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52화 (252/272)

재를 뿌려라(1)

아키라라고 불린 사내가 선글라스를 사납게 벗었다.

그러자 짐짓 인상을 쓰고 있던 표정이 훤히 드러났다.

칼로 찢어 일부러 치켜세운 듯한 눈꼬리가 사선으로 올라가 있는데다가 눈마저 작아서 교활해 보이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교활함에서 그치지 않고 잔인함이 송곳처럼 밝은 갈색을 띄는 동공에 박혀 있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인정머리라고는 어디 한 군데 찾아볼 수도 없는 전형적인 냉혈한처럼 보였다.

아키라가 입에 척척 감기는 한국어로 방금 인사를 해온 사내를 꾸짖었다.

“슈스케, 작은 틈이 둑을 무너뜨린다. 우린 완벽하게 조센징 행세를 해야 돼. 이제부턴 조센징들의 말을 써라. 놈들의 말에서 역겨운 기무치 냄새가 나긴 하겠지만,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까진 어쩔 수 있겠나. 알겠어?”

“하이! 아니, 예!”

아키라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더니 물었다.

“물건은?”

“이틀 전 울진 근처 해상에서 건네받아 현재는 서울 숙소에 갖다 놨습니다.”

“한스그룹의 한지태라는 놈은?”

“요원 두 명이서 이십사 시간 밀착 감시 중에 있습니다.”

슈스케의 대답에 아키라가 만족스럽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승합차를 가리켰다.

“일단 올라가자.”

“하이!”

“쓰읍!”

다시 또 일본어 대답이 흘러나오자 아키라가 눈에 넣을 듯 쏘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조장님. 다신 실수하지 않겠스므니다.”

“‘스므니다’가 아니다! ‘습니다’, 알겠나?”

“옛!”

“그만 가자.”

아키라의 명령에 슈스케는 물론 동행한 네 명의 사내들이 기계처럼 절제된 동작으로 차에 올랐다.

* * *

똑똑똑.

회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탠드 옷걸이에서 슈트를 집어 이제 막 몸에 걸치려던 지태가 대답을 했다.

“예.”

곧 문이 열리고 박수연이 들어섰다.

“회장님, 이제 호텔로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그러잖아도 얼추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싶어 옷을 챙겨 입던 중이다.

지태가 미소를 입에 건 그대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많이 늦지 않았지, 수연 씨?”

“넵! 10분 거리라서 아직 여유가 많으세요.”

“그래. 출발하지.”

지태가 여전히 웃는 낯꽃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옅은 미소로 화답한 박수연이 앞장서 회장실을 나갔다.

그룹 본사 현관 앞에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얼마 전 회장 전용으로 구입한 최고급 외제 리스 차량이었다.

지태가 뒷좌석에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박수연이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수연 씨, 감회가 새롭지 않아?”

전용 기사가 승용차를 출발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태가 문득 박수연을 향해 물었다.

“네?”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느냐고 묻는 거야.”

박수연이 고개를 뒤로 돌려 미소를 피워냈다.

그녀 또한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고 굳게 믿었으니까 회장님이 저에게 스카웃을 제의하셨을 때 두 번 생각을 안 했겠지요.”

선우글로벌에 사표를 던지고 나오던 때를 떠올리며 박수연이 이번엔 좀 더 크게, 그리고 활짝 웃었다.

지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엄밀히 따지면 박수연도 한스의 창업 멤버나 마찬가지였다.

성장의 기쁨을 그녀와 함께 공유하고 만끽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최하 상무 자리에 앉았는데 수연 씨만 아직 부장 타이틀이야. 서운하지 않아?”

“어머! 제 나이에 부장이면 엄청 출세한 거죠. 아직 서른도 안 된 제 나이에 부장이에요. 제 주제에 이런 초고속 승진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회장님?”

그 순간 지태는 여러 복잡한 기운들만 모아놓은 미소를 날렸다.

처음 보았을 때 저런 식으로 어찌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 갈까 참으로 염려스러웠던 박수연이었다.

그리고 매사 수줍고 여리기만 했던 박수연이었다.

한데 그동안 수많은 역경을 함께 헤쳐 오면서 나름 단단하게 연마가 된 탓인지 이제는 제법 맷집 좋은 그 누구와 비교를 해도 전혀 꿀릴 것 같지 않았다.

흐뭇한 미소를 다시금 뱉어낼 즈음 승용차는 어느새 약속 장소인 호텔 현관 앞에 다다라 있었다.

지태는 박수연을 앞장세운 채 호텔 일식당으로 올라갔다.

아직 약속 시간 10분 전이었지만 한스그룹 계열 사장단들은 일식당 별실에 모두 모여 있었다.

“나름 일찍 온다고 했는데 제가 가장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지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는 사장단을 향해 묵례를 해보였다.

모두가 별말씀을 다 하신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을 내뱉고는 손을 내저었다.

지태가 지정된 상석에 앉았고 이내 자리가 정돈되자 사장단은 흐뭇한 미소로 지태를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에 이만한 위치에 올랐으면 은연중이라도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태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초지일관 그대로인 모습이 그들 눈에는 더없이 고맙고 흐뭇한 것이다.

그때 지태가 박수연을 돌아보았다.

“회장님께선?”

유성락 부회장을 말하는 거다.

“선약이 생각보다 길어진다고 조금 늦으시겠답니다. 먼저 식사를 하라면서 양해 말씀을 구하셨어요.”

지태가 알겠다는 듯 박수연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고는 좌중을 죽 훑었다.

사장단은 지태와 눈이 마주치는 순서대로 눈인사를 나눴다.

지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간 바깥일에 한눈이 팔려 회사 업무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제 몫까지 몇 배로 애써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오늘은 그런 뜻에서 조촐하지만 따뜻한 저녁 한 끼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성의를 봐서라도 모쪼록 즐거운 식사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너무 요란하지 않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곧 미리 예약을 넣어두었던 요리들이 차례로 나왔다.

식사와 함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두어 순배쯤 돌렸을 즈음이다.

지태가 문득 헛기침을 했다.

사장단이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잠시 시선을 모았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편히 드시면서 가볍게 들어주세요.”

그러나 지태가 꺼내든 이야기는 결코 가볍게 들을 만한 게 아니었다.

새로운 법인 하나를 설립하자는 이야기였다.

이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모든 이들은 먹는 것을 잠시 멈추고 지태의 입술에 집중했다.

“머잖아 남북한을 하나로 잇는 도로 현대화 사업에 관한 정부 발표가 있을 겁니다. 개성에서 평양 간을 잇는 경의선과 고성에서 원산 간을 잇는 동해선의 연결 도로 말입니다.”

“확정이 된 겁니까?”

조현민이었다.

지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실무 회담에서 결론을 냈다고 합니다. 물론 시행사는 토지공사가 될 것이고, 시공은 우리 한스종합건설에서 맡게 될 겁니다.”

순간 사장단의 입에서 ‘와!’하는 작은 탄성들이 새어 나왔다.

지태는 사장단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평화공단 조성보다 시공 시기가 어쩌면 좀 더 이를 수 있습니다. 공단 조성엔 아직 처리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도로 현대화 공사에는 그다지 큰 걸림돌이 없으니까요.”

“그럼 조금 전 법인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하신 것은 남북 경협사업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이번에도 사장단의 궁금증을 대변하듯 조현민이 나섰다.

“그렇습니다, 조 사장님. 가칭 한스개발이라는 법인을 설립하여 공단 조성 이후 분양 및 관리 업무를 맡길 생각입니다. 아울러 자유로운 북한 방문에 대비해 여행 부문 파트를 거기에 포함시킬까도 고려중입니다.”

그러자 유기영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왔다.

“음, 좋군요. 어차피 경협 관련 주가가 나날이 치솟고 있는 추세이니까요. 근데 법인 설립 자금은 어떻게 조달하실 생각이신지…?”

“홀딩스 자금을 우선 투입할 것이지만, 나머지 모자란 부분은 각 계열사 출자 형식으로 가야겠죠. 공단 사업 파트너인 부경 측에서도 투자를 좀 받을 생각이고.”

지태는 말을 잠시 멈추고는 사장단을 다시 훑어갔다.

다들 이견이 없는 듯 부정적이지 않은 표정이었다.

거기에 힘을 입은 지태가 말을 이어갔다.

“법인 설립 작업은 조현민 사장께서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요?”

“예, 조 사장님.”

“그럼……?”

“무역은 윤민수 전무를 대표이사로 승진시킬까 합니다. 그간 조 사장님이 워낙 탄탄하게 무역을 키워 놓으셨으니 윤 전무님께 이양하셔도 별 무리 없이 돌아갈 듯합니다만…….”

“그거야 뭐…….”

조현민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이 벌써부터 넘치는 표정이기도 했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지태가 시선을 돌려 이번엔 유기영 사장을 쳐다보려는데 박찬익 한스다모아 사장이 그를 불렀다.

“예, 박 사장님.”

“이 자리와 어울리는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기민성은 언제까지 아프리카에 두실 생각이신지……?”

“아!”

박찬익 사장의 물음에 지태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이틀 전에 통화를 했습니다. 윤민수 전무의 빈자리를 기민성 지사장으로 하여금 채우게 하면 어떨까 싶어서. 아, 물론 전무 자리에 뜬금없이 앉히진 않을 겁니다. 일단은 영업 총괄 상무 정도가 좋겠지요.”

그러자 박찬익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어른거렸다.

지태가 혹시나 그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내심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던 차였다.

그랬는데 그런 깊은 뜻을 품고 있다니 반갑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물으실 말씀이 없으시면?”

“예. 말씀 감사합니다.”

박찬익 사장이 묵례로 감사를 표하자 지태의 시선이 바로 유기영 사장에게로 돌아갔다.

앞서 시선을 한번 받았던 터라 유기영 사장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미소로서 지태의 시선을 반겼다.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예. 다시 유 사장님을 괴롭혀 드리려고요.”

“타임머신을 타고 고딩으로 돌아가 빵 셔틀을 한다 해도 회장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유기영 사장은 제 말끝에 유쾌하게 웃었다.

“정 그러시다면 괴롭히는데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또한 이건 강동진 사장님께도 해당되는 말인데,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회장님.”

‘멋진사람들’의 강동진 사장이 밝은 웃음으로 맞받았다.

“그럼 두 분께서 패션회사를 한번 알아봐주세요.”

“예! 예엣? 패, 패션회사요?”

유기영 사장과 강동진 사장이 동시에 되물었다.

“이대로 남북 관계가 이어진다면 머잖아 민간 교류도 활발해질 거 아닙니까. 그때를 대비하자는 차원입니다. 북쪽 사람들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질 분야가 아마도 남한의 패션 쪽이 아닐까 생각해요. 또 공단이 완성되면 북측 사람들을 데려다 쓸 거니까 임금 면에서도 부담이 없을 거 아닙니까.”

“아~ 예에!”

이번에도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쳐 왔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급하게 서두르실 필요는 없고요. 또 우리 사업에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는 업종이라면 그게 뭐든 허심탄회하게 제안을 해주세요, 언제라도!”

지태는 두 사람 외에 다른 사장들을 향해서도 당부의 말을 보탰다.

“그나저나 즐겁게 드실 식사 시간을 제가 많이 빼앗았네요. 어서들 드세요.”

지태가 손짓을 하며 식사를 권했다.

그러는 찰나 별실의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 쪽에 쏠리는 가운데 유성락 부회장이 밝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지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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