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악(1)
지태는 산을 오르는 도중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산 아래에 두고 온 지은이 자꾸만 걱정되고 신경 쓰이는 까닭이다.
납치의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기도 전이다.
그런 그녀를 잠시 잠깐이라도 위로해줄 시간도 없이 냉정하게 떼어 놓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태는 친위대원들을 시켜 지은을 산 아래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라고 해둔 상태였다.
그때 옆에서 이돈두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거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랜턴을 밝힌 채로 놈들의 뒤를 쫓을 수가 없으니 장님처럼 대충 더듬어 가며 산을 타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잡목들이 우선 발목을 잡아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고, 삐죽삐죽 튀어나온 잔가지들이 이곳저곳을 찔러 대고 있는 형편이다.
해발 100여 미터에 불과한 작은 야산이지만,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 없이 길을 헤쳐가야 하는 그들에겐 히말라야 산맥처럼 험준하게만 느껴졌다.
“놈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야. 어차피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건 똑같다.”
그러니 투덜대지 말라는 거다.
지태의 핀잔에 이돈두가 쓴맛을 다시고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 나갔고, 윤학수가 바늘 가는데 실 따라 가는 것처럼 그 뒤를 바짝 따랐다.
그들과는 달리 후안의 몸놀림은 능수능란했다.
지태는 그의 몸짓과 행동을 보면서 정글에서 다져진 필리핀 특수부대의 상사 출신답다는 생각을 했다.
후안은 자신만 믿고 따르라는 듯 산 정상 쪽이라 여겨지는 곳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두두두두두두.
그때 적막한 밤공기를 찢어내듯 멀리서 헬기의 로터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지태의 스마트폰이 진동으로 떨어 댄다.
액정에 뜬 이름은 김성욱이었다.
지태는 큰 소리로 떠들 수 없어 잔뜩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예, 국장님.”
- 놈들을 한곳에 붙들어 두었나?
“아뇨. 북측 애들은 잡아두고 있습니다만, 일본 애들은 지금 야산으로 튀었습니다.”
- 허허, 이거 꽤나 골치 아프게 생겼네. 암튼 지금 707 특임대 애들이 가고 있어. 인근에 있는 공수여단도 곧 당도할 거야.
“예, 헬기 소리가 들립니다.”
- 인근 군부대들도 거의 다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어. 주변을 곧 봉쇄할 수 있을 거야. 근데 자넨 지금 어딘가?
“김영철이 펜션에서 북측 애들을 묶어두고 있고, 전 지금 일본 애들을 뒤쫓고 있습니다. 야산 쪽입니다.”
- 알겠네. 암튼 야산 전체를 꽁꽁 묶어두면 되겠구먼.
김성욱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지태는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전방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세 그림자가 지시를 기다리는 것처럼 멈춰 서있다.
지태가 낮게 말했다.
“어서 올라가.”
* * *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 본다면 훈련 뒤 회식 자리라도 열고 있는 줄 착각할 듯싶다.
조명철과 북측 특작대 요원 넷은 거실 바닥에 빙 둘러 앉아있었다.
그 앞에는 종이컵과 소주병 여러 개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왜 그럴까.
모두의 표정에서 긴장감이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참으로 평온한 얼굴들이었다.
짐짓 미소까지 피워 대는 걸 보면 회식 자리라고 해도 가히 손색이 없을 터였다.
“조장 동지!”
“왜?”
요원 하나가 부르자 조명철이 마음씨 착한 직장의 상사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거이 말하자면 예수쟁이들이 일컫는 최후의 만찬인가 뭔가 기런 거디요?”
“최후의 술자리라고 해야 맞갔지. 우리가 지금 저녁밥을 먹는 것은 아니잖나.”
“엎치나 메치나! 기거이 기거 아니겠네까!”
순간 조명철이 해맑게 웃던 표정을 바꾸며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요원들을 찬찬히 훑어갔다.
하나하나를 두 눈 가득히 담아가듯이.
“너희들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할 거이 뭐가 있갔습네까. 이 나이가 되도록 공화국의 위대한 전사로 살다가 이렇게 가는 것도 영광이갔디요.”
“영광? 그건 좀 아닌 듯싶다. 우리는 공화국을 배신한 반역자가 아닌가. 비록 뜻은 거룩했다 하지만 어쨌든 실패로 끝난 혁명이니 우린 죽어서도 결코 영광을 얻지는 못할 거다.”
바로 그때였다.
“이보라, 조명철이! 거기 내 말 들리네?”
펜션 밖에서 뜻밖에도 조명철을 불러 대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게 아주 귀에 익숙한 목소리인 듯 조명철이 피식 웃었다.
바로 군 입대 동기이자 한때는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던 최명남이다.
현재는 모시는 상관의 사상이 다르고 노선을 달리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친구의 목소리는 여하튼 반가웠다.
“저 자식 목소리 큰 건 여전하구만.”
조명철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신의 소총을 집어 들더니 현관문 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 * *
펜션 뒷문을 이용해 산속으로 도망친 아키라와 내각정보조사실 요원들은 8부 능선쯤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곧장 반대편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토마레!(멈춰!)”
가장 앞서가던 아키라가 한 손을 들어 요원들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시므니까?”
아키라의 뒤꽁무니만 보고 따라오던 슈스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저길 봐.”
아키라가 검지로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불이 환하게 밝혀진 운동장이었는데 얼핏 초등학교 정도로 보였다.
운동장엔 두 대의 헬기가 착륙해 있었고, 무장한 병력들이 속속 내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병력들을 가득 태운 2.5톤 군용트럭들이 줄지어 달려오는 것도 보였다.
그 트럭 행렬은 거의 백여 대는 족히 돼 보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 모두 엿 될 뻔했다.”
아키라가 입가에 소리 없이 음흉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턱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최대한 빨리 여길 벗어나자.”
그들은 좀 더 걸음을 재촉해 산을 내려왔다.
아키라는 산을 넘는 동안 머릿속에 이미 도주 방향을 계획해둔 듯 도로를 가로지르자마자 백미항 쪽으로 부하들을 이끌었다.
바다를 끼고 이곳을 우선 벗어난 다음 그대로 북상하여 서울로 잠입해 들어가려는 거다.
서울에서 상황이 좀 잠잠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틈을 봐서 일본으로 넘어가려는 의도였다.
마을을 피해 논과 밭길로 난 좁은 길로 얼마쯤 걸었을까.
실내를 환하게 밝힌 대형 비닐하우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히 주변엔 그 어떤 인적이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이 최대한 몸을 낮춘 걸음으로 비닐하우스 옆을 이제 막 스쳐 갈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오는 사람들, 누구셔?”
앞장서 가던 아키라가 화들짝 놀랐다.
순간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손에 든 자동소총을 앞으로 겨눈 채 전방을 똑바로 주시했다.
“거기 누구시냐니까?”
여전히 어둠 저 너머에선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음성만 들렸다.
그건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약간은 당황스러워하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아키라가 얼른 대꾸를 날렸다.
“여행객인데 길을 좀 잃었습니다. 그런데 아저씬 누구십니까?”
“아! 난 이 동네 사람이오만. 저기 보이는 하우스 주인이기도 하고.”
아키라는 더욱 더 눈을 크게 뜨고 음성이 들려오는 쪽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제야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논둑 아래에서 머리만 살짝 내비치는 정도였다.
아마도 쪼그려 앉아서 큰 용변을 보는 중인 듯했다.
“아, 그렇습니까?”
아키라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엔 생선 비린내 같은 비릿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러고는 곧 뒤에 서 있는 슈스케를 가만히 불렀다.
“슈스케! 이리 와봐라.”
“하이!”
* * *
“입장을 바꿔 놓고 명남 동무가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하갔나? 손들고 투항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갔나?”
조명철이 반쯤 열린 현관문 뒤에 몸을 가린 채 외쳤다.
항복을 권유하던 최명남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조명철의 말마따나 만일 자신이 그의 입장이 되었더라도 결코 제 발로 걸어 나와 투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조명철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비록 서로 상반된 정치적 신념과 아집으로 인해 적대관계에 놓여 있다지만, 군 입대 동기이자 그 누구보다 절친이었던 조명철을 이리 허무하게 잃기는 싫었다.
“기렇다고 개죽음을 자초하갔다는 거이네? 이보라, 명철 동무. 그러디 말고 투항하라. 나랑 같이 공화국에 가서리 합당한 처분을 받자우. 공화국도 동무의 처지를 리해할 거이야. 동무래 직속상관의 명에 충실히 따른 죄밖엔 없디 않간. 그거이 참군인 아니갔나.”
“일 없다. 너무 애쓰지 마라, 명남 동무.”
그 둘 사이로 김영철이 성급히 끼어들었다.
“이보라, 조명철이! 동무래 이 김영철의 이름을 들어봤네?”
“……!”
조명철로부터 이렇다 할 반응이 나오지 않자 김영철이 재차 물었다.
“동무래 나를 모르갔네?”
“내가 김영철 동지를 어찌 모르갔습니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의 전사이면서 모든 군인들의 영웅이신데.”
“길타면 내래 한마디 하갔어. 기냥 조건 없이 투항하라. 이 자리에서 투항한다고 해서리 동무래 비겁한 전사라고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그리고 내래 공화국에 돌아가면 동무가 어쩔 수 없이 늙은 반동 새끼들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알아듣게 말해 주갔어.”
조명철이 소리 나지 않게 입으로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갔습니까? 나를 믿고 따라나선 동무들을 설득할 시간 말입니다.”
“시간이 그리 많티 않아. 남조선 특수부대 아들이래 벌써 도착했어야. 걔들이 오면 나도 어쩌디 못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조금만…….”
그 말을 끝으로 조명철은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김영철이 뭔가 개운치 못한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 내저었다.
* * *
앞장서 가던 후안이 부러진 잡목의 가지들을 손끝 촉감으로 살폈다.
그러더니 뒤돌아 지태를 불렀다.
“보스!”
“응.”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볼 때 놈들은 이미 산을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으음.”
지태가 신음성을 흘렸다.
후안의 권유에 따라 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고 8부 능선쯤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게 벌써 20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산을 거의 다 내려온 상황이었다.
산 아래 150여 미터 전방에 불을 환하게 밝힌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후안의 추측이 맞는 거라면 이건 큰 낭패였다.
놈들이 벌써 이 산을 빠져나갔다면 이제 또 어디서부터 수색해야 한단 말인가.
지태가 아득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내려가 보자.”
영어를 듣는 귀는 어두워도 눈치 하나는 빠삭한 이돈두였다.
그는 일단 밑에 내려가서 대책을 세우자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래. 네 말대로 일단 내려가서 지원을 받는 게 낫겠다.”
“그나저나 펜션 쪽은 왜 이리 조용한 거냐?”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이돈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잖아도 지태 역시 아까부터 그 생각이었다.
‘뭐가 잘못되어 가는 건 아니겠지?’
지태가 속으로 우려를 표할 때였다.
뷔이익, 뷔이익.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지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얼른 발신자를 살폈다.
김성욱이다.
“예, 국장님.”
- 지금 어딘가?
“아직 야산입니다. 근데 놈들을 놓친 것 같아요.”
- 일본 놈들?
“예.”
- 북측 애들은 김영철이 잘 붙들고 있지?
“예, 국장님.”
- 펜션 쪽으로 특임대 애들 몇이 올라갔어. 거긴 곧 정리할 거야. 참, 나는 지금 산 아래 초등학교에 와 있네. 자네도 일단 이리 내려오지.
지태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