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26화 (226/272)

226화. 해빙의 기운(1)

지태가 빙그레 웃고는 이동구 사장을 쳐다보았다.

계속 말을 이어가라는 뜻이다.

“그래서 차라리 합치길 원해요, 그 사람들이.”

“뭘 합쳐요?”

“한스전자가 자기네들을 통합해줬으면 한다는 말이라니깐.”

“헛, 참!”

지태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켰다.

그러면서 물었다.

“몇 군데나 그런 식으로 프러포즈를 해왔는데요?”

“지금 현재까지 총 스물세 곳인데, 만약 소문이 퍼져 나가면 그 숫자는 기하급수로 늘어날 수도 있고. 아! 거기에 처음 한스전자의 통합을 추진할 당시 발을 뺐던 사람들 있잖아요?”

“예.”

“그 친구들도 합류를 희망하는 눈치에요. 얼마 전 정기 모임에 갔더니 예전에 자기네들이 내뱉은 말이 있으니 대놓고 언급하진 못하는데 딱 보면 아는 거 아니겠어요. 대부분 눈치가 그럽디다.”

“으음.”

지태가 이동구 사장의 말을 곱씹듯 낮은 신음성을 내뱉자 조현민이 그의 주목을 끌기 위해 박수를 한 번 쳤다.

“뭘 고민해요, 한 회장. 그냥 받아들여서 한스전자의 외형을 키우면 좋지.”

“덩치만 키운다고 다 유리한 건 아니잖아요. 앞뒤 살펴서 그게 우리한테 득일지 실일지를 먼저 따져 봐야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업체들이라고는 하지만 흡수 과정에서 해결할 일들도 많고.”

“한스전자 통합할 때 해봤잖아. 서로 갈등의 골이 생기지 않도록 의견 조율만 잘하면 됩니다.”

“그런가요? 근데 이 사장님.”

“예, 말씀하세요.”

“만일 통합을 한다면 현재 한스전자에서 생산하는 라인이나 품목들이 겹치는 게 많겠죠?”

“겹치는 건 몇 개 안 돼요. 설령 겹치는 게 있다 해도 한 라인에서 통합 관리하면 되는 거고.”

“그럼 좋은 방향으로 이 사장님께서 한번 추진해 보세요. 법적인 문제라든가 여타 어려운 과정이 있으면 유기영 부사장과 상의하시고.”

“알겠습니다.”

이동구 사장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현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치고 들어왔다.

“참, 말 나온 김에 이 말씀도 드려야겠네.”

“뭘 말입니까?”

“지난번 경력직들하고 임원 충원 문제 있잖아요. 그거 한 회장의 컨펌만 남았습니다.”

“조 사장님이 최종 검토한 부분이죠?”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그대로 진행하세요. 나중에 선발된 인원들하고 식사 자리나 한번 마련해 주시고.”

“안 봐도 되겠어요? 그래도 그 인원이 어떤 사람들인지 면면이라도 보는 게…….”

“어차피 조 사장님 눈이 내 눈이잖아요. 조 사장님께서 인정한 사람들이라면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됩니다.”

“허허, 이거 참!”

조현민이 너털웃음을 날렸고, 이동구 사장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이덕재.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함은 그럴싸한 스피드 정보센터 대표지만, 실상 그가 하는 일은 청부 용역을 수행하는 거였다.

양재동 패밀리 중 골드웰의 기획실장인 송영완과 처음 안면을 트고 거래를 해 왔다가 언젠가부터 임경남에게 붙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그들 패밀리의 청부만을 전담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잘한 일들 몇 건보다 그들의 부탁 하나를 처리해주는 것이 수익 면에서 몇 배 더 나은 까닭이다.

이덕재가 스마트폰에 대고 으르렁댔다.

“다시 또 망나니처럼 설쳐댔다간 그땐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알겠어, 이 새꺄!”

그러자 스마트폰 너머에서 즉각 반발하는 흑표의 연변 사투리가 쏟아져 나왔다.

- 씨베, 너 지금 뭐이라니? 죽고 잡니? 모가지를 확 따줘야 속이 시원하갔니?

“이 조선족 씨발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너야말로 산 좋고 물 맑은 한국 땅에서 조용히 파묻히고 싶어?”

- 이 개새, 하아~ 너 이리 오라. 당장 튀어 오라!

“나도 그러고 싶어, 씨발 놈아! 내가 너 때문에 지금 위에서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아? 어린놈들 앞에서 쪽팔린 거 생각하면 열댓 번을 때려죽여도 시원찮아, 이 새꺄. 그니까 잠자코 짱 박혀 있어. 세상이 잠잠해지면 그때 가서 내가 때려죽여줄 테니까.”

이덕재는 양재동 패밀리에게 불려가 혼쭐이 났던 때를 떠올리자 다시금 속에서 열불이 났다.

도대체 흑표와 연변 거지들을 어떻게 관리했기에 그 사달을 만들어 놨느냐고 온갖 수모를 다 겪은 거다.

- 기래. 이 얼빤한 새끼야, 내 눈앞에 없다고 실컷 지껄여라. 조만간 만나게 되므 네놈 몸뚱이를 조각조각 내줄 거이니까.

“이 새끼가 정말!”

이덕재는 욕을 내뱉으려다가 삼켰다.

“후우.”

성질을 누그러뜨리려고 입바람을 불어 날린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암튼 내 말 똑똑히 들어. 네놈이 강남 술집에서 싸 놓은 똥을 지금 겨우 치운 상태야. 다시 한 번 더 사고를 쳤다간 그땐 우리 애들 몽땅 다 풀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릴 거니까 그리 알어. 내가 부를 때까진 제발 얌전히 짱 박혀 있으라고, 이 새꺄!”

- 씨베, 계집년처럼 주둥이만 살아개지고서는! 이보라, 임자! 말로만 기러지 말고…….

뚝.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이덕재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스마트폰을 신경질적으로 소파 테이블 위에 던져 놓은 다음 치미는 울화를 못 이기겠다는 듯 연신 입바람을 불어 댔다.

“이 개새끼, 이번 일만 잠잠해지면 두고 봐. 씨발 놈들, 깡그리 다 인천 앞바다에 수장시켜 버릴 테니까.”

이덕재는 두 눈에 힘을 주고 이를 박박 갈아댔다.

* * *

한스 홀딩스 대표실로 찾아온 조현민과 이동구 사장을 이제 막 배웅한 다음이었다.

때를 맞춘 듯 스마트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은 이돈두였다.

“귀신같네. 너 혹시 나한테 사람 붙여 놨냐?”

통화 버튼을 옆으로 민 후 지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사람을 붙이긴! 그냥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해 봤는데 용케 받네. 언제 귀국한 거야?

“오늘 오전에.”

- 그럼 이 형님께 바로 보고를 했어야지.

“뭐 보고를 하면 대낮부터 술 마시게? 내가 그리 한가한 사람이냐.”

- 햐, 이제 좀 컸다고 벌써부터 빼는데! 이거 섭섭해지려고 그러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무슨 일이야? 설마 나 보고 싶어서 전화를 했을 리는 없을 테고, 뭔데?”

- 저 그게 말이지…….

* * *

“씨발!”

강성원은 한숨처럼 욕을 내뱉고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무심코 입에 갖다 댔다.

자판기 커피는 이미 바닥을 보여 입안에 들어오는 것은 겨우 두어 방울뿐이다.

강성원은 어딘가에 분풀이를 하듯 종이컵을 거칠게 우그러뜨리고는 이내 자판기 옆 휴지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복도 끝 휴게 공간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주머니 안에 넣어 둔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강성원은 이럴 때 전화를 받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 듯한 시선으로 주머니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일이래?”

강성원은 중얼거리며 통화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어, 지태야. 언제 귀국했어?”

강성원은 이돈두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 오늘 오전에! 다름이 아니고 조금 전 돈두한테 이야기 다 들었다.

“어, 그러냐…….”

강성원은 쓴맛을 다시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돈두와 통화를 했다면 지금 자신이 대기발령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연변 새끼들이 저지른 주점 살인 사건 때문에 그러는 거냐?

“그 새끼들이 손을 쓴 거 같아. 내 손발을 아예 묶어두려고 작정을 한 거지, 씨발 놈들!”

- 휘유!

스마트폰 너머에서 휘파람 소리 같은 지태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이럴 때는 술 한잔하면서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건데……. 요즘 내가 좀 시간 만들기가 그렇다.

“괜찮아, 인마! 너 정신없는 거 뻔히 아는데, 뭐.”

- 대기 발령이면 어떻게 되는 거야?

“모르지. 근데 내 느낌엔 왠지 파출소로 내려갈 거 같다.”

- 일선 경찰서 형사계도 아니고… 파출소?

“손발을 묶기로 작정했으면 아예 수사 권한이 없는 곳으로 좌천시킬 거 아니냐. 헤! 그런다고 내가 관둘 줄 아나 보지? 씨발 놈들, 나 인간 강성원이를 잘못 본 거야. 내가 얼마나 똥고집이란 걸 몰라, 그 씨발 놈들이!”

강성원은 이를 갈았다.

그러자 지태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 너무 급하게 몰아붙이진 마라. 그러면 그 새끼들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냐! 그런 건 나 하나도 안 무섭다.”

- 지랄하네. 여하튼 몸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곧장 나한테 연락해.

“알았다. 바쁜 모양인데 그만 끊어.”

강성원은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을 나무 의자에 내려놓은 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생각할수록 열이 뻗쳐오르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주체를 알 수 없는 자를 향한 욕설이 다시금 튀어나온다.

“씨발!”

* * *

다행히 김영철의 몸은 지태와 체격이 비슷해 맞춤복처럼 슈트가 잘 맞았다.

지태가 김영철에게 입히려고 들고 온 자신의 옷이다.

“그리고 이것도 써 봐.”

지태는 슈트를 차려입고 조금은 어색한 듯 거울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김영철에게 안경을 내밀었다.

세련된 안경테이긴 하지만 범생이처럼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이건 뭐네?”

“도수 없는 거니까 한번 써 봐. 자넨 인상이 더러워서 돈 많은 싸모들이나 돈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난 어르신들이 보면 겁먹기 십상이야.”

“내래 어드렇게 보고 기딴 소리를! 내래 우리 공화국에서 미남으로 소문난 사람이야.”

“알았으니까 일단 써 보기나 해 봐.”

지태가 안경을 김영철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내래 알아서 쓰갔어. 이러디 말라.”

김영철은 내키지 않는다고 뻐기면서도 지태에게서 안경을 받자 냉큼 귀에 걸었다.

생각 외로 잘 어울렸다.

김영철도 내심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는 연신 얼굴의 각도를 바꿔가며 거울에 비춰보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

지태의 대답에 요원 하나가 고개만 살짝 들이밀고 물어 왔다.

“준비되셨으면 출발하시죠. 지금 출발해야 약속시간에 맞게 도착할 듯합니다.”

“부국장님은요?”

“회사에서 그쪽으로 곧장 오시기로 했습니다.”

지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영철을 돌아보았다.

“뭘 보네. 얼추 치장했으니 가자우.”

지태가 입술 끝으로 웃고는 앞장서 방을 나섰다.

* * *

창문을 검정색 짙은 선팅으로 가린 밴이 속력을 내어 달려간 곳은 팔당 인근이었다.

남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지어진 별장이었다.

별장 주차장이 만차인 까닭에 입구의 도로에까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방문객들의 수준을 말해주듯 하나같이 고급 외제 승용차들이다.

별장으로 접어드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비탈진 언덕을 올라가자 주차장에 나와 있던 김성욱이 반겼다.

“어서 와, 한 회장. 김영철 중……. 아니, 영철 씨도 어서 오시고.”

김성욱은 무심결에 김영철 중좌라고 호칭하려다가 주변을 의식하고는 얼른 바꿔 불렀다.

물론 주변을 의식한다고는 했지만 사실 근처엔 한강실업 소속 요원들밖에는 없었다.

방문객들의 차량을 운전해온 전속 운전기사들은 모두 한쪽에 따로 모여 있어 주차장엔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대단하군요. 많이도 끌어 모으셨습니다.”

지태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김성욱이 괜히 목에 힘을 주는 척했다.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BH에서 특별 지시를 내려 진행되는 작전인데. 그래서 내가 좀 힘을 썼지.”

“고맙습네다, 김성욱 선생.”

“워, 워! 행여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말투 쓰지 마쇼. 김 선생은 비공식적으로 방남을 한 처지라서 자칫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알갔습네다. 내래 아가리를 확 닫고 있갔시오.”

“뭘 그렇게까지!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꼭 삐쳐서 그런 것 같잖아.”

지태가 흘깃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또 괜한 사람 건들고 자빠졌고만, 기래.”

김영철은 팔짱을 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지태는 김성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까진 어떻습니까? 분위기는 괜찮아요?”

“음, 좋아. 특히 몇몇 물건 같은 경우엔 서로 소유하겠다며 입찰 경쟁이 심해. 덕분에 경매 가격이 치솟아서 우리… 아니, 자네야 좋겠지만.”

김성욱이 한쪽 눈을 감아 보이며 윙크를 해댔다.

북한 당국과 지태 사이에서 오간 거래 조건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김영철은 골동품의 판매 대금을 2천만 불만 보장해 달라고 했다.

얼마를 더 받아내든 그 나머지 차액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고.

그러니 골동품들의 경매 가격이 높아져 예상외의 수입을 올리게 된다면 2천만 불을 제외한 차액은 모두 지태의 몫이 되는 거다.

“나중에 밥 한 끼 사드릴게. 그럼 됐죠?”

“허허. 겨우 밥 한 끼로 때우려 드나? 회장씩이나 돼 가지고선 너무 쪼잔한 거 아냐?”

“그럼 없던 일로 하죠, 뭐.”

지태가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돌리자 김성욱이 장난스럽게 그의 팔뚝을 잡고 매달렸다.

“그래, 그래. 밥 한 끼로 만족하지.”

지태가 돌아보며 픽 웃었다.

김성욱에게 이렇게 귀여운 면도 있나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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