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급진전(1)
“자책하지 마, 친구야. 그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그 씨발 놈들은 처음부터 인간쓰레기들이었어. 그리고 성원이는 우리들의 친구이기 이전에 경찰이잖아. 경찰로서 제 할 일을 하려던 거였어.”
이돈두는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지태가 자괴감에 떨 듯 어깨를 살짝 움찔했다.
그 위로 이돈두의 말이 이어졌다.
“…….”
“다시 말하지만, 네가 결코 자책할 것이 못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래. 네가 성원이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 그러면 돼. 성원이도 네놈이 자책하고 우울해하는 것보단 그걸 두 손 들어 반기고 바랄 거다.”
“훗!”
그 순간 지태가 쓸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툭 내던졌다.
“헛나이는 안 먹었네!”
“어?”
이돈두가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네놈이 나보다 몇 살 위 연장자잖아. 모처럼 형 같은 말을 했다는 소리야.”
“이런! 난 또 뭐라고.”
지태의 말뜻을 뒤늦게 알아들은 이돈두가 털털하게 웃었다.
그런 이돈두를 지태가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돈두야!”
“어.”
“너한테 하나만 부탁하자.”
“몇 개라도 괜찮아. 뭐든 부탁해라.”
“아니, 딱 하나면 돼.”
“……!”
지태가 모를 소리를 내뱉더니 이돈두를 지극히 그윽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곧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던져왔다.
“성원이의 빈자리를 이제 네놈이 대신 채워 줘.”
“……!”
“영원히, 우리 늙어서 성원이 만나러 갈 때까지 내 곁을 오래토록 지켜 주라고!”
뭉클.
순간 이돈두는 대꾸해줄 말을 잃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으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넘어오는 기분이었다.
너무도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니 대신 행동으로 보여 줄 수밖에.
이돈두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양팔을 크게 펼쳐 보였다.
옅은 미소를 입에 머금은 지태가 따라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 바싹 그에게 다가섰다.
덥석.
…….
두 사내의 뜨거운 포옹을 대여섯 발자국 뒤에 서서 지켜보던 윤학수의 입가에도 어느덧 촉촉이 젖은 미소 한 자락이 걸려 있었다.
* * *
강성원이 사망한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지태도 이제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조금씩 걷어내고 다시 정상적인 일상에 복귀했다.
복귀 후 그가 가장 먼저 챙긴 것은 그간 소홀했거나 미뤄두었던 그룹의 업무 점검이었다.
지태는 각 계열사의 대표들을 불러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시급한 현안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더불어 그룹 전반에 대한 정비도 꾀했는데, 그 일환으로 우선 추진했던 것이 본사의 이전 작업이었다.
그룹의 규모가 커지면서 수많은 경력직과 임원급들을 충원했다.
그런 까닭에 기존의 사무실로는 공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한스무역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계열사를 여섯 개나 거느린 그룹으로 발전했다.
빌딩의 1층 전관을 나누어 쓰던 초기만 해도 근무 인원수에 비해 공간이 너무 넓은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었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가 쏙 들어가 버릴 지경이 됐다.
지태는 홀딩스 유기영 부사장을 시켜 그룹 전체가 한 공간으로 이전할 수 있을만한 규모의 빌딩을 알아보게 했는데, 마침 현재의 사무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7층짜리 빌딩이 매물로 나왔다고 했다.
유기영 부사장은 연건평이 약 3,300제곱미터 정도에 매매가도 주변 시세에 비해 비교적 싸다고 했다.
그룹의 여유 자금과 건물의 담보 대출을 합하면 건물의 인수에 무리가 없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지태는 흔쾌히 수락했고, 인수 작업은 유기영 부사장의 추진 하에 신속히 이루어졌다.
자체 건물이 있는 ‘멋진 사람들’과 한스종합건설을 제외한 4개의 계열사가 새 빌딩으로의 이전을 마쳤다.
그리고 빌딩 7층엔 사장단들의 하나된 목소리에 떠밀려 그룹 회장실도 만들어졌다.
물론 그 주동자는 조현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지태도 못 이기는 척 그들의 의견을 따라 주었다.
이젠 어느 정도 그룹의 형태를 갖추었으니 대외적으로도 그에 걸맞은 위상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회장실이 만들어진 후 처음으로 사장단 회의가 소집됐다.
회의가 소집된 곳은 이번에 회장실을 만들면서 그 옆 공간에 구색을 맞춰 새로 꾸민 회장 전용 소회의실이었다.
“오늘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신 것은 사옥의 이전도 마쳤으니 이제 거기에 맞춰 그룹의 체질 변화를 꾀해보자는 뜻에서입니다. 깜짝 선언을 할 것도 있고요.”
지태가 사장단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모두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긴장했다.
과연 그 깜짝 선언이라는 게 무엇일까.
지태가 그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첫 번째로 저는 그룹 경영전략기획실의 신설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깜짝 선언이라고 했지만 사장단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모두가 무언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으며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는 반응이다.
그런 가운데 지태의 말이 이어졌다.
“신설될 경전실에서는 각 사의 경영 지원과 미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전략 수립을 하는데 그 역량을 총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좋군요. 적절한 시기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조현민이 응원의 말을 던져왔다.
이에 고무된 지태가 바로 덧붙였다.
“조 사장님의 응원에 힘입어 신설 경전실의 막중한 책무를 맡아주실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지태가 오른쪽 한스전자 이동구 사장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홀딩스 유기영 부사장을 쳐다보았다.
미리 말이 맞춰진 것 같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유기영 부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딩스 유 부사장님이 신설 경전실의 첫 실장님이십니다.”
부사장이 승진했다.
경영지원실장의 자리는 사장급이었다.
그간 한스홀딩스에서 유기영이 보여준 탁월한 능력과 추진력을 알기에 모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모두는 박수로 환호하며 그의 경영전략기획실장으로의 영전을 축하했다.
* * *
회의가 끝나고 사장단들이 모두 돌아갔다.
지태에게 할 말이 있는지 조현민만 슬그머니 자리에 남았다.
“한 회장! 소식 들었어?”
앞뒤 자르고 물으니 당최 알아들을 수가 있나.
밑도 끝도 없다는 듯 지태가 쳐다보았다.
“부경그룹 말이야.”
그러자 지태가 쓰게 웃었다.
자신이라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귀를 막아뒀겠는가.
임경남의 동영상이 폭로된 후로 부경그룹은 그야말로 사정 당국의 쓰나미를 온몸으로 맞았다.
그 직후 얼마 안 있어 임상만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자식을 잘못 키운 자신은 변명할 여지도 없는 죄인이라는 짧은 성명과 함께.
임상만 회장은 자신의 빈자리에 경영지원실장 겸 그룹 부회장이었던 이낙규를 앉혔다.
지태가 쓰게 웃고 말 뿐 별다른 대꾸가 없자 조현민이 말을 이었다.
“지은 씨가 이번에 부경물산 총괄 부사장으로 옮겨간다는 소문이 있어. 들었어?”
“그래요?”
“표정을 보니까 그건 못 들은 모양이네. 나도 그저께 무역 관련 업계의 만찬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들었어.”
지태가 장단이나 맞춰주겠다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얼굴 가득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부경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임지은만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오빠를 한순간에 몰락시키고 끝내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 바로 지태라는 것을.
지은은 지태와 임경남이 오랜 악연으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임경남은 끊임없이 지태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
하지만 번번이 화살이 빗나가자 임경남은 타깃을 바꿔 그의 둘도 없는 친구인 강성원에게 화살을 날렸다.
지태는 이제 그녀와의 인연은 완전히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밉건 곱건 간에 그녀의 친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원수나 다름없는 지태에게 과연 미련이나 남아있겠는가.
“하긴 당연하지. 아무리 그룹 경영에서는 손을 떼겠다고 공식 선언했지만, 평생 일군 기업을 남의 손에 어찌 맡기겠어. 이제 임상만 회장에게 남은 피붙이라고는 임지은 씨뿐인데 슬슬 그녀를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포석이겠지.”
“똑똑한 친구예요. 아마 임경남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겁니다.”
“그렇지. 그날 모인 사람들의 평가도 대체로 그렇더군. 참 근데…….”
조현민이 연이어 무슨 말인가를 내놓으려 하자 지태가 고개를 가만히 내저었다.
“……!”
그만하라는 듯 만류하는 지태의 고갯짓에 조현민은 더 이상 부경그룹과 임지은에 관련된 언급을 자제했다.
그때였다.
지태가 슈트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곧 주머니 안에 손을 넣는 걸 보니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지태는 액정 화면 속 발신자를 확인하고 이내 전화를 받았다.
“예, 부국장님.”
김성욱이다.
그는 지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 무슨 일이나마나 한 회장, 지금 바쁜가? 혹시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어?
“당장 말입니까?”
- 그래. 지금 안 되겠어?
김성욱의 분위기를 보니 안 된다고 하면 회사로 쳐들어올 것 같았다.
조금 전 그의 한숨 소리가 결코 엄살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 * *
탄천과 마주하고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지태보다 약간 먼저 와있던 김성욱의 표정은 역시나 무거웠다.
그는 다가오는 지태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음에도 탄천 쪽에 시선을 둔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부국장님이 서있는 자리가 10센티는 푹 들어갔네요.”
“응?”
무슨 소린가 싶어 김성욱이 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들어 보였다.
“너무 무겁게 보여서요.”
“이게 누구 때문인데 그래.”
김성욱이 핑계의 화살을 지태에게 날리며 다시 탄천 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지태가 소리 없이 픽 웃고는 나란히 서며 탄천에 시선을 두었다.
김성욱이 왜 이리 심각한 표정인지 알 것 같았다.
요즘 들어 부쩍 더 강경 모드로 나오는 북측의 태도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는 미국 본토의 동부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 ICBM 탄도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북한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보기 좋게 성공해버렸다.
그러자 미국 내 강경파들을 중심으로 무력으로 북한을 응징하자는 목소리들이 나왔고, 미 대통령 또한 이에 동조하듯 강경 발언들을 자신의 SNS를 통해 쏟아냈다.
연일 핑퐁게임을 하듯 날카로운 설전을 주고받더니 양국의 지도자들은 끝내 자신의 집무 책상에 놓인 핵 단추의 크기를 논하며 흡사 어린아이들의 유치한 말장난 같은 설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한반도는 다시 위기 상황에 놓였고, 국제사회가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게 자네로부터 초래된 거야. 북에 좀 왔다 갔으면 하는데 차일피일 미뤄둬서…….”
“왜 이러세요!”
지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으로 김성욱을 돌아보았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맞는 말이야. 그걸 핑계로 남북 간 접촉 라인을 일방적으로 끊은 건 사실이거든. 근데 북측이 뭔가 추이를 지켜보는 것 같아.”
“무슨 추이를 말입니까?”
“미국 CIA에서 눈치를 챘어. 어디서 정보가 새 나갔는지는 아직 파악 중에 있지만…….”
“제가 북에 갔다 온 걸 말하는 겁니까?”
“그것은 물론이고 남북 간 비밀 접촉까지! 그래서 지금 미국 측으로부터 BH가 많이 시달리나 봐. 자기네 허락 없는 일방통행은 절대로 안 된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