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급진전(5)
“이제 뜸은 그만 들이고 시원하게 물어보시죠. 어제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무지 궁금하죠?”
“뭐 무지라고 표현할 만큼은 아냐. 대충 위원장한테서 무슨 언질을 받았을까 하는 감은 오니까. 공단 설립에 관한 거지?”
지태가 활짝 웃었다.
김성욱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 공식으로 발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남북 간 합의서에도 명시되지 않은 것으로 양측의 고위급 몇 사람만 구두로 합의한 사항이었다.
기존에 만들어진 개성공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규모의 공단을 설립한다는 프로젝트였다.
그것도 남북한 화해 및 평화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일환으로 분단의 상징인 DMZ에 지뢰를 걷어내고 그 안에 공단을 조성하자는 거다.
“이게 계획대로 실행이 되려면 앞으로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될 거야. 우선 북미 관계의 변화가 필요할 테고, 그러려면 무엇보다 양국 간에 통 큰 합의와 결심이 선행되어야겠지.”
지태가 옳은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만일 이게 실현이 된다면 앞으로 자네 얼굴 보기가 더욱 어려워지겠군.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재벌로 거듭날 테니까.”
“김칫국부터 마셔 댔다가 괜히 맹물만 주야장천 들이켜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돼! 내 말 믿어봐. 이런 분위기로 이어진다면 그 프로젝트는 100% 진행되네. 그리고 이건 양국 정상들끼리 단번에 합의를 봤어. 말하자면 양국 정상들이 자네에게 주는 감사의 선물인 셈이지.”
아닌 게 아니라 지태는 그것을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고 설렜다.
그렇게만 된다면 김성욱의 말마따나 한스그룹은 단숨에 성장해 유수의 재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성큼 다가오는 것이니까.
* * *
뜻을 모으고 결심을 끌어내는 과정이 어렵지 일단 작심을 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진행 속도에 날개를 달기 마련이다.
현재의 한반도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한반도 정세는 생각과 예측이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시시각각 변해갔다.
남북 정상의 허심탄회한 만남 이후 우리 대통령의 중재와 북한 측의 오픈 마인드가 열매를 맺었다.
남북 정상이 만난 지 두 달이 채 안 돼서 사상 처음으로 북미 정상 간 회담이 성사된 것이다.
그 자리에서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를 의미하는 완전 비핵화에 양 정상이 극적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날 이후 북한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국가로부터 비로소 평화를 지향하는 정상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미국은 자신들이 공언한 바대로 북한의 체제 보장을 확인해주었고, 그것은 곧 북미 수교로 이어졌다.
이에 발맞추어 남북 간에도 활발한 인적 교류 및 경제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몇 번이나 거듭 약속을 했으며, 지태가 손꼽아 기다리던 DMZ 평화공단 건설 프로젝트가 슬금슬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슬쩍 던지듯 연막을 피워 그 추이를 지켜보던 정부는 호의적으로 여론이 형성되자 이윽고 프로젝트를 공표했다.
그러자 재계에서는 벌써부터 개성공단의 몇 십 배에 이르는 DMZ 평화공단의 기반 조성 사업권이 과연 어느 기업으로 떨어질 것인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지태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이미 한스그룹으로 낙점이 된 상태에서 괜히 군침을 흘리고 있는데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시간을 내어 회장실에 와 있던 조현민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걸고 있는 지태를 빤히 쳐다보며 따라 웃었다.
“왜 실실 쪼개시나, 한 회장?”
“그러는 형님은요?”
“나야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와서 그러지.”
“그걸 잘 알면서 나한테 이유를 물어요?”
“흐흐흐.”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실성한 것처럼 한참을 웃고 또 웃었다.
* * *
사실 DMZ의 활용 방안은 노무현 정부 당시부터 꾸준히 제기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어 보수 정권이 들어섰어도 아픈 분단 역사의 상징인 DMZ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문제는 계속 화두로 떠올랐다.
그것을 ‘100대 국정 과제’로 채택할 만큼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남북 관계가 급격히 악화 일로를 걸으면서 슬그머니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에 발표된 DMZ 평화공단 조성 프로젝트 역시 회의적으로 보는 일부 시각들이 있었다.
그랬다.
그야말로 그것은 일부의 우려일 뿐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기대와 열망이 뜨거웠다.
무엇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남북 관계의 변화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과 DMZ를 관장하고 있는 유엔사의 긍정적인 입장 발표로 더욱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남북이 상호 합의를 했더라도 미국과 유엔사에서 반대를 하면 제멋대로 밀어붙일 수 없는 게 한반도가 처한 현실이 아니던가.
여하튼 물꼬는 트였다.
공단 프로젝트는 가동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개성공단은 조성 당시에는 약 25만 평으로 출발했었다.
단계적으로 키워 나가 최종 2천만 평까지 확장해 나간다는 계획이었지만, 100만 평 조성 계획 단계에서 폐쇄되는 바람에 그 재개 여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런데 이번에 추진하는 DMZ 평화공단은 처음부터 1천만 평으로 시작한다고 했다.
단계적으로 DMZ 동쪽으로 그 규모를 점차 넓혀 나가 세계 최대의 공단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새 정부의 핵심 공약인 일자리 수백만 개 창출과도 딱 맞아떨어지는 프로젝트였다.
띠이잇, 띠이잇.
회장실 집무 책상 위에 놓인 인터폰이 울렸다.
지태가 버튼을 누르자 곧 박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회장님, 청와대 경제수석님의 전화십니다.
“연결해줘.”
- 바로 연결하겠습니다.
박수연의 목소리가 들어간 자리에 경제수석의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한 회장님, 강 수석입니다.
“예,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 예, 덕분에요……. 근데 오늘 시간 괜찮으십니까?
이렇게 물어 온다는 것은 만남을 강하게 희망한다는 메시지인 거다.
요즘 같은 시기에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는 것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만나자는 뜻일 거였다.
제아무리 급한 선약이 있더라도 이보다 우선순위일 수는 없다.
지태가 흔쾌히 수락했다.
“괜찮습니다, 수석님.”
- 아, 그래요? 그럼 두 시간 후에 청와대 여민관에서 뵐까요?
여민관은 수석들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지태가 소리 없이 기분 좋은 미소를 날렸다.
* * *
지태는 아까 경제수석의 목소리가 밝았던 탓에 내심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입가에 웃음기는 띠고 있었지만, 왠지 전반적으로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이게 아닌데…….’
속으로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으나 지태는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한스그룹이 예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요. 특히 지난번 만찬장에서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반가운 포옹을 한 이후로 말입니다.”
지태가 입으로만 소리 없이 웃었다.
증시에 상장된 한스그룹 계열사들의 주가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만찬장에서의 그 장면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부터였다.
두 사람의 포옹은 온 국민의 지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촉발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DMZ 평화공단 조성설이 솔솔 흘러나오자마자 한스그룹의 주가가 연일 상한가를 쳤다.
공단 조성의 주체로 나설 깜냥까지는 못 되어도 그 과정에서 뭔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경제수석이 조금 전 차원이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언급한 부분은 바로 이걸 말하는 거였다.
그의 말뜻을 이해한 지태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언론의 덕을 많이 봤습니다. 대통령님 이하 모든 분들께서 응원해주시는 덕분이기도 하고요.”
“하하. 이러다가 머잖아 국내 10대 그룹의 자리에 앉겠는데요, 한 회장.”
“언감생심 제가 어찌 감히…….”
“사람의 내일이란 모를 일이지요.”
경제수석은 인사치레 같은 덕담을 마지막으로 잠시 침묵했다.
뭔가 입을 떼기가 어려운 말이 흉중에 감춰져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지태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오,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
경제수석은 일단 손을 내저으면서도 바로 말을 잇지는 않는다.
약간 뜸을 들이더니 지태를 부른 이유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이번 평화공단 조성과 관리의 주체로 한스그룹을 추천하게 된 것은 오로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적극적인 입김이었다는 건 잘 아시죠?”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대통령님께서도 그동안 한 회장의 노고에 보답 차원에서 흔쾌히 수락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계의 반발이 벌써부터 심상치가 않아요. 아직 공식 발표 전인데 어느새 냄새를 맡아 가지고 여러 채널을 통해 각종 문의와 항의 전화가 빗발칩니다.”
지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중견기업에 지나지 않는 한스그룹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체로 선정이 된다면 당연히 공정성 시비에 휘말릴 것이기 때문이다.
“참, 그전에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한스그룹이 단독으로 감당할 능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
경제수석이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잘 이해되지 않아 지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 사람의 생각엔 조금, 아니 많이 벅찰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수석님?”
이미 심중에 표준 답안을 갖고 묻는 듯해서 지태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5대 그룹 중 한 곳과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그림은 어떻습니까? 그러면 정치권은 물론 재계 또한 불만은 있을지언정 크게 반발하지는 못할 겁니다. 한 회장님의 방패막이 역할로는 아주 이상적인 선택이 될 것 같은데. 물론 파트너를 선정할 권한은 한스그룹에 드리겠습니다.”
“음!”
지태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낮은 신음성을 흘리며 시간을 벌었다.
망설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지태는 곧 답을 주기보다는 경제수석에게 먼저 확인할 것이 있다고 했다.
“말씀해 보시지요.”
“컨소시엄의 조건 또한 제 재량입니까? 그리고 공단이 조성된 이후 분양 및 운영권을 우리 한스그룹에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경제수석이 다시 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첫 번째 요구 사항은 지태가 하기 나름이니 상관없다.
그러나 분양 및 운영권에 대한 권한은 바로 답을 주기가 어려운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완전한 민간사업이 아닌 까닭이었다.
정부 측의 한국토지공사가 모든 사업을 주관하고 단지 조성 공사만 민간 기업에게 하청 형식으로 맡긴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공단 조성이 끝난 후 분양 및 운영 관리의 주체는 당연히 토지공사의 몫으로 돌아가는 거다.
“두 번째 제안은 제 선에서 답을 드릴 사항이 아닌 것 같군요. 제가 국무회의에서 논의해보자고 대통령님께 건의는 드리겠습니다만…….”
경제수석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럴 가능성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으니 애초에 기대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지태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그렸다.
아주 무거워야 할 상황인데 지태가 돌연 웃고 나오니 경제수석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대통령님께 제 말을 전해주십시오. 제가 남북 관계 개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고 판단하셨다면 제게 약속했던 선물을 부디 잊지 말아 주셨음 한다고 말입니다. 기대하고 있겠다는 말씀 또한 꼭 전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그렇게 전해주시면 대통령님께서는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경제수석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는 듯 눈알을 굴렸지만, 지태는 사람 좋은 얼굴로 그저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