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악(4)
- 내가 장사꾼이었지 어디 평생을 무공이나 연마하던 무인은 아니잖은가. 그때 아프리카인지 어딘지 거기에서 내가 가진 능력을 다 쏟아 부은 뒤로 몇 날 며칠을 병상에 드러누워 있었는지, 자네가 알기나 아는가?
‘귀신도 병에 걸리고 아프기도 합니까, 어르신?’
- 저승은 사람 사는 데가 아냐? 여기에서도 영적으로 몸살을 심하게 앓곤 한다네.
‘그래서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닙니까?’
- 부탁하는 처지에 이리도 뻣뻣하게 목에 힘을 주다니……, 끄응!
최봉준은 못마땅하다는 신음성을 흘리고는 돌연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태의 몸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시에라리온의 국경을 넘어 기니로 쫓기던 아주 다급한 순간 발현되었던 바로 그 능력이었다.
짜르륵.
일순 머릿속을 불로 지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 끝으로 마침내 지태는 최봉준의 선물을 제 몸에 흡수했다.
피로회복제 백여 병을 한꺼번에 털어 넣은 것처럼 몸이 깃털만큼이나 가벼워졌다.
또한 야간 투시경을 눈에 장착한 것처럼 온 세상이 환하게 밝혀졌다.
지태는 환하게 열린 시선으로 서둘러 좌우를 살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화들짝 놀랐다.
발견하는 게 조그만 늦었더라면 아까 스파이더 폭탄에 당한 특전사 대원들처럼 찍소리도 못하고 통닭처럼 구워질 뻔했다.
특수부대 대원들이 당한 스파이더 폭탄은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폭탄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그들이 은폐해 있는 곳으로부터 전방 약 10여 미터쯤에 설치돼 있는 클레이모어였다.
지태는 주먹을 들어 모두를 제자리에 멈춰 서게 했다.
그러고는 최대한 몸을 납작 엎드리게 했다.
클레이모어가 이곳에 설치돼 있다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놈들이 은신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놈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지태는 포복 자세로 클레이모어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 갔다.
지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는 영문을 몰라 했지만 딴죽을 걸진 않았다.
아니, 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말소리는 물론 동작 하나에도 극도의 조심성을 요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긴장의 시선으로 지태가 하는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워낙 구렁이 담을 넘듯 은밀하게 다가온 덕분인지 클레이모어가 폭발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놈들은 아직 지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폭파 스위치를 누름에 망설일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지태는 땅에 박아 놓은 클레이모어를 살짝 들어 올려 뽑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정반대로 돌려서 다시 땅바닥에 꽂아 넣었다.
만약 놈들이 이쪽의 인기척을 느끼고 그 즉시 스위치를 누른다면 그것은 곧 놈들 스스로가 자폭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스위치를 누른다면 피할 새도 없이 폭발의 후폭풍에 당할 염려는 있었지만.
지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해상 수색 및 추적에선 별 진척이 없었다.
해상 작전을 펼친 지 약 한 시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 시간 동안 건진 것이라고는 백미항에서 약 3km쯤 떨어진 해상에서 놈들이 선장을 살해하고 탈취해간 어선을 발견했다는 것.
하지만 그 어선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놈들이 혹시 배를 버린 채 잠수 장비를 가지고 탈주 중일까 싶어 주변 바다를 샅샅이 훑고는 있었다.
김성욱은 백미항 주차장에 임시로 설치된 지휘 본부에서 인근 해도를 펼쳐 놓고 군경 지휘관들과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또로록.
전투용 조끼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에서 알림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스마트폰을 꺼내 살펴보던 김성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써 황소 눈알만큼 휘둥그레진 눈빛으로 그는 서둘러 문자 메시지를 읽어 나갔다.
그것은 지태로부터 온 문자였는데 놈들의 은신처를 발견했다는 전갈이었다.
[현재 시각에서 정확히 5분 뒤에 야산 정상 쪽으로 조명탄을 쏴주세요. 병력은 총격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투입해주시고요. 그전에 병력을 이동했다간 놈들이 먼저 알고 도망칠 염려가 있습니다.]
지태가 어디 허튼소리나 할 사람이던가.
그렇다면 한가하게 앞뒤 재며 복잡한 셈법을 따질 시간은 없었다.
김성욱은 일단 지태의 요구를 따르기로 했다.
그는 긴장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군경 지휘관들에게 문자에 적힌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 * *
클레이모어의 살상 반경은 50미터.
그러나 준 살상 반경 및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범위는 각각 150미터와 250미터까지 확대되는 무서운 대인 지뢰.
거기에 후폭풍도 꽤 위협적이다.
폭발 시 발생하는 후폭풍의 위력은 20미터나 돼서 후방에 있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놈들이 설치한 클레이모어의 위치를 정반대로 돌려놓은 지태는 동료들이 있는 곳까지 다시 후진해 왔다.
그리고 후폭풍의 영향을 받지 않을 지점까지 모두를 뒤로 물렸다.
또한 나중에 공격이 용이하도록 부채꼴 모양으로 전원을 포진시켰다.
이제 김성욱에게 부탁한 조명탄이 산 정상 부근에서 떠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와 동시에 이쪽에서 먼저 선제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러면 놈들은 즉각 클레이모어의 스위치를 누를 게 분명하다.
그다음은 지태가 예상하는 결과가 발생하게 될 것이고.
지태는 시간을 확인했다.
자신이 부탁한 시간에서 약 30초가량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 * *
납작 엎드려 숨죽이고 있는 중에 어디선가 밤의 적막을 깨는 요란한 포성이 울렸다.
꽈꽝.
번쩍!
그 순간 온 천지가 환한 대낮처럼 밝아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아키라가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그때였다.
전방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타타타타탕.
파파팍, 파파파파팍.
아키라와 내각정보조사실 요원들이 비트를 구축하고 들어앉은 둔덕으로 어지럽게 파편이 튀었다.
“후세로!(엎드려!)”
아키라가 외치면서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슈스케를 돌아보았다.
“하야쿠 오세!(어서 눌러!)”
슈스케는 아키라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클레이모어의 작동 스위치를 눌렀다.
꽈꽈꽈꽈꽝.
치면 울리듯 바쁘게 클레이모어의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한데 천지를 뒤흔들 만큼 요란한 폭음 뒤로 쇠구슬 파편이 오히려 그들을 덮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놈들은 피하고 말 시간도 없었다.
단지 후폭풍을 염려해 클레이모어로부터 넉넉히 50여 미터쯤 뒤에 자리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전방으로 뻗어 나가야 할 폭발이 왜 거꾸로 터져 자신들을 덮치는가.
“으악!”
“컥!”
파편에 맞은 요원 몇 명이 순식간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아키라 역시 날아든 파편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팔뚝과 어깨 등에 몇 개의 쇠구슬이 날아와 박혔다.
그 충격에 뒤로 벌러덩 넘어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생명이 위협받을 정도는 아니다.
돌아보니 슈스케가 고통으로 신음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놈을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현재 내 코가 석 자인 상황.
아키라는 충격 때문에 손에서 떨어져 나갔던 자동소총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난사하면서 살아있는 요원들을 향해 외쳤다.
“우테! 한게키시테 하야쿠!(쏴라! 반격해, 어서!)”
중경상을 입긴 했어도 아직 아키라를 포함해 대여섯 명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들이 대응 사격에 나서는 것을 보면서 아키라는 옆에서 신음하는 슈스케를 돌아보았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그가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슈스케의 몸을 굴려 자신의 앞에 고정시켜 놓았다.
그를 엄폐물로 삼으려는 속셈이었다.
* * *
“내래 우리 애들 셋을 데리고 좌측으로 올라가갔어.”
김영철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왼쪽으로 빠졌다.
그 뒤를 요원 셋이 눈치껏 몸을 날려 따랐다.
북한 최고의 전사 출신인데 어련히 알아서 행동할까 싶어 지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개를 돌려 오른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먹 싸움이 아니다.
총알이 날아드는 살벌한 판국이라서 이돈두는 나무 등걸에 몸을 바싹 붙인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지태가 소리쳤다.
“돈두야! 학수 데리고 넌 뒤로 빠져 있어!”
“야!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시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난 걱정 말고 너나 걱정하셔.”
자존심이 상한 듯 이돈두가 몸을 한 바퀴 굴리더니 다시 전방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권총 세 발을 마구 연사했다.
마치 ‘나 이런 놈이야!’ 시위하는 것 같았다.
지태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후안에게 외쳤다.
“자, 우리는 우측으로!”
“예, 보스!”
후안은 빠른 대답과 함께 지태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다 죽이면 안 돼. 한두 놈은 살려둬야 한다, 후안!”
“알고 있습니다, 보스!”
후안이 대답과 동시에 K2C 소총을 전방에 난사했다.
타타타타탕.
파파팟.
조명탄 불빛 속에서 놈들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곧 그들이 엎드려 있는 둔덕 쪽에서 파파팍 하며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고, 그 순간 놈들 중 하나가 바람 풍선처럼 손을 내젓더니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으억!”
두두두두두두.
그 위로 헬기의 요란한 로터 소리가 빠르게 접근해 왔다.
해상 작전에 나섰던 헬기들이 연락을 받고 급히 이곳으로 날아오는 듯했다.
이제 놈들의 반격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기껏해야 서너 놈이 총격을 간간이 해 대고 있는 실정.
그마저도 정조준 사격이 아니라 대충 머리 위로 총을 쏴 대는 수준이다.
그래 봐야 마지막 발악이다.
이미 상황은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
왼쪽으로 루트를 잡았던 김영철은 어느새 놈들의 머리맡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지태의 사인만 떨어지면 즉각 놈들의 머리통을 꿰뚫어버릴 준비가 된 상태였다.
“이 쥐새끼 같은 놈!”
그로부터 약 3분 후.
지태는 발끝으로 누군가의 목덜미를 사납게 찍어 누르고 있었다.
바로 일본 놈들의 대가리 아키라였다.
지태와 김영철이 앞뒤에서 지향 사격 자세로 내려오자 나머지 세 녀석은 제풀에 총을 내려놓고는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최후까지 권총을 난사하던 녀석이 지금 지태의 발밑에 깔린 아키라였다.
지태가 목덜미를 밟은 발목에 더욱 힘을 가하며 으르렁거리듯 아키라를 향해 내뱉었다.
“너 혼자 살아보겠다고 부하 놈을 엄폐물을 삼았냐? 그러고도 네놈이 대가리라고 할 수 있어?”
총에 맞아 신음하던 슈스케를 아키라가 주저 없이 엄폐물로 삼는 것을 지태는 아까 똑똑히 보았던 거였다.
“커억, 컥! 이누 치쿠쇼!(개자식!)”
아키라는 숨이 턱에 걸려 캑캑대면서도 이빨 사이로는 끊임없이 욕설을 흘려내었다.
“지태 동무 그 아새끼래 별로 쓸모가 없갔어.”
김영철이 고개를 가로 내저으며 말했다.
하는 싹수를 보니 나중에 일본 정부의 만행을 자백할 것 같지 않다는 뜻이다.
지태가 그를 향해 쓰게 웃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 새끼를 보는 순간부터 별로 정이 안 갔거든!”
“기럼 그 아새끼래 빼고 나머지 세 놈 중에서 정이 가는 간나 새끼를 골라야겠구만, 기래.”
“시간이 없어. 어서 두 놈만 골라. 김성욱 국장이 오기 전에!”
김성욱이 이곳에 당도한다면 단 한 녀석도 죽이지 못하게 막을 것이 틀림없다.
그전에 한두 놈만 살려두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 복수를 하려는 거였다.
말귀를 알아들은 김영철이 목 근육을 풀 듯 고개를 한번 꺾어 보이더니 복부를 끌어안고 끙끙 앓아대는 녀석의 대가리를 툭툭 걷어찼다.
“너 이름이 뭐네?”
“으으으. 와타시와 하야토, 데, 데쓰.”
“이 간나 새끼! 조선말로 내뱉으라!”
김영철이 놈의 복부를 독하게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