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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43화 (243/272)

243화. 급진전(2)

지태가 기가 차다는 듯 쓴 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아주 깡패가 따로 없군요, 미국 놈들.”

“자고로 힘 가진 자가 대장 노릇을 하는 건 당연하지.”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습니까. 이 분단이 그 옛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각축에서 벌어진…….”

“그쯤 하지.”

김성욱이 자못 흥분하려는 지태를 만류했다.

“이런 씁쓸한 이야기나 나누려고 자네를 보자는 게 아녔어.”

“말씀해 보시죠.”

“숨 고르기 차원이라는 건 북한도 미국 측의 그런 눈치를 알아채고 잠시 지켜보자는 측면일 거야. 다른 한편 ICBM을 날리면서 간을 보자는 측면도 있을 테고.”

“이제 우리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갈 테니까 더는 숨통을 조이진 말라?”

“뭐 그런 셈이지. 우선은 같은 민족인 남북 간이 먼저 길을 닦아 놓을 테니 그 길로 너희 미국이 걸어 나와라! 내 생각엔 그래.”

지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완전히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형국인데 그 이면에는 그런 깊은 뜻이 숨어있다니 하는 말이다.

“자네, 이제 어느 정도는 마음을 추슬렀지?”

김성욱이 흘깃 표정을 살핀 후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지태가 쓰게 웃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요. 성원이도 내가 계속 실의에 빠져 있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김성욱이 부탁하듯 제안을 던져왔다.

“그렇다면 북엘 한번 다녀오시게”

지태가 잠시 침음을 흘리며 말을 아꼈다.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스케줄을 한번 조정해 볼게요.”

“고맙네. 아, 참! 그 친구는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어?”

“누구……?”

되묻던 지태가 곧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철을 말하는 거다.

그는 강성원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전화를 걸어온 이후 지금껏 아무 소식이 없었다.

지태가 고개를 내젓자 김성욱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까지 연락을 끊은 걸 보면 북측 내부 사정도 현재 많이 복잡한 모양이군. 그쪽 내부 사정이라든가 생각들을 빨리 캐치할 필요가 있겠어. 그쪽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야 우리도 거기에 맞춰 적절히 대응을 해나갈 테니까.”

“국정원이 가진 고도의 공작 기술로도 파악이 안 됩니까?”

“무슨 말이야?”

“댓글! 그거 엄청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공작 기법 아녜요?”

“이 친구가!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나?”

김성욱이 흘깃 째리는 시늉을 했지만 화를 내는 분위기는 아니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농담 한번 해본 겁니다. 다시 북에 넘어갔다 와야 한다는 중압감도 있고…….”

“알아. 여하튼 스케줄 조정이 끝나는 대로 즉시 연락 주게.”

“그러죠.”

지태는 대답을 하고는 탄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김성욱이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는 사이 지태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스스로 마음을 다잡듯.

* * *

김성욱과 탄천에서 만난 지 딱 사흘째 되는 날이다.

늦은 오후 무렵 지태의 스마트폰에 낯선 번호 하나가 찍혔다.

받아보니 BH 국가안보실장이었다.

저녁 늦게 시간을 좀 내달라고 했다.

지태에게 전해줄 대통령의 부탁 말씀이 있다는 거다.

어차피 북에 다녀오겠다고 수락을 한 상태였고, 그래서 스케줄을 조정하고 있던 터라 지태는 흔쾌히 수락했다.

장소는 한강실업으로 정했다.

지태는 약속 시간에 맞춰 한강실업에 도착했다.

약 10분쯤 미리 온 것이어서 국가안보실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김성욱과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 약속 시간에서 5분쯤 지났을 무렵 국가안보실장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미 안면이 있는 터라 두 사람은 악수를 하며 간단히 수인사를 주고받았다.

곧 비밀 공간으로 이동해 대화에 들어갔지만, 화제는 탄천에서 김성욱과 나누었던 현재의 한반도 정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안보실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지태를 불렀다.

“한 회장!”

“예, 실장님.”

“이번에 올라가서 만에 하나 북의 최고지도자를 다시 만나거든 그의 진짜 의중이 뭔지를 좀 알아와 주시오.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만 약속받는다면 진정으로 가슴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속셈이 있어 단지 시간을 벌자는 수작인지.”

“글쎄요. 설령 만날 기회가 있다 해도 저한테까지 그런 속내를 드러내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녜요.”

국가안보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북의 지도자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우리 한 회장을 많이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아요. 현재로서는 우리 측 그 누구도 한 회장을 대신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쪽에서도 한 회장을 콕 집어 대화 파트너로 원하는 실정이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합시다. 정부에서도 한 회장의 노고를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겁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하하. 뭐 그거야 나중 일이니까. 참, 근데 언제 출국하실 생각이오?”

“이틀 뒤 중국으로 넘어갈 예정입니다만……?”

지태는 말꼬리를 흐리며 국가안보실장을 쳐다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싶어서였다.

안보실장이 소리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한 회장의 일정이 그러하다면 내일쯤 여기 김 부국장을 통해 VIP의 친서를 전해드릴까 하고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그걸 들고 간다면 한 회장의 방북 길에 약간이라도 힘이 실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빈손으로 올라가는 것보다는 무게감은 더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지태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12월.

겨울의 초입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늦가을의 여운이 아직은 남아 제법 따뜻했는데 오늘은 갑자기 추워졌다.

밤이 되자 찬바람은 그 기세를 더해갔다.

김성욱과 만나기 위해 나온 탄천은 그 바람 끝이 더욱 더 매서웠다.

한강과 맞닿은 탄천이어서 강바람의 영향이 컸고 주변으론 경기장 외에 이렇다 할 건물들이 없어서 찬바람을 막아 주지 못하는 탓이다.

지태는 슈트 위에 겨울 코트를 입고 서서 김성욱을 기다렸다.

좀 늦는다 싶어 스마트폰을 꺼내려는 순간 저 멀리에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흔들리며 다가오고 있다.

곧 비상 깜빡이를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이내 헤드라이트를 끄는 것으로 보아 김성욱이 분명하다.

“추운데 차 안에서 기다리지 그랬어.”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김성욱은 머쓱한 표정으로 웃으며 다가왔다.

“머리 좀 식히려고요. 이 조그만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스팀이 자꾸 오르네요.”

“나에 대한 것도 있는가?”

“쪼끔?”

지태가 검지 한 마디 정도를 엄지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내 존재가 너무 미미하군.”

김성욱이 피식 웃고는 대뜸 노란 서류봉투와 손가방 한 개를 동시에 내밀었다.

“뭐가 따로따로예요?”

“손가방엔 VIP 친서, 그 서류봉투엔 자네 여권.”

“……?”

여권이라니?

아직 여권의 유효 기간이 살아있는데 새로운 여권을 내미니까 의문이 들 수밖에.

“자넬 주시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했잖아. 저기 저쪽에 코 큰 애들!”

미국 CIA를 말하는 거다.

“김도훈이란 이름으로 돼 있어. 아주 흔하디흔한 김씨로 성을 바꿨네. 이제부턴 저쪽과 접촉하러 갈 땐 우리가 만들어주는 여권을 쓰게. 물론 1회용이야. 그때그때 이름을 달리해서 만들어 줄 거야.”

“무슨 007영화를 찍는 기분이군요.”

“밥이 다 익기도 전에 미국 애들이 코를 빠뜨리면 곤란하니까. 아, 참! 그리고 이거…….”

말을 하다 말고 김성욱은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투박한 형태의 전화기였다.

바로 위성 전화기였다.

“혹시 몰라서 하나 챙겼네. 비상용으로 갖고 들어가. 북에서 전화의 사용을 허락할진 모르겠지만, 암튼 특별히 막지 않는 한 긴급용으로 쓰시게.”

그리고 손을 뻗어 왔다.

무운을 빈다는 뜻이다.

지태는 김성욱이 내민 손을 꼭 맞잡았다.

* * *

다음 날 오후.

지태는 중국 선양에 도착했다.

곧 육로를 이용해 단둥으로 달려갔다.

김영철에게는 어제 비상 연락망을 통해 자신의 방중 소식을 전했던 터라 그는 이미 단둥으로 넘어와 지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라, 지태 동무.”

포옹이라도 할 것처럼 굴며 격하게 반긴다.

지태가 몸을 틀었다.

“이런 거 징그럽다니까.”

“와 기러네. 나는 오랜만에 봐서 너무 반가워 기렇구만.”

“아, 됐고. 우린 언제 넘어가?”

“어두워지는 대로!”

“좀 있다가 바로?”

“와, 무슨 문제라도 있네?”

“그런 건 아니고…….”

지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씩 웃었다.

바로 그때 지태의 웃음기를 쏙 들어가게 만드는 김영철의 발언이 나왔다.

“오늘 경애하는 최고지도자 동지를 만나 뵙게 될 기야.”

“뭐어?”

지태가 화들짝 놀랐다.

“뭘 새삼스럽게 놀라고 기러네. 동무래 우리 최고영도자 동지를 처음 뵙는 거이네?”

김영철이 짓궂게 웃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지태 동무래 많이 기다리셨어야!”

지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털었다.

북쪽이 하는 짓을 보면 참으로 변화무쌍하고 예측을 불허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몇 번 경험한 적이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번에도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북한의 도로 사정을 감안하면 어두워지는 대로 출발을 한다 해도 아마 새벽녘에야 평양에 도착할 것이다.

그 시각에 북한 최고지도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잠시 쉬다가 바로 출발하자우. 뭘 먹갔네? 먹고 싶은 걸 말해 보라.”

헐!

김영철은 지태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지태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 * *

밤 10시.

밖에 나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돌아온 김영철이 바쁘게 재촉했다.

“날래 출발하자우.”

지태는 김영철이 운전하는 SUV 차량의 조수석에 앉아 압록강을 넘어 북한 땅으로 이동했다.

신의주에서 국도를 타고 안주 인근에 이르자 고속도로가 나왔다.

평양과 희천을 잇는 평양-희천 간 고속도로였다.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약 한 시간 남짓 달렸을 때 김영철은 직진하지 않고 평성시 인근에서 돌연 옆길로 빠졌다.

나들목으로 방향을 틀어 나올 때 지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직진하면 곧장 평양으로 갈 텐데 왜 옆길로 빠졌는지가 궁금했다.

“왜 직진하지 않고?”

“기럴 일이 있어야. 더는 묻디 말라.”

지금까지와는 달리 돌연 차갑게 변해버린 김영철이었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듯 그 후 말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서 지태는 어색함을 억지로 견뎌야 했다.

그렇게 국도를 따라 얼마쯤 달려갔을까.

김영철이 문득 갓길에 차를 세웠다.

곧이어 헤드라이트는 물론 모든 조명을 다 꺼버렸다.

“다 온 거야?”

차창 밖으로 주변을 살피던 지태가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주변엔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쉿! 기다려보라!”

김영철이 예의 그 딱딱한 어조로 말했을 때 누군가 운전석 쪽 창문을 두드렸다.

미리 약속이 된 듯 김영철은 아주 자연스럽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이번엔 조수석 쪽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내다보았으나 짙은 어둠 속이어서 건장한 사내의 실루엣만 보일 뿐 얼굴이나 표정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차 문이 벌컥 열렸다.

“잠깐 내리시갔습니까?”

말투는 딱딱하고 건조했지만, 나름 깍듯한 존대였다.

지태는 잠자코 사내의 말에 따랐다.

“뒤에 타시지요, 한지태 선생.”

낯선 사내가 투박한 말투로 또 다른 SUV 차량을 가리켰다.

지태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하는 망설임을 보이자 뒤쪽에서 김영철이 명령을 하듯 내뱉었다.

“시키는 대로 하라. 지태 동무래 나하고 같이 뒤에 올라타는 기야.”

그러면서 김영철이 먼저 뒷좌석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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