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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53화 (253/272)

재를 뿌려라(2)

밤 9시.

지태는 유성락 부회장을 모시고 한스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호텔 현관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흠…….”

일각.

차량 유리창 전체가 검게 선팅이 된 승합차 한 대.

그 안에서 지태와 사장단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내들이 있었다.

불현듯 사내들의 대가리인 아키라가 비릿한 미소를 끌어 올렸다.

“저자가 한지태인가?”

“하, 옛, 조장님.”

아키라에게 그토록 주의를 받았건만 아직도 본능적으로 일본어가 튀어나오려던 슈스케가 얼른 한국어로 수정해 대답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현재 아키라의 온 신경은 오직 지태에게 향해져 있었다.

아키라가 입술 끝을 독하게 끌어올리며 물었다.

“내가 보기엔 그저 평범한 사업가 같은데, 저놈이 그리도 강하단 말인가?”

“저 한지태라는 놈은 태권도를 비롯해 각종 무술을 연마해 도합…….”

“알아, 나도! 게다가 UDT 출신이라는 것도.”

지태에 대한 프로필은 이미 보고서를 통해 소상하게 알고 있는 아키라였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겉으로 드러난 지태의 모습은 일반인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때 슈스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장님, 오늘 밤에 당장 작업에 들어가는 겁니까?”

“아니! 서두를 거 없다. 저놈을 제거하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의 1순위도 아니고. 그전에 먼저 터뜨려야 할 곳이 있다.”

“그렇다면……?”

“그래. 북조선에서 먼저 사인이 날아올 거다. 우린 거기에 발맞추어 작전을 개시하면 되는 것이고. 그때까지 모두 긴장의 끈을 풀지 마라. 알겠나?”

“옛!”

절도 있게 대답을 마친 슈스케가 아키라를 흘깃 훔쳐보았다.

눈치로 알아챈 아키라가 물었다.

“왜?”

“저놈을 제거한 것도 북쪽 애들의 소행으로 넘길 생각이십니까?”

“글쎄, 그건 좀 더 사정을 두고 보자. 어떤 게 더 효과적일지는 상황을 봐 가면서 판단하는 게 나아.”

“옛, 알겠습니다!”

“오늘은 감시조만 남기고 우린 이만 돌아가자.”

말을 마친 아키라가 좌석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으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 * *

지태는 뒷좌석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만찬이 한창일 무렵 지은이 전화를 걸어왔었다.

길게 통화를 할 수 없어서 만찬이 끝나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었는데, 식사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답장을 주는 게 좀 늦어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지은은 전화를 받았다.

- 응, 자기야!

“미안해. 내가 좀 늦었지?”

- 괜찮아. 사장단 만찬은 다 끝난 거야?

“방금. 나 지금 그쪽으로 가는 중인데 아직 거기 있는 거지?”

- 어! 혼자 기다리기 멋쩍어서 도희 불렀어. 지태 씨가 오면 인사만 하고 갈 거래.

“그래. 늦어도 15분 안에는 도착할 거야.”

지태는 전화를 끊었다.

그가 통화를 마치기만 기다렸다는 듯 조수석에 앉아있던 박수연이 돌아보았다.

“회장님!”

그러나 지태는 박수연 대신 운전대를 잡고 있는 기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운전기사를 겸한 수행 비서였다.

“임 비서!”

“예, 회장님.”

임 비서는 시선은 전방에 그대로 둔 채 대답했다.

“나 조금 있다가 내려주는 대로 박수연 부장을 집 앞까지 태워다 줘요.”

“그럼……?”

“난 택시 타고 귀가할 거니까 걱정 말고.”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지태가 이렇게 나오니 딱히 할 말이 없어진 박수연이었다.

그러잖아도 지태의 분위기가 데이트를 하러 가는 모양새여서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부려 먹어 미안하네. 박 부장이나 임 비서한테. 두 분, 악덕 회장이라고 인터넷에 올리진 않겠지?”

미안한 마음에 지태가 말을 더 보태자 임 비서가 화들짝 놀라며 맞받았다.

“어휴, 무슨 말씀을 그리……. 아닙니다, 회장님.”

격하게 반응하는 임 비서를 보면서 지태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슈트 안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 들었다.

지갑을 펼쳐 5만 원짜리 지폐를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말없이 임 비서의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이, 이러시면…….”

“쉬는 날 아내분하고 애들한테 맛난 것 좀 사드리세요.”

“가, 감사합니다, 회장님.”

“수연 씨는 용돈 안 줘도 서운하지 않지?”

지태의 농담에 박수연이 멋쩍게 웃음을 날렸다.

“전 맛난 것 사줄 남편이나 애가 없답니다, 회장님.”

“너무 워커홀릭에 빠지지 말고 이제 슬슬 남친도 만들어, 수연 씨.”

“회장님 같은 분만 나타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박수연은 말을 하다 말았다.

그러고는 제풀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린 채 킥킥거렸다.

* * *

약속 장소인 라운지 바에 들어서자 오도희가 먼저 알아보고는 손짓을 했다.

지은이 등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그랬다.

“오랜만이에요, 지태 씨. 아니, 이젠 어엿한 회장님이신데 이름을 막 부르면 안 되는 건가?”

오도희가 그녀 특유의 발랄함으로 인사를 해왔다.

“나 놀려먹는 게 재미있어요?”

지태가 밝은 낯꽃으로 웃어주고는 지은의 옆자리에 당연하다는 듯 앉았다.

“그럼 이 불청객은 인사를 했으니 그만 일어설게요. 모처럼 두 분 나란히 있는 걸 보니까 내 마음이 다 흐뭇하네.”

“얘! 그래도 이건 아니다. 어떻게 지태 씨 오자마자 일어서냐?”

“그런가?”

“그래요, 도희 씨. 좀 있다 가요. 술 몇 잔은 나누고 가야죠. 우리도 오랜만에 보는 건데.”

“그럼 쬐끔만 더 방해할까? 헤헤. 딱 두 잔만 하고 갈게요, 전!”

오도희는 제가 꺼낸 말에 대해서 책임을 졌다.

약속대로 와인 두 잔을 마시자마자 자리를 비켜준 거다.

“오랜만이다, 그치?”

오도희가 자리를 떠나자 지은이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지태는 자리를 옮겨 앉지 않고 여전히 지은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게. 그래서 어색해?”

“어색한 건 지태 씨 아냐?”

“전혀! 모처럼 네 냄새 맡으니까 좋기만 한데, 뭘.”

“엉큼해, 정말!”

지은은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지만, 그의 엉큼한 말을 좋아라고 하는 티가 역력했다.

비단 술기운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양 볼은 이미 홍조를 띠고 있었다.

“참, 만찬하면서 새 법인 이야기는 꺼냈어?”

지은이 물었다.

지태가 그녀의 눈에 시선을 맞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경에서 어느 정도는 투자할 예정이라고도 말해줬고?”

“했지, 당연히. 근데 20% 이상은 투자하지 못하게 하라더라.”

“설마 우리가 새 법인을 장악할까 봐서?”

“우리가 20% 정도에 경영권이 흔들리겠어? 우리 한스그룹 알기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데?”

“어휴, 이제 좀 컸다 이거지?”

“어디 조금만 컸을까! 이젠 부경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되지.”

“너무 나갔다, 자기야. 아직은 안 돼. 멀었어!”

지은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곱게 흘겼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임지은은 이런 모습이 맞춤옷 같고 잘 어울린다고 지태는 생각했다.

“좋네!”

“뭐가?”

“그냥.”

“뭐가 그냥?”

“이렇게 너랑 나란히 마주 보고 있으니까 좋다고.”

“정말?”

되묻는 지은의 말에 지태는 뜻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읍!”

입술이 막힌 지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곧 적응했다.

어디 적응만 했을까.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지태의 입술을 제 안에 받아들였다.

입을 맞추는 사이 지은이 약간은 달아오른 숨소리로 물었다.

“오늘밤 같이 있을까?”

지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것을 묻는 그녀의 입술을 혼내듯 지태는 더욱 강렬하고도 저돌적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 * *

아키라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이번 작전에 쓰기 위해 구입한 대포폰이었다.

“호텔이라…….”

아키라의 입술에서 냉소가 새어 나왔다.

그 차가운 미소가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감시조로부터 조금 전 지태와 지은이 호텔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입가에 머물던 웃음기가 이내 사라졌다.

그러나 시퍼렇게 빛나는 날카로움은 그대로 살아있었다.

그가 옆을 돌아보았다.

눈빛이 마주치자 슈스케가 제풀에 놀라 움찔했다.

“부경그룹 딸하고는 이미 끝난 사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키라가 추궁하듯 물었다.

슈스케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지태와 지은은 이미 오래 전 헤어진 사이라고 했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근데 두 사람이 언제 다시 가까워졌을까요?”

순간 아키라의 눈썹이 위로 치켜졌다.

“코노 요우나 바카!(이런 머저리!)”

“스미마센 조초오사마!(죄송합니다, 조장님!)”

“됐다! 경고하는데 이제부턴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마라. 알았나?”

“하!”

그제야 아키라의 날카롭게 번뜩이던 눈빛이 겨우 풀렸다.

고개를 돌린 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웃음기가 다시 번져갔다.

매우 교활하면서 음흉해 보이는 미소.

* * *

중부 전선 비무장지대.

별빛마저도 졸음에 겨운 눈을 슬금슬금 비벼 대는 새벽 1시 무렵이다.

이제 막 북측 GP 지역을 벗어난 지점에서 다섯 개의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상, 하의 모두 검정색 전투 복장인 사내들이다.

거기에 눈만 빠끔히 내놓은 검은 두건을 머리에 쓰고 있다.

최대한 낮은 자세를 유지한 채 남쪽으로 향하는 그들의 동작은 마치 고양이의 낮은 포복처럼 날렵하면서도 은밀했다.

이윽고 남측 GP를 약 50여 미터쯤 앞둔 지점에서 사내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조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수신호를 보내자 나머지 사내들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왼쪽 가슴께에 꽂아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조장이 자신의 왼편에 있던 두 명의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에 약속이 된 듯 사인을 받은 두 사내는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죄더니 이내 몸을 움직여 옆길로 빠졌다.

두 사내를 잠시 지켜보다가 조장은 다시 남아있는 두 사내에게도 고갯짓을 했다.

그들은 등 뒤로 멘 자동소총을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한 다음 단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남측의 GP가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 * *

그 시각 평강군의 제5군단장의 집무실.

대외적으로는 549대련합부대라 불리는 이곳 군단장실에 뜻밖에도 김영철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의 총구가 군단장 양광철 상장의 관자놀이에 박혀 있었다.

“양광철 상장 동지! 날래 털어놓디 못하갔소? 놈들이 침투한 지역이래 어딥네까?”

그러자 양광철 상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체념한 듯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가 자조 섞인 시선을 들어 김영철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담배 한 대 피울 시간 좀 주갔나?”

순간 김영철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최명남이 발끈했다.

“이 반동간나 새끼, 개수작 떨디 말라!”

“최명남이! 나서디 말라. 그카고 담배 있음 그거나 꺼내보라.”

김영철이 최명남을 제지한 다음 그에게서 건네받은 담배를 양광철 상장에게 내밀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양광철 상장이 한숨처럼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이렇게 불쑥 찾아온 걸 보면 하철민 상장이 다 털어놓은 모양이지?”

“하철민 사령관 동지의 자백을 받아낼 때까지 꼬박 이틀이래 걸렸습네다.”

“자백이라……. 늘그막에 꽤나 얻어 터졌갔구만, 기래. 특작사령부는 쑥대밭이 되었갔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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