말이야, 한 서방!”
임상만 회장의 농을 가장한 진담에 지태는 멋쩍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예, 장, 장인어른!”
“좋아, 아주 좋아! 하하.”
“대신 저도 청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게, 그게 뭐든!”
임상만 회장은 그 어떤 것이든 가슴을 열고 듣겠다는 듯 지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희 두 사람, 집안과 몸은 합치겠지만 사업에 있어서만큼은 각자의 길을 가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양 그룹의 합병이니 뭐니 하시는 말씀은 안 하셨으면 합니다.”
“그럼, 그럼! 물론이지. 대신 한스 혼자만 너무 잘나가진 말아주게. 처가 쪽도 덩달아 좀 키워 달라는 말일세.”
임상만 회장은 지태의 뜻을 흔쾌히 따르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지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은을 돌아보았다.
지은이 수줍은 미소를 보이자 지태는 그녀의 손을 꼬옥 쥐었다.
눈빛으로는 ‘사랑해!’라는 의미를 가득 담고 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지은 역시 지태와 똑같은 눈빛을 보내며 환한 미소로써 화답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1)
그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쏜살같이 흐른 어느 날이다.
지태는 한스그룹 회장실에서 창 너머로 서울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분명 아래를 굽어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한스그룹이 처음으로 자기 건물에 입주한 것이 바로 10년 전 이맘때였다.
그때의 7층짜리 빌딩이었던 것이 이제는 70층이 넘는 초대형 빌딩으로 변해 있었다.
그 높이만큼 한스그룹의 위치 또한 견고해졌다.
어느새 그룹이 거느린 계열사만 해도 50여 개에 연 매출이 100조 원대에 이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가진 게 없으니 하나뿐인 목숨을 내놓겠다는 일념, 오로지 그 깡다구 하나로 일궈낸 결과였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뿐이지 어찌 깡다구 하나로만 지금의 이 엄청난 재벌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천운과 인복이 따라 주어 가능한 일이었다.
지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오를 즈음이었다.
똑똑똑.
회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태가 돌아보았다.
“예에!”
지태의 대답에 곧 문이 열렸고 투피스 정장 차림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면모가 고스란히 엿보이는 얼굴.
“회장님!”
“어, 박 실장!”
지태가 아직 지워내지 않은 흐뭇한 미소로 그녀를 불렀다.
이제는 그룹 내 부사장급으로 그 위치를 돈독히 세운 비서실장 박수연이다.
“부경 회장ㄴ……. 아니, 사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경그룹 회장, 즉 지태의 부인이 된 임지은을 가리키는 거다.
지태가 헛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아니, 왜 안 올라오고? 난 지금껏 와이프가 올라오기만 기다렸는데…….”
그러자 박수연이 소리 없이 입술로만 웃었다.
“로비에서 인사할 분들이 많으신가 봐요. 붙잡히셔서 도저히 올라오질 못하시겠대요. 그러니 회장님께서 내려오시라고…….”
“허, 이거 참!”
지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웃었다.
“떠날 채비는 다 갖춰진 건가? 통일부 장관께선?”
“용산역으로 곧장 오시겠다는 전갈입니다.”
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파 위에 올려둔 슈트를 집어 들었다.
“자, 그럼 우리도 내려가 볼까?”
박수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로비로 내려오자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아빠!”
“어이쿠, 넘어질라! 조심, 조심!”
지태가 아빠 미소를 입에 흠뻑 달고서 힘차게 안겨 오는 사내아이를 맞았다.
그 뒤편에서 아이를 나무라는 목소리.
“한준혁! 오늘은 얌전히, 의젓하게 행동해야한다고 했잖아!”
바로 지태의 아내, 임지은이다.
“왜 그래, 애한테.”
“당신도 서운해요. 난 이제 뒷전인가?”
지은이 토라진 척 입술을 삐죽였다.
지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보세요, 임지은 회장님! 체통을 지키세요. 보는 시선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10년 세월이면 강산도 변…….”
“그래서 이젠 애정이 식었다는 거예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이쿠, 조 부회장님!”
지은의 바가지가 또 시작됐는가 싶어서 지태는 얼른 딴청을 피웠다.
고개를 돌려 조현민과 눈이 마주치자 마치 오래전 헤어진 벗을 다시 만난 듯 반갑게 알은체했다.
“새삼스럽게 왜 이러십니까, 회장님.”
참으로 눈치 없는 조현민의 대꾸에 지태가 떫은 입맛을 다셨다.
그 뒤편으로는 그룹의 사장단들이 차마 드러내 놓고 웃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키득대고 있었다.
지태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일신하며 짐짓 정색하는 척했다.
“하루 이틀 보는 장면도 아닌데 뭘 그리 정색하십니까!”
사장단들 중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지태는 그쪽에 대고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는 다름 아닌 이돈두였다.
현재는 보안전문회사인 한스콤을 이끌고 있다.
지태는 이돈두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장단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나눴다.
이동구 한스전자 사장, 유기영 경영전략기획실장 겸 그룹 부회장, 박찬익 한스다모아 사장, 한스무역 윤민수 사장 등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눈을 마주친 이는 기민성이었다.
그는 이제 그룹의 중추라 할 수 있는 한스홀딩스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수인사가 끝나자 박수연이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회장님,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겠습니다. 통일부 장관께서 30분 후면 용산역에 도착하실 거랍니다.”
장관을 기다리게 한다는 건 결례였다.
더구나 오늘은 지태가 특별히 청해 모신 분이 아니던가.
박수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지태가 앞장서자 사장단들이 그 뒤를 따랐다.
* * *
“여어, 한 회장! 어서 오시오.”
용산역 귀빈실에 지태가 모습을 드러내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통일부 장관이 반갑게 맞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니야, 아니에요.”
통일부 장관은 사람 좋은 얼굴로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지태가 말을 이었다.
“하하. 근데 말입니다. 저는 장관님! 이러는 것보다 예전의 호칭이 더 그립고 정겹게 느껴져요. 국장님이란 호칭 말입니다.”
지태가 농을 섞자 통일부 장관은 옛 생각이 나는 듯 예의 그 화통하고도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예전에 국정원의 국장이었던 김성욱인 거다.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 김성욱은 현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곧 열차가 출발합니다. 가십시다.”
김성욱이 귀빈실 출입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지태가 미소 띤 얼굴로 그러자는 듯 묵례를 해보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플랫폼으로 내려오면서 김성욱이 지태를 돌아보았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나야 공식적인 행사라서 곁다리로 따라나선 거지만, 우리 한 회장은 오늘 참으로 감회가 새롭겠소.”
“예, 사실 그렇습니다. 가슴이 설레고 떨리기도 하고…….”
“하하. 왜 아니겠어요.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한 회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김성욱이 엄지 척을 해보이며 지태를 추켜세웠다.
지태는 다시금 미소로서 감사의 묵례를 해보였다.
그랬다.
지태에게 있어 오늘은 실로 가슴 벅찬 날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