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45화 (245/272)

245화. 급진전(4)

지태는 오히려 뻔뻔한 웃음을 흘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잖습니까. 연락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반겼어야죠.”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허, 이거 참!”

김성욱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지태의 밝은 표정에서 뭔가 좋은 소식을 물고 왔다는 암시가 느껴져 흐뭇하기만 했다.

“방북했던 결과물이 좋은 모양이지?”

“예! 이번에 가서 진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왔으니까요.”

그러자 김성욱이 짐짓 인상을 구겼다.

“누가 그런 걸 말했나? 아, 내 얘긴 자네가 좋은 대접받았다는 거 말고 다른 거, 내 귀를 자극시켜줄 만한 아주 색다른 거!”

지태가 그런 김성욱을 보면서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방북 첫날 어디에서 묵었는지를 듣는다면 방금 했던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요.”

“묵긴 어디서 묵어. 보나마나 고려호텔 스위트룸에서나 묵었겠지.”

“자모산!”

“뭐?”

“자모산 특각이라고요.”

“뭐, 뭐어?”

순간 김성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지간히 놀랐다는 표정이었다.

“그, 그거 진짜야?”

“그럼 내가 없는 소리를 지어냈겠습니까?”

“햐, 그렇담 이거야 말로 대박 중에 대박인데!”

김성욱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털었다.

자모산 특각은 김씨 일가들의 수많은 전용 별장들 중 하나였다.

특히 평양과 가까운 평성시에 위치해 있어서 휴식이 필요하거나 지병 치료 등의 이유로 김씨 일가가 자주 애용하는 곳이다.

미국의 정찰 위성으로나 겨우 지켜볼 뿐 외부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그 내밀한 공간에 초대를 받았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나.

어디 그뿐인가.

그곳에서 하룻밤까지 묵고 왔다고 한다.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이게 농담이 아니라 거짓 하나 안 보탠 사실이라면.

그래서 김성욱이 다시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재차 되물었다.

“이거 농담 아니지?”

“농담할 게 따로 있죠. 그런 걸 가지고 농담하겠어요.”

“허허헛! 그렇담 당연히 북의 최고책임자는 만났을 테고?”

“당근이죠!”

지태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다가 좋은 메시지까지도 받아왔고요.”

“좋은 메시지? 그게 뭔데?”

김성욱이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긴장 가득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가면서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지태가 특수 밴의 좌석에 몸을 기대며 짐짓 여유를 부렸다.

그럴수록 타오르는 궁금증에 바짝 침이 마르는 김성욱이었다.

* * *

1월 1일.

이윽고 새해가 밝았다.

지태는 물론 BH에서도 손꼽아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신년사를 낭독하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육성이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처음 10분 남짓은 북한 인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지난 한 해 여러분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와 발전을 이루었다는 자화자찬이 뒤를 이었으며, 자체 핵 무력 완성으로 인하여 가장 강력하고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것은 지태나 BH가 기다리던 바가 아니다.

초조하게 텔레비전 화면을 들여다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쪽에 보내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메시지였다.

도대체 어떤 선물 보따리를 풀어 놓으려고 오늘의 신년사를 기다리라 했는지 지태는 그것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신년사는 어느덧 15분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바로 그즈음이었다.

이윽고 남쪽과 관련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북남 간의 관계가 호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난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입니다.

조선반도의 온 겨레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정진하는 북남 수뇌들 간의 의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남조선의 대통령에게 제의합니다.

우리 조선반도의 미래를 놓고 북남 간 수뇌들이 언제든 허심탄회하게 마주 앉아 흉금을 털어놓기를 원합니다.

우리 조선반도의 미래는 우리 북남 간의 문제이며, 이것은 외세의 간섭 없이 우리 민족끼리 주체적으로 풀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가슴을 활짝 열어 놓고 남조선의 대통령을 기다릴 것입니다.

또한 나는 피 끓는 동포애의 정신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혀두는 바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우리 두 사람이 따뜻한 봄기운을 불어넣기를 소망합니다.]

순간 지태는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환호성을 지르며 허공으로 주먹을 쭉 뻗었다.

* * *

북한 최고지도자의 신년사 이후 남북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급물살을 탔다.

그로부터 열흘 뒤 대통령은 신년사 및 기자회견을 통해 북의 제안을 조건 없이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발 빠르게 고위급 회담이 추진되었다.

BH와 정부에서는 작년부터 비밀 접촉을 통해 북한의 의중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터였고, 이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도 마친 상황이라서 오래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봄꽃이 만발하던 4월 어느 날이다.

남북한 합의에 의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최고지도자가 서울을 방문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판문점을 도보로 넘어와 영접을 나온 대통령 비서실장과 함께 서울로 입성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시선이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한반도로 쏠리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3천 명에 이르는 취재진이 한국을 찾았고, 그들을 위한 프레스센터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남북한 지도자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톱뉴스로 긴급 타전됐다.

남측 대통령이 북의 지도자가 머물 호텔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그를 맞이하는 장면은 이날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었다.

이튿날.

청와대에서 남북한 정상회담이 열렸다.

실무진들이 탁자에 올릴 의제 등에 대해서는 이미 조율을 마쳤고, 정상들의 사인만 남겨둔 상태여서 회담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상춘재 잔디 마당에서 이루어진 공식 만찬에는 지태도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대통령이 북의 최고지도자에게 남측 참석 인사들을 일일이 소개할 때였다.

북의 지도자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통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위원장님, 누구 찾는 분이라도 있습니까?”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안 보이……. 아, 저기 있군요.”

그는 마침내 찾는 인물이 시선에 잡힌 듯 대통령에게 양해를 구했다.

대통령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야, 한 선생!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갑구만요.”

북의 최고지도자는 지태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예의 세 번 가슴을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는 그들만의 특이한 포옹을 해 왔다.

“오시는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남녘으로 내려오는 길이 이렇게 가까운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내려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 지냈습니까?”

“예, 덕분에.”

반가운 인사가 끝나자 북의 지도자는 대통령에게 즉석 제안을 했다.

지태를 헤드 테이블에 앉혔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의전에 어긋남이 있고, 사전에 예정되지 않았다 한들 그의 청을 어찌 거부하겠는가.

하지만 그의 요청을 지태가 정중히 사양했다.

“위원장님, 제가 헤드 테이블에 앉는다는 건 결례인 듯합니다. 마음 써주신 점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하, 이거……. 그럼 오늘 밤 내 숙소로 오시갔소?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가 선뜻 양보하갔소.”

북의 지도자는 한걸음 바짝 다가서서 지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속삭인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커서 바로 옆에 서 있던 대통령의 귀에도 들렸다.

지태가 허락을 맡듯 대통령을 돌아보자 그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정상이 헤드 테이블로 다시 걸어가자 지태는 본디 자신이 배정받은 자리로 되돌아가서 앉았다.

오늘은 국가적 경사였고, 온 국민이 모두 반기는 좋은 날이었지만 지태는 내심 아쉬움이 남았다.

이번 방남 길에 김영철이 동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 * *

지태는 청와대 회담과 만찬을 마치고 호텔로 복귀한 북한 국무위원장을 방문했다.

그를 만나기까지 까다로운 절차, 그리고 974경호부대의 철저한 몸수색까지 당했지만, 최고 존엄의 초청을 받아 온 터라 지태를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기만 했다.

국무위원장과는 약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지태는 귀가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고, 특히나 그에게서 놀라운 언질을 받은 터라 입가에선 웃음이 내내 떠나지를 않았다.

다음 날.

온 세상이 어제 저녁 두 정상이 발표한 공동 합의문과 기자회견 등으로 떠들썩한 가운데 지태는 한스그룹 신사옥 회장실에 앉아있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

지태의 대답에 맞춰 곧 문이 열리고 박수연이 들어섰다.

그녀는 이번 조직 개편 때 한스무역 해외 영업부 대리에서 회장 비서실 실무과장으로 영전했다.

“어, 수연 씨! 무슨 일이야?”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한강실업 대표님이랍니다.”

김성욱이 방문한 모양이었다.

지태는 속으로 피식 웃었지만 박수연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표정을 숨기고 아주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그를 방으로 들이라고 했다.

곧 김성욱이 회장실로 들어섰다.

“어쩐 일이십니까? 저를 밖으로 불러내지 않으시고?”

“이제 그럴 수 있나. 자네의 위상이 예전하고는 180도로 달라졌는데.”

표정을 보니 괜히 떨어 대는 너스레는 아닌 듯했다.

“일단 앉으시죠.”

지태가 집무 책상에서 걸어 나오며 소파를 가리켰다.

마주 앉자마자 지태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그렸다.

김성욱이 찾아온 이유를 잘 아는 까닭이다.

어젯밤 북의 최고지도자와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궁금해 일부러 발걸음을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김성욱은 곧바로 자신의 궁금증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어제 저녁 공동 합의문에 언급된 부분에 대해서 지태에게 먼저 화두를 던졌다.

“아주 획기적이었어. 그야말로 서~프라이즈 그 자체였네.”

그가 말한 서프라이즈는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언급이었다.

북한의 체제 보장만 확보된다면 언제든 핵을 포기하겠으며, 더 나아가 핵 폐기까지도 빠른 시일 내에 실행해 보이겠다는 거였다.

그 일환으로 가장 먼저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폐기해 보일 것이며 차후 순차적으로 핵물질과 핵시설의 신고, 핵사찰, 검증 가능한 형태의 핵 폐기로 단계를 밟아 가겠다고도 했다.

경제와 국방을 동시에 발전시켜 나간다는 병진 노선에서 국방보다는 경제 쪽에 더욱 치중하겠다는 북한의 의지를 내보인 거였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정부보다는 미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보는 게 옳다.

체제 보장과 경제 도약을 위한 대북 투자 및 지원을 해준다면 북한은 과감히 핵을 포기하겠다는 일종의 화해 제스처였다.

“이번 정상 간의 합의는 한 회장의 힘이 아주 컸네. 자네가 남북 평화의 주춧돌 역할을 한 거야. 누가 뭐래도 1등 공신이지, 자네는!”

“너무 띄우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한 것이라고는 비밀 특사로 북에 몇 번 다녀온 것밖엔 없는데…….”

“그건 아니지! 미얀마에서 김영철이라는 친구를 만나면서부터 남북 간에 좋은 기운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자네가 선구자인 거야. 사실 말이지, 가려운 데는 많은데 남북한 양측 모두 선뜻 나서질 못했어. 뭔가 물꼬를 트고 싶은데 핑계도 없었고. 근데 마침 그 효자손으로 자네가 나타난 거야. 그러니 양쪽 모두로부터 칭송을 받는 건 아주 당연한 거지.”

“졸지에 대나무가 되었네요, 내가?”

지태는 면전에서 칭찬을 받는 것이 머쓱한 나머지 썰렁한 농담으로 받아쳤다.

김성욱이 소리 없이 입술로만 웃으면서 빤히 쳐다보았다.

눈치를 챈 지태가 선수를 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