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49화 (249/272)

249화. 어색한 재회(3)

지태가 김영철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며 물었다.

“공식적으로 방문한 소감이 어때?”

“내 개인적으론 그때가 더 짜릿했어야! 땅굴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넘어왔을 때가.”

“그럼 다음에 올 땐 그쪽으로 넘어오든가.”

지태의 농담에 김영철은 픽 웃고는 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서너 잔씩 술잔이 비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로 정담을 나눴다.

그러다가 문득 김영철이 정색했다.

“와 안 물어보는 거이네?”

“뭘?”

“오늘 남조선 실무진들하고 무슨 의제를 개지고 협상을 벌였댔는가 하는 거 말이디.”

“자넨 입이 좀 가볍잖아.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말해줄 거면서.”

“이 동무가 지금 뭐이라니? 내래 토라져서리 말을 안 해주면 어카간?”

“그랬다간 북으로 돌아가서 아오지 탄광에 끌려가겠지. 경애하는 위원장 동지께 찍혀서.”

지태는 잠시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어 댔다.

김영철이 괜히 머쓱해졌다는 듯 자신의 콧잔등을 긁었다.

“왜 그래? 농담인데.”

“농담이디만 틀린 말이 아니라서 길티. 내래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께 밀명을 받았댔거든. 지태 동무를 적극 지원하라는 밀명을 말이디.”

김영철이 다시 진중한 자세로 나오니 지태 또한 얼굴에 계속 웃음기를 담을 수는 없었다.

정색하고 쳐다보니 김영철이 말을 이었다.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는 동무와 했던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말씀하셨댔어. 북남 간 평화의 첫 물꼬를 트게 만든 지태 동무래 여기에 깊이 새겨두었다고도 말씀하셨댔지.”

김영철은 자신의 가슴께를 검지로 짚어 보였다.

지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고마운 말씀이시다. 이거 진심이야.”

“당연하디. 은혜를 모르면 되간!”

“알았어. 근데 오늘 남북 간 실무진들의 회담 의제는 뭐였어?”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려 하자 지태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다른 건 별로 중요하디 않아. 그런 것들은 협의를 거치면 될 일이디만, 오늘은 다른 것 땜에 양측이 많이 부딪쳤디. 첫째, 평화공단의 조성 주체. 그리고 공단이 조성된 이후에 관리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 셋째, 분양 등 모든 권한을 민간 기업에 위임하라는 것!”

지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이 현재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사항과 일치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정부에서는 뭐라고 했는데?”

“이 모든 걸 전부 담기엔 한스그룹의 그릇이 너무 작다고 기러드만. 기럼 그릇을 키워주면 되디 않갔나 그랬디. 국가 차원에서 맘만 먹으면 뭐는 못하갔소! 내래 이렇게 밀어붙였디.”

“……!”

지태는 하마터면 풉! 하고 웃을 뻔했다.

억지 부리는 걸로만 따져 순위를 매긴다면 북한이 전 세계에서 첫손가락 안에 들 거라고 지태는 생각했다.

김영철이 지금껏 내뱉은 말들이 모두 다 사실이라면 오늘 우리 정부의 실무진들은 회담하는 내내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것을 상상하자 자꾸만 쓴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기왕 밀어붙이는 김에 내래 우리 북조선을 대표해서 쐐기래 박았디. 이건 우리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확고한 신념이다, 그러니 꼭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평화공단 조성 사업이 한스그룹으로 넘어가디 않으면 전면 무효화를 선언하고 복귀하라는 밀명을 내래 받았댔다. 이랬디 뭐!”

김영철이 어깨를 부풀려 목에 잔뜩 힘을 주며 으스댔다.

자신이 지태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알아 달라는 시위 같았다.

“그래, 고맙다. 만약 우리 한스로 사업권이며 관리 권한이 떨어지면 그건 다 네 덕분이야.”

“내래 챙겨주는 건 고맙디만 기렇게 말하면 곤란하디. 이거이 모두 우리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오로지 동무를 배려한 덕분이라고 하는 거이 옳아. 기걸 잊디 말라, 고럼!”

틀린 말도 아니어서 지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암튼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 사업권만 따내면 동무도 남조선의 내로라하는 재벌 반열에 들 수가 있는 거이네?”

“발판은 만들 수 있지. 자네가 우리나라 재벌 그룹들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린데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혹시 모르지. 북한 지역 내 개발 사업권까지 내가 몽땅 다 따낸다면 또 몰라도.”

“너무 욕심 부리는 거이 아니네?

“꿈과 야망을 크게 잡는다고 해서 세금 걷어가는 건 아니잖아.”

김영철이 흉중에 뭔가 감춘 표정으로 소리 없이 웃었다.

아직 지태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북한의 수뇌부에서 장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내놓은 방안 중에는 조금 전 지태가 꿈꾸던 그것도 포함돼 있는 까닭이다.

“동무가 꿈꾸는 대로 모든 일이 잘돼서 호상 간에 잘 먹고 잘살았으면 좋갔구만.”

김영철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자 지태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순간 가슴에 와 닿는 무언가가 있는 듯 지태가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그렸다.

* * *

김영철 이하 북한 실무진이 억지(?)를 부리고 돌아간 효과는 컸다.

부랴부랴 청와대 수석 비서관 회의와 국무회의가 연달아 소집됐다.

두 회의에서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치열한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결국엔 대통령의 의중을 존중해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한스그룹에 평화공단 조성 사업권 및 추후 관리권까지 모두 내주기로 했다.

겉보기엔 북측의 요구를 조건 없이 모두 수용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차피 대통령은 남북한의 관계 개선에 물꼬를 트게 만든 지태의 공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업권을 민간 기업에 넘기겠다고는 했지만, 어차피 국민의 혈세가 투입되는 국책사업이다.

그것을 기존의 재벌 그룹에게 밀어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대통령의 의중이었다.

그래서 남북한이 기나긴 분단 역사의 아픔을 뒤로하고 평화 공존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지태에게 혜택을 주고 싶었던 거다.

언젠가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이번 민간 사업자를 선정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내외적으로 반발 기류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잠시 지켜보자는 쪽으로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북측 실무진의 방남 때 생떼에 가까운 억지를 부리고 간 것이 결과적으로는 큰 힘이 되었다.

형식이야 어떻든 간에 대통령을 후방 지원하는 격이 되었으니까.

그러자 무르익어가는 남북한의 평화 기류에 재를 뿌리고 싶지 않았던 청와대 참모진이나 관계 부처 국무위원들은 대통령의 의중을 받들어 북의 요구를 수용해주자는 쪽으로 뜻이 기울었다.

이로써 남측에서는 북한에 대해 생색을 낼 수가 있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요구를 조건 없이 모두 수용해준 것처럼 보이니 차후에 있을 어떤 협상 과정에서 한 가지 이상의 양보를 얻어낼 것은 분명해 보였다.

* * *

분단 이후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남북한의 평화 기조를 지켜보면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현 정부를 적극 지지했다.

일부 소수의 극우 보수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민심이 현 정부와 여당에게로 쏠리자 야당은 궁지에 몰렸다.

뭔가 돌파구를 찾던 야당에게 있어 프로젝트의 사업권을 따낸 한스그룹은 그래서 좋은 먹잇감이었다.

DMZ 평화공단 조성은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사업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 엄청난 사업을 주관하는 주체가 100대 기업에도 들지 못하는 한스그룹이라니.

이런 어마어마한 특혜를 준 이면에는 분명 정권 차원의 감춰진 음모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보수 언론에서 먼저 포문을 열고 나왔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야당은 국정 조사 내지는 특검을 요구하며 슬슬 여론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이 떠나버린 야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국민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분단 이후 처음 맞는 남북한의 평화 기류에 더 이상 찬물을 끼얹지 말라며 야당을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버린 해프닝.

그런 가운데 슬그머니 웃고 있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부경그룹이었다.

한스그룹의 사업 파트너로 부경그룹이 함께한다는 양해 각서를 받아 놓은 까닭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깟 양해 각서 따위가 무슨 구속력이 있겠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태와 지은의 특별한 관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평화공단의 사업자로 한스그룹이 선정되었다는 정부 발표가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지은은 지태의 전화를 받았다.

- 왜 연락이 없어? 누가 보면 내가 아쉬운 사람인 줄 알겠다.

어이가 없다는 듯 혀 차는 소리가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왔다.

“기다리면 이렇게 전화를 해올 줄 알았거든.”

- 뭘 믿고 튕기는데? 그러다 내가 사업파트너를 바꾸면 어쩌려고?

“지태 씨 인간성을 믿으니까.”

- 인간성으로 족쇄를 채우면 어쩌자는 거야. 쳇!

지태가 건성으로 투덜댔다.

그러는 사이 지은은 나지막이 날숨을 뱉어내고는 물었다.

“혹시 전화 받았어?”

-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근데 회장님께서 왜 갑자기 나를 보자고 하시는 거야?

“이유는 나도 몰라. 그나저나 지태 씬 뭐라고 대답했는데?”

-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잖아. 찾아뵙겠다고 했어. 근데…….

“나랑 같이 오라고 하시지?”

지은이 지태의 말을 잘라 먹으며 말했다.

- 그래.

“그럼 이쪽으로 올래, 아님 내가 그쪽으로 갈까?”

- 그럴 것 없이 퇴근 후 한남동에서 보자. 집 근처에서 만나 같이 들어가면 되지, 뭐.

“그러던가.”

지은은 이렇다 할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 * *

한남동 저택을 500미터쯤 앞둔 골목길에 주차돼 있는 지은의 차가 보였다.

지태가 차에서 내려 그녀의 승용차로 걸어갔다.

운전석 쪽에 다다랐는데도 반응이 없자 지태는 창문을 노크했다.

그제야 지은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지태가 밉지 않게 흘기며 핀잔을 늘어놓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데 사람이 가까이 왔는데도 못 알아봐?”

“새 남친 생각!”

“아이고, 그러셨어?”

지태가 비아냥거리자 지은이 풉! 하고 웃었다.

“지금 질투해?”

“뻔한 거짓말인데 무슨 질투를…….”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거 아냐? 나 임지은이야, 왜 이래!”

“너 임지은인 거 잘 아니까 1절만 하셔. 회장님 기다리시겠다. 어서 들어가자”

“그래.”

대답을 마친 지은이 다시 자신의 차에 오르는 사이 지태는 자신의 승용차로 걸어가 올라탔다.

“어서 오게!”

지태가 지은과 나란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임상만 회장이 일어나 맞았다.

예전과는 달리 너무도 핼쑥해진 모습에 지태는 차마 안녕하시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지태는 정중히 허리만 굽혀 인사를 올렸다.

“우리 집 도우미 아줌마가 뭘 얼마나 거창하게 차리는지 몰라도 아직 저녁상이 준비되지 않았다는구먼. 잠시 앉지.”

“예, 회장님.”

지태는 임상만 회장이 권하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지은이 그 옆에 앉으려 하자 임상만 회장은 애피타이저로 다과나 내오라고 했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으로 해석한 지은이 묵례를 하고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한남동으로 발걸음을 한다는 것이 꽤 망설여졌을 텐데 이렇게 와주었구먼. 고맙네.”

“아닙니다, 회장님.”

“…….”

살짝 운만 띄워 놓고 임상만 회장은 지태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잠시 말을 쉬어 갔다.

평소에도 워낙 표정이 근엄해서 마주 대하기가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처럼 정색하고 똑바로 바라보자 지태는 그 시간이 굉장히 어색하고 길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임상만 회장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경남이, 큼!”

죽은 아들의 이름을 꺼내다가 임상만 회장은 순간 울컥해지는지 헛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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