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를 뿌려라(5)
청담동소재 특급호텔의 라운지 바.
지은은 오도희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 아침 호텔에서 지태가 들려준 말도 있고, 또한 현재 시국이 시국인 만큼 머릿속이 뒤숭숭하기가 그지없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취할 때까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도희야, 오늘은 우리 이것만 마시고 일어서자.”
지은은 금방 마시고 비워져 있는 오도희의 와인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테이블 한쪽으로 밀어 놓은 와인 병엔 아직 삼분의 일 정도가 남아있는 상태.
오도희가 술이 채워진 와인 잔을 성급하게 입으로 가져가면서 밉지 않게 흘겼다.
“이럴 거면 나는 뭐 하러 불렀니? 괜히 입만 적시다 말겠네.”
“넌 무슨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서운한 소리만 골라서 하니. 술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마음 편하게 불러낼 친구가 없잖아?”
“헐! 적반하장이네. 난 그 소리가 더 서운하다는 걸 왜 몰라, 이것아! 그러니까 결국은 나를 너의 술상무로 불렀다는 얘기 아냐?”
“어머, 얘는 말을 해도 꼭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하네!”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지은이 위기 모면 차원에서 지레 눈을 흘겼다.
그러자 오도희가 배시시 웃었다.
당황해하는 지은의 모습이 귀엽다는 투였다.
“오늘 같은 날 지태 씨나 부르지 그랬어?”
“정신없을 거야, 지금.”
“왜 정신이 없…….”
오도희가 무심코 되묻다가 곧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그러네. 오늘 하루 종일 이것저것 대책 세우느라 골치 좀 아프겠다. 오늘 보니까 한스그룹 계열사 주가가 확 떨어졌던데?”
“어디 비단 한스뿐이겠니!”
지은은 씁쓸한 표정으로 와인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북한 군부 내 몇몇 강경파들의 뜻하지 않은 도발로 인해 남북 경협 사업 관련 주식들이 일제히 하한가를 친 하루였다.
한스그룹과 파트너십을 구축한 부경물산도 그동안 줄곧 상한가를 쳤지만, 오늘만큼은 장중 한때 하한가까지 내려갔었다.
“그래서 우울했던 거야?”
오도희가 흘깃 지은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은이 씁쓸하게 웃었다.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데? 혹시 지태 씨와 관련된 거니? 설마 벌써 다툰 거야, 재회의 단맛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럼 뭔데, 이것아!”
불끈 목소리를 높이는 지은을 보며 오도희가 입술을 삐죽였다.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지은은 제 혼자의 감상에 푹 젖은 목소리를 냈다.
“그냥, 그래. 오늘 마법 걸린 날도 아닌데 괜히 우울해.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왠지 불안한 마음도 들고.”
그녀를 흘깃 돌아보며 ‘시 쓰고 계시네.’하는 눈빛을 보내던 오도희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정신과 상담의사처럼 말했다.
“야! 너 하는 짓 보니까 딱 그 진단각이 나온다.”
“……?”
“앓이, 사랑앓이각!”
“헛!”
오도희의 시답잖은 단언에 지은이 헛웃음을 삼켰다.
“너 슬슬 헛소리를 해대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좀 더 빨리 일어서야겠다.”
“야아~ 벌써?”
“벌써가 뭐야. 어느새 밤 10시가 훌쩍 넘었어.”
지은이 일방적으로 내뱉고는 주섬주섬 자신의 클러치백과 겉옷을 챙기며 일어서자 오도희가 아쉬운 듯 와인 잔을 급히 비우고는 따라 일어섰다.
지은이 계산을 하는 동안 오도희는 카운터 한쪽에서 대리 운전기사 둘을 불렀다.
계산을 마치고 두 사람이 호텔 현관 앞으로 이제 막 걸어 나왔을 때였다.
“대리 부르셨죠?”
어떤 사내 하나가 두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와 물었다.
“어머!”
오도희가 놀란 눈빛으로 탄성을 질렀다.
콜을 한 지 겨우 5분도 채 안 지났다.
그사이에 벌써 대리 기사가 달려온 것이 놀랄 수밖에.
“와, 진짜 번갯불에 콩 구워 먹겠어요. 어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아, 마침 근처에 있다가 콜을 받았습니다. 근데 한남동으로 가시는 분이 어떤 분……?”
“저예요.”
지은이 대답하며 자신의 승용차 스마트키를 내밀었다.
“도희야, 미안! 호출은 네가 했는데 가는 건 내가 먼저네.”
“나야 집이 가깝잖아. 먼저 들어가.”
“그래. 집에 들어가는 대로 전화할게.”
“응!”
지은은 아직도 술자리를 이렇게 끝낸 것이 너무도 아쉽다는 눈빛을 쏘아대는 오도희의 배웅을 받으며 자신의 승용차에 올랐다.
* * *
김영철과 북측 요원들을 태운 특수 밴 차량이 자유로를 빠져나와 강변도로에 진입할 즈음이었다.
뷔이익, 뷔이익.
지태는 지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현재 오도희와 간단히 술을 마신 뒤 대리 기사를 불러 한남동으로 귀가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은이 되물었다.
- 자긴 어딘데?
“어, 그게…… 밤늦게 약속이 잡혀서 누구 좀 만나고 있어.”
김영철 일행의 방남은 극비 중에 극비여서 아무리 지은이라 해도 그 사실을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듬거리며 대충 둘러댔다.
지태의 변명에 지은이 돌연 묘한 콧소리를 흘렸다.
- 자기 혹시 여자 있는 술집에서 약속 잡은 건 아니지?
“뭐어? 내가 어디 그런 데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 어디 좋아서 가는 건가. 접대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갈 수도 있는 거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공주님. 그나저나 길게 통화 못해. 그런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다른 이야길 해봐.”
- 다른 어떤 거?
지은은 제 말끝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물음에 묘한 뉘앙스가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바로 그때였다.
지은이 뭔가에 깜짝 놀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 어머, 아저씨!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여긴 한남동으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
“뭔데? 왜 그래?”
지태가 급히 끼어들며 물었다.
- 아니, 지금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
지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대리 운전기사의 말소리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 아, 미안이노 하므니다. 내가 서울 길이 조금 어두워서.
- 뭐, 뭐라구요?
황당해 하는 지은의 목소리가 그 위로 겹쳐졌다.
순간 지태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대리 운전기사의 말투 때문이다.
누가 들어도 그것은 일본인 고유의 말투였다.
* * *
“당장 차 세워요.”
뒷좌석의 지은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대리 운전기사가 룸미러를 통해 씩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지극히 교활해 보였고, 잔인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이거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바로 그 순간이다.
승용차가 돌연 도로 한쪽에 정차를 했다.
그 틈을 노려 얼른 차에서 뛰어내리려는데 조수석 문이 먼저 열리고 거의 동시에 양쪽의 뒷문이 동시에 벌컥 열렸다.
건장한 사내들 셋이었다.
지은은 순식간에 옴짝달싹 못할 처지에 놓여버렸다.
“다, 당신들 뭐예요? 누구야, 당신들?”
그러나 그녀의 물음은 금세 무시당했다.
지은의 오른쪽에 앉아있던 슈스케가 일본말로 운전대를 잡은 사내에게 명령했다.
“슈파츠시떼!(출발해!)”
“하이!”
“다, 당신들 일본 사람들이야?”
“그건 이미 알았을 테니 헛소리 집어치우고, 그거나 이리 내놔!”
슈스케가 싸늘하게 내뱉으며 지은의 손에 들려 있던 스마트폰을 빼앗아갔다.
* * *
지태는 다급했다.
극도의 초조함으로 계속해 지은을 불렀다.
“지은아, 지은…….”
그때였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비웃음을 담은 비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흐흐흐.
“너 누구야?”
- 한지태, 너를 무척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지태는 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조급함을 지웠다.
지레 흥분을 앞세우면 놈과의 기 싸움에서 선수를 빼앗기거나 자칫 놓칠 부분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태는 소리를 죽여 날숨을 뱉어낸 다음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나를 아나?”
- 알다마다. 네놈이 하루에 몇 번이나 숨을 내쉬는 것까지도 우린 속속들이 다 알고 있거든!
“왜지? 사업 때문인가? 내 라이벌 기업으로부터 청부라도 받았나?”
- 라이벌 기업? 흐흐, 어쩌면 그럴지도.
“원하는 게 뭐야? 임지은 씨는 왜 납치하려는 건데?”
- 급할 거 없어. 협상은 천천히 하도록 하지. 아직 시간은 많고 밤도 아주 길 테니까.
“원하는 게 돈이야? 얼마를 원하나?”
뚝.
그 순간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이런 개새끼!”
지태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김영철과 김성욱의 양쪽 볼도 굳은살이 박인 것처럼 앙다물어져 있었다.
지태가 스피커폰으로 돌려놨기 때문에 두 사람도 이미 사태 파악을 한 거다.
“역시 다음 타깃은 자네였나 보군.”
김성욱이 미간에다 골을 세 줄씩이나 그리며 중얼거렸다.
“기렇다고 여성 동무를 납치하는 게 말이나 됩네까? 간나 새끼들, 사내새끼도 아니구만, 기래.”
지은이 지태의 연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김영철이어서 그 분노의 색깔은 더욱 붉고 짙었다.
그사이 지태는 스마트폰의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아직 전원이 꺼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놈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원을 일부러 꺼두지 않은 것을 보면 지태를 유인하려는 수작으로 보였다.
어차피 위치 추적을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잠시 지켜보던 김성욱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스마트폰을 힘없이 내려놓는 지태를 보면서 배턴 터치하듯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 외치듯 명령을 내렸다.
“전원 비상이다! 지금 당장 부경그룹 임지은 씨 스마트폰 위치 추적하고 폰이 움직이는 방향의 모든 CCTV를 전부 다 확인해!”
갑자기 밴 내부가 부산해진 느낌이었다.
아니, 바윗돌에 깔린 것처럼 묵직하기만 했다.
* * *
자정을 20여 분 남겨둔 시점이었다.
이돈두는 DD엔터테인먼트 김유창 대표에게 격려와 더불어 칭찬의 술자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DD엔터의 간판으로 성장한 민희에 이어 새로 키워낸 남자 아이돌그룹이 현재 대박을 치는 상황이었다.
김유창 대표의 뛰어난 기획력과 경영 능력이 빛을 발한 결과물이었다.
“이봐, 김 대표!”
“예, 회장님.”
“내가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 수 있게 앞으로도 더욱 분발해줘.”
이돈두가 김유창 대표의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잔을 받으며 조금은 아부하는 듯한 목소리가 깃든 김유창 대표의 화답이 있었다.
“저는 오로지 회장님께서 지시하는 대로만 따를 뿐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엇나가지 않도록 잘 이끌어 주십시오.”
“허허, 나 같은 무식쟁이가 이끌긴 뭘 이끌어. 나야 돈만 대주는 물주에 불과한 것을!”
비록 말은 그리했어도 이돈두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은가.
이돈두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금방 지워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띠리리리릿, 띠리리리릿.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이돈두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옆자리에 바짝 붙어 있던 윤학수가 스마트폰의 액정을 먼저 확인한 뒤에 이돈두를 쳐다보았다.
“회장님, 지태 형님이십니다.”
“어, 한 회장?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이돈두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얼른 스마트폰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반갑게 응답했다.
“어, 친구야!”
- 혹시 잠자는 걸 내가 깨운 건 아니지?
“품고 잘 와이프도 없는데 벌써 잘 시간이겠어. 근데……?”
가볍게 농담을 흘리던 이돈두가 뒤늦게 쓴맛을 다시며 말꼬리를 흐렸다.
생각해 보니 조금 전 지태의 음성이 물먹은 솜처럼 너무도 축 가라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왜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어?”
- 어, 조금! 저기 미안한데 지금 당장 애들 좀 동원할 수 있을까?
“애들 동원하는 건 일도 아닌데……. 무슨 일인데 그래?”
되묻는 이돈두의 말에 폰 너머에서 지태의 깊은 한숨이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