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악(2)
“어, 한 회장! 여기야.”
초등학교 정문에서 위병의 도움을 받아 지휘 본부 쪽으로 다가오니 김성욱이 손을 바쁘게 까닥였다.
“일단 좀 앉지.”
김성욱은 지태를 간이 철제 의자에 앉힌 다음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작전 상황을 설명해줬다.
“펜션 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특임대원들한테는 이정명 부장을 붙여 뒀어. 그리고 일본 애들이 포위망을 이미 벗어났을 거라고 추측은 되지만, 만에 하나 모를 일이니까 인근 향토사단 병력들로 하여금 산 둘레를 에워싸게 했네.”
당연한 조치여서 지태가 고개만 끄덕이자 김성욱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곧 공수여단이 야간 수색을 단행할 거야. 만약 놈들이 아직 산속에 있다면 잡는 건 시간문제일 거고.”
김성욱은 만약이라고 했지만, 지태는 후안의 추측에 더욱더 큰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정글 속에서 레인저 부대원으로 뼈가 굵은 그였다.
주변 상황을 읽어내는 눈은 후안이 훨씬 고수인 거다.
그러나 지태는 그들이 이미 야산을 빠져 나갔을 거라는 식의 군소리는 보태지 않았다.
이제부터 민간인인 자신은 작전에 관여할 권한이 없으니까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갑자기 초등학교 운동장에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그리고 특임대원 한 명이 지휘 본부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김성욱과 지태, 그리고 후안과 이돈두, 윤학수 등이 대관절 무슨 사태인가 싶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았다.
* * *
“자, 이제 모두 각자 마지막 잔을 들어라.”
조명철이 특작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쳐 가며 권했다.
조금은 슬프고 결연해 보이는 그의 미소가 대원들의 가슴을 콕콕 쑤셨다.
그 위에 대고 조명철이 말을 이었다.
“삶에 조금이라도 미련이 남는 동무들은 빠져도 좋다. 누가 뭐라 할 사람 없다.”
“일 없슴메다. 내래 한평생을 짧지만 굵게 살았댔시오. 당장 죽는다고 해서리 무에 아쉬울 게 있갔습네까.”
조명철의 우측에 앉은 대원이다.
그는 어깨를 활짝 편 채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조명철은 다시금 대원들을 훑어 나갔다.
“자, 그럼 이제 마무리하자. 너무 시간을 끌다간 더 많은 피를 보게 될 거야.”
“좋습네다.”
“까짓 거 공화국의 영웅들답게 멋지게 마무리를 하시디요.”
“조선 인민민주공화국 만세!”
“조선 인민민주공화국 만세!”
모든 대원들이 돌아가며 마지막으로 한마디씩을 날렸다.
그런 다음 종이컵을 일제히 머리 높이로 치켜 올렸다.
“자, 모두에게 영광이 있으라!”
조명철의 선창에 대원들이 따라 복창을 했다.
그러고는 높이 들었던 종이컵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 * *
“명철 동무래 시간을 달라는 거이 얼마나 되었네?”
김영철이 초조한 심정으로 물었다.
최명남의 경우엔 더욱더 피가 마르는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한숨처럼 대답했다.
“약 15분 정도 되었습네다.”
그때 뒤쪽에서 요란한 군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를 온통 까만색으로 무장한 병력들이 달려오고 있다.
707 특임대원들이다.
그들의 선두 그룹에 이정명 부장도 끼어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어서 김영철이 먼저 알은체를 하려 하자 이정명 부장이 서둘러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저 친구들은 댁들이 북에서 내려온 줄 모릅니다.”
이정명 부장은 입술에서 검지를 떼어내고는 특임대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지휘자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각자가 먼저 알아서 일사불란하게 펜션 주변으로 위치를 잡고 있었다.
평상시 훈련받은 매뉴얼대로.
“아, 기렇코만요. 알갔습네다. 되도록 말수를 줄이디요.”
김영철이 조금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정명 부장이 물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거기엔 약간 타박하는 듯한 느낌도 섞여 있었다.
왜 아직까지 대치만 하고 있느냐 묻는 표정과 눈빛.
김영철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아까 투항을 권유했고, 저짝 아새끼들이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좀 달라 했습네다. 그래서 기다리는 중입니다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닐까요? 그래서 얼마나 지났는데요?”
이정명 부장이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약 15분 정도 되었습네다. 저짝 아새끼들의 대빵이래 여기 명남 동무하고 군대 동깁네다. 기래서 투항을 권하고 있었댔시오.”
김영철이 최명남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정명 부장이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타앙.
탕, 탕, 탕, 탕!
첫 총성이 울린 이후 거의 동시에 네 번의 총성이 펜션 안에서 연달아 울려 퍼졌다.
이제 막 자리를 잡은 707 특임대원들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각자의 엄폐물에 자세를 잔뜩 낮춘 채 펜션을 향해 거총 자세로 임했다.
그렇다고 사격은 하지 않았다.
총성은 안에서만 들렸을 뿐 실탄이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정명 부장이 고개를 바짝 숙인 자세로 김영철을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지만 김영철의 입에서는 이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쉬는 그의 옆에서 최명남이 절망적인 모습으로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이정명 부장은 그제야 펜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군 측 피해가 전혀 없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침울한 낯빛을 띠고 있는 두 사람 앞에서 차라리 홀가분하다는 자신의 기분을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정명 부장은 그저 ‘허허, 이거 참!’하고 탄식만 쏟아낼 뿐이었다.
* * *
참으로 끔찍한 장면이었다.
비닐하우스 옆 논둑 아래를 지켜보던 지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용변을 보던 노인 하나가 미처 바지춤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여러 곳이 난자당한 채 죽어있었다.
옆에 있던 김성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벌써 여길 빠져나간 것이 확실하구먼……. 그나저나 이 노인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거야, 원.”
“입막음하려던 거겠지요.”
이돈두가 땅바닥에 침을 퉤 뱉으며 거들었다.
김성욱은 떫게 입맛을 다시며 어두운 저편을 바라보았다.
공수여단 대원들과 707 특임대원들이 건너편 앞산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펜션이 자리하고 있는 야산은 이미 볼 장을 다 봤다.
일본 놈들은 이미 산을 빠져나갔고, 북측 특작대 요원들은 스스로 자폭했다.
이제 남은 것은 도망친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소속 요원들을 검거하는 일이다.
이들은 절대 사살해서는 안 되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검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국제사회에 일본의 만행과 음모를 낱낱이 밝혀야 하는 까닭이다.
김성욱이 이를 악무는 사이 지태가 그의 팔뚝을 콕 찍었다.
왜 그러냐는 식으로 돌아보며 눈빛만으로 이유를 물어오고 있었다.
지태가 꽤나 무겁고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김성욱을 잠시 쳐다보았다.
“왜, 뭔데?”
“쪽발이들을 전부 다 살려둘 생각은 아니죠?”
“무슨 말이야?”
“보셨다시피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새끼들입니다. 살려둘 이유가 없단 얘기죠.”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안 돼! 그럼 증거가 없어져. 이 만행의 배후가 일본이라는 증거 말이야.”
“그럼 한두 놈만 살려두시죠. 입을 열 만한 새끼로 해서.”
“허, 참!”
김성욱은 혀를 찼지만, 지태의 말에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놈들을 소탕하더라도 이제부턴 자네 소관이 아니야. 임지은 씨도 무사히 구해냈지 않은가. 그럼 이제 자네가 이 작전에 관여할 이유는 하나도 없단 말이지.”
“왜 없습니까? 복수가 남았는데요. 내 여자를 건드린 것에 대한 복수.”
“어허! 이봐, 한 회장!”
“방해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작전 구역이 아닌 곳에서 제 나름대로 움직이는 것까진 봐주시겠죠?”
“지금 전국이 다 작전 구역인데, 아닌 곳이 어딨어?”
김성욱이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쾅, 콰콰콰쾅!
강력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폭발음이 들린 방향으로 모아졌다.
바로 특전사 대원들이 달려갔던 야산 쪽이었다.
그 순간 제2, 제3의 폭발이 이어졌다.
폭발하면서 피워낸 화염과 섬광이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 * *
폭발로 인해 사망한 대원은 모두 여덟이었다.
폭탄의 종류는 일명 스파이더 폭탄으로 원격 조종하는 게 기본 시스템이지만, 이번 같은 경우엔 가느다란 낚싯줄을 늘어뜨려 그것을 터치하는 순간 폭발하게끔 만든 것과 원격 조종을 병행했다.
두 개의 스파이더 폭탄은 줄을 늘어뜨린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원격 조종으로 터뜨렸는데 파편을 본 폭탄 전문가는 미제를 모방한 일제가 확실하다고 했다.
“이 간나 새끼들이래 이제 막 나가는구만, 기래.”
30분 전에 펜션에서 내려와 지태와 합류한 김영철이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지태가 잠시 눈길을 주었을 뿐 곧 고개를 돌려 어둠에 묻힌 전방을 쳐다보았다.
폭탄이 터진 이후 다들 경황이 없는 틈을 노려 지태는 단독 수색을 허락해주라고 김성욱을 더욱 압박했다.
그러자 그는 마지못해 승낙을 해주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마음이 급하고 바쁜 터라 지태와 말씨름을 할 여력이 없어서였다.
대신 이 일대 작전 구역을 너무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한 만에 하나 놈들을 먼저 발견하거든 단독으로 처리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도 했다.
일단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나 눈빛으로 가늠하고 있는데 후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보스!”
“응.”
“놈들이 야산에 폭탄을 설치해둔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함입니다.”
지태 역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여서 지태는 대답 대신 빤히 쳐다보았다.
사설은 그만 두고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재촉이다.
“시간도 벌고 이쪽의 발걸음을 묶어두기 위한 수작이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글쎄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다니까.
지태는 그런 시선으로 후안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금 본론을 재촉했다.
후안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놈들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는 우리 군 지휘부의 역량이 눈에 훤히 보이고 있었다.
현재 폭탄이 터진 야산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채 헬기와 조명탄 등을 동원해 정밀 수색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저 같으면 일단 바닷길을 이용하겠습니다. 육지에 온통 신경이 가 있는 이때를 노려 바다를 탈출구로 삼을 거라는 얘기지요.”
“고조 내 생각하고 딱 일치하는구만, 기래.”
김영철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매우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지태가 고개를 까닥이며 모두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꾸물댈 시간이 없었다.
다음 행보가 정해졌으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서 이동하자.”
지태는 근처 바닷가 쪽으로 모두를 이끌었다.
놈들이 배편을 이용해 가장 신속하게 빠져나가려면 여기에선 백미항이 가장 가깝다.
약 2km 정도를 달리니 항구가 나왔다.
포구라고 해도 될 만큼 아주 작은 항구다.
“어! 저기 웬 사람들이 몰려 있는데?”
이돈두가 굳이 손끝으로 가리키지 않았어도 지태는 이미 그곳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백미항 방파제 쪽에 동네 주민들로 보이는 수십 명이 모여 있는 것이다.
사복 차림에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그들을 다가오자 주민들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뒤숭숭한 시국이었다.
혹시 진돗개 발령의 이유가 이들 때문은 아닌가 하는 눈초리들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새마을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쓴 60대 가량의 남자였다.
지태가 앞으로 나섰다.
“우린 정보기관에서 지원 나온 사람들입니다. 근데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지태의 설명이 있었지만 아직은 의심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새마을 모자가 대답했다.
“저, 저곳에…….”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지태와 일행은 시선을 가져갔다.
방파제 아래 개펄 속에 시신 한 구가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