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재회(5)
또한 임상만 회장이 말하길, 한때는 지은이 경영에 전혀 관심이 없어 걱정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했다.
생각 외로 적응을 잘하고 경영에도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아직은 어린 여자의 몸으로 거대한 부경그룹의 미래를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이 내린 결론은 이거라고 했다.
그녀의 짐을 지태가 나누어 가졌으면 한다는 거.
그것이 임상만 회장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임상만 회장은 두 사람이 혼인을 통해 양 그룹이 자연스럽게 통합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지태는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룹을 통합할 마음이 없었다.
지금껏 그래왔듯 한스그룹을 제힘으로 반듯하게 세워 보고 싶다는 의지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를 올리는 일은 지태의 주관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반려자 덕분에 출세했다는 소리는 더더욱 비위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은을 봐서라도 부경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기꺼이 조언을 해주고 힘이 닿는 선에서는 얼마든지 도와줄 용의도 있었다.
지태는 다시금 지은을 힐끔 돌아보았다.
“왜 대답이 없어? 지은이 생각은 다른 거냐고 묻잖아.”
“어색해.”
“응?”
“우리 두 사람이 처한 현실이 좀 그렇잖아. 너무 오랫동안 우린 서로 등 돌리고 살았고, 또…….”
“그동안 나를 완전히 잊었던 거야?”
“…….”
“난 전혀 안 그랬는데.”
“어?”
지은은 예상 밖의 대답이라 여겼는지 조금은 놀란 눈빛으로 지태를 돌아보았다.
지태가 자신의 가슴께를 콕콕 짚어 대며 말했다.
“뭘 놀라. 난 항상 너를 여기에 계속 담아두고 있었다는데.”
“……!”
“넌 아녔어? 이거 왠지 나만 손해 본 기분인데.”
“진심이야?”
“진심이냐고? 내가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온 이유가 뭔데. 바로 너 때문이었어. 널 믿었으니까! 넌 어떤 배경 좋은 남자가 나타나도 나를 잊지 않을 테니까 난 너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나만의 성을 쌓는 데만 집중하자! 지금껏 나는 그런 마인드만으로 죽을힘을 다해왔어.”
“……!”
“다만 강성원에 이어 임경남 사장의 죽음 때문에 잠깐 흔들린 적도 있긴 했어. 하지만 너를 완전히 떠나보낼 정도는 아니었, 읍!”
순간 지은이 와락 안기며 지태의 입을 막았다.
두 개로 합쳐진 입술 사이로 뺨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지은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지태가 그런 지은을 꼬옥 안았다.
“성원 씨 일은 미안해. 오빠를 대신해 사죄할게.”
이윽고 입술을 뗀 지은이 물기 촉촉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태가 아직 눈물이 흐르고 있는 지은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이게 지은이가 사과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성원이도 이해할 거야. 이미 용서했을 거고.”
“그럴까?”
“성원이 놈 성격 알잖아, 읍!”
다시 또 지태의 입이 막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은의 기습 키스였다.
그때였다.
“저, 저기요…….”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두 사람은 얼른 입술을 뗐다.
돌아보니 아까 콜을 했던 대리 운전기사였다.
지태는 대리 기사에게 스마트키를 건네며 자신의 승용차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지은이 뭔가 2% 부족한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낼 점심 같이하자.”
지태가 그녀의 아쉬움을 달래듯 말했다.
지은은 고갯짓으로 승낙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그녀의 눈물 자국이 보안등 불빛에 반사되어 마치 수정 구슬처럼 맑게 반짝였다.
* * *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의사를 밝히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상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합류할 수 있게 만든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의지와 포용 정책이 있어 가능했다.
그것이 남북한의 의지와 합의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현재의 대통령만큼 임기 초반 지지율이 최악인 경우는 없었다.
워낙 돌출 행동이 잦고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특이한 성향과 정책들은 그에게 투표했던 보수 성향의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2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중간 선거가 코앞에 닥쳤다.
이대로는 패배가 불을 보듯 명확했다.
게다가 연임을 노린다면 뭔가 커다란 반전이 있지 않고서야 재선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럴 즈음 작년부터 예기치 않게 급변하게 된 한반도의 상황은 그에게 다시없을 호재로 다가왔다.
북한의 핵 위협으로부터 미국의 안보 불안을 떨쳐내고 대통령 개인의 이해타산까지 맞아떨어지면서 남북한 평화 무드는 미국 내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전제로 한 북미 정상 간 회담이 열렸고, 그 이후엔 정해진 프로세스대로 흐름을 이어 가고 있는 중이다.
평화공단 조성을 위한 남북한 실무진들의 상호 방문 이후 공사 착수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무렵이었다.
지태는 오랜만에 김성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만나자는 거였다.
한동안 연락이 없어 그러잖아도 궁금하던 차였는데 먼저 만나자고 연락이 해 오니 지태로서는 반가웠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무지 신경 쓰였다.
목소리가 철근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겁고 심각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뭐 또 안 좋은 일이라도?”
- 일단 만나지. 전화로 이야기 나눌 사안이 아냐.
자세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는데 더 이상 고집을 피워서 무엇 하겠는가.
지태는 전화를 끊고 약속 장소로 나가기 위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 * *
“부경과의 공조는 잘되어 가나?”
김성욱이 물었다.
지태는 그저 입술 끝만 살짝 끌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신을 불러낸 목적과 하등 상관이 없는 질문인 까닭이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 너무 무겁지 않게 윤활유를 치려는 의도인 듯했다.
지태의 미지근한 반응에 김성욱은 주위를 건성으로 둘러보았다.
청담동에 있는 호텔의 라운지 바였다.
아직 술을 마시기엔 이른 시각이어서 손님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는 가운데 젊은 남녀 몇 쌍만이 가볍게 칵테일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지태와 김성욱은 맥주 한 병씩을 앞에 두고 있었지만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상태.
“뭡니까? 우리가 밀당하는 남녀도 아니고,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젊은 친구가 너무 삭막해. 윗사람이 뭘 물어보면 장단을 맞춰주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자넨 예전이나 지금이나 암튼 거 뭐냐, 네 가지가 없어, 네 가지가!”
“저 싸가지가 없는 걸 이제 아셨나. 뭘 새삼스럽게.”
김성욱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정색하는가 싶더니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한 회장, 자네! 남북한이 평화 무드로 접어들면서 가장 소외받고 있는 곳이 어딘 줄 아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심각해져 있는 김성욱의 표정과 궤를 같이하는 질문이라서 가벼이 흘려듣진 않았다.
“일본 아니겠습니까. 일본 패싱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쪽 역대 정권들도 우리의 보수파들이 그러했듯 오랜 세월 북한의 위협을 담보로 곧잘 재미를 봐 왔어. 정권의 입지가 흔들릴 때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툭 하면 꺼내 드는 카드였지, 안보 장사!”
“그래서요?”
뻔히 아는 이야기라서 지태는 그의 사족을 끊어내려 본론을 재촉했다.
김성욱이 하려는 이야기는 분명 이거 하나였다.
위기에 빠진 현 일본 집권당의 현실.
총리의 사학 스캔들을 필두로 내각에 참여한 장관의 성 추문 등으로 인해 현재 집권당과 총리의 지지율은 그 어느 때보다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여느 때라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북한의 위협을 앞세웠을 터였다.
눈앞에 닥친 국난(國難)만큼 여론을 돌리게 만들 강력한 수단은 또 없을 테니까.
“한데 이번엔 안 통했어. 어디 안 통했다 뿐인가. 남북미 주도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완전히 배제를 당한 상태지. 그러니 똥줄이 타는 거야. 물론 사촌이 땅을 샀으니 배가 아픈 건 덤이고. 지금 일본 국민들은 그동안의 불만을 섞어 무능한 정권에 대해 성토하는 분위기가 커. 예전보다 더욱 여론이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얘기지.”
“일본의 총리 사정과 국내 정세나 설명하자고 저를 부른 건 아니죠? 이제 말씀해 보세요. 무엇 때문에 이리 뜸을 들이는지.”
지태가 다시금 김성욱의 말을 끊을 때였다.
김성욱이 툭 던지듯 돌연 내뱉었다.
“자넬 노린다는 첩보가 있어!”
“예?”
“자네가 위험에 빠졌다는 얘길 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음…….”
김성욱은 빠른 대답 대신 둔탁한 신음성을 흘렸다.
그는 아직 입도 대지 않은 맥주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더니 곧 내려놓았다.
맥주는 금세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마이클 장이라고 미국 CIA 일본 지부장이 귀띔해주더군. 눈치를 챘겠지만, 그는 재미교포 3세야.”
“저를 노리다니, 누가요?”
“출처라든가 어느 기관에서 자넬 노리는 건지는 확실히 밝히지 않았어. 근데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내각정보조사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내각정보조사실……. 거긴 일본 총리의 직속 정보기관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냐. 일본 정권 자체가 남북한의 화해나 평화를 전혀 원치 않거든. 남북한이 적당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어야 자기네들한테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이니까. 게다가 지금은 궁지에 몰린 시점이 아닌가. 뭔가 활로를 모색하는 차원에서 한반도 상황에 재를 뿌리려는 거 같아.”
“그래서 놈들이 노리는 타깃이 바로 저란 말입니까?”
“첫 번째 타깃으로는 그래.”
“제가 1순위라면 두 번째 타깃은요?”
지태의 물음에 김성욱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명확한 게 없어. 일단 경고 차원에서 귀띔만 받은 상황이니까 좀 더 파악해봐야겠지. 그게 잘못된 정보든 아니든 간에 그런 낌새가 보인다는 점만으로도 긴장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거든. 암튼 당분간 몸 좀 사리시게. 물론 우리 직원들로 하여금 가드는 붙여줄 테지만.”
“가드는 됐습니다. 제가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방향으로 하죠.”
“원 사람도…….”
김성욱이 쓴맛을 다셔 댔지만 이내 수긍한다는 표정이었다.
어느 누구보다 강한 지태의 실력과 능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알겠어. 알겠는데 이거 하나만 명심해. 다시 말하지만…….”
“알겠습니다. 조심할게요.”
지태는 서둘러 김성욱의 잔소리를 끊어냈다.
잔소리꾼은 한스그룹의 조현민 하나로도 충분한 거다.
* * *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시모노세키와 부산항을 오가는 부관페리에서 이제 막 내려오는 다섯 사내가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에 간편한 옷차림새의 그들은 얼핏 보면 관광객처럼 보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어색했고 수상쩍었다.
차림새만 그럴싸했지 관광객 특유의 설렘이나 들뜬 표정 같은 게 전혀 없었다.
작은 손가방 하나씩을 손에 든 그들은 여객터미널을 빠져나오자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터미널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주차장 입구에 들어서자 어떤 승합차의 문이 벌컥 열리며 사내 하나가 급히 튀어나왔다.
그는 다섯 명 중 맨 선두에 서 있던 사내를 향해 절도 있게 허리를 꺾었다.
“맛테이마시타. 아키라 조초오사마!(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키라 조장님!)”
그것은 분명 일본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