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땅굴 작전(5)
“한 회장, 나야.”
목소리를 들어보니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지태가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김 사장님도 오셨습니까.”
“당연히 와야지. 이런 중요한 작전에 내가 빠져서 되겠나. 참, 인사드리게. 합참 정보 본부장이신 현강호 장군님이시네. 장군님, 한스그룹 한지태 회장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젊으신 분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십니다.”
“별말씀을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간단히 수인사를 마친 후 지태는 남측 주요 인사에게 김영철을 소개했다.
그사이 국정원 요원들은 재빨리 전동 카트에서 물건들을 내려 미리 대기시켜 놓은 군용 앰뷸런스 3대에 나누어 싣고 있었다.
비교적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최기철은 요원들을 독려하기 위해 낮고 투박한 목소리로 연신 참견을 해댔다.
“자, 빨리. 서둘러, 어서!”
김성욱이 흘깃 돌아보고는 현강호 중장과 지태 등에게 말했다.
“얼추 다 실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슬슬 차에 오르시죠.”
* * *
철원의 전방 지역을 빠져나올 때까지 골동품을 실은 3대의 군용 앰뷸런스는 스몰라이트만 켠 채 운행했다.
그것은 지태를 태운 차량을 비롯해 뒤따르는 모든 차량들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찌 자동차의 속도를 높일 수 있겠는가.
차량들의 행렬이 느릿느릿한 속도로 철원의 고석정 인근에 이르자 선도 차인 김성욱의 밴이 멈춰 섰다.
인근에 민가들의 불빛조차 까마득하게 보이는 아주 한적한 곳이었다.
그곳엔 무진동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사전에 약속이 되어있는 듯 요원들이 튀어나와 군용 앰뷸런스에 실린 골동품들을 트럭에 다시 옮겨 실었다.
물건을 내려놓은 군용 앰뷸런스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자 그때부터는 모든 차량들이 헤드라이트를 환히 밝히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김성욱은 새벽 4시가 훌쩍 넘은 시각 남양주의 어느 물류창고 앞에 차를 세웠다.
처음부터 비워져 있던 곳인지, 아니면 오늘의 작전을 위해 비워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경비원은 물론 상주하는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무진동 트럭이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국정원 요원들이 서둘러 물건들을 차에서 내렸다.
“김 사장, 일단 오늘 작전은 이것으로 끝이지?”
골동품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현강호 합참 정보 본부장이 김성욱에게 물었다.
“예, 장군님. 오늘 애쓰셨습니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다들 수고하셨네.”
현강호 중장이 고개를 돌려 지태를 바라보았다.
“한 회장, 아깐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눴습니다. 조만간 시간을 내서 식사나 한 끼 하십시다.”
“그러겠습니다, 본부장님.”
“그럼 나 먼저 들어가겠네. 마무리 잘하고 또 보세, 김 사장.”
“알겠습니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현강호 중장에게 묵례를 해 보인 다음 김성욱은 이정명 부장을 돌아보았다.
“야, 이 부장아!”
“예, 사장님.”
“장군님을 댁까지 모셔다 드려.”
“예, 알겠습니다. 장군님, 가시죠.”
“그러지. 한 회장, 먼저 갑니다. 다음에 꼭 시간 만들어요.”
현강호 중장은 지태에게 악수를 청한 뒤 이정명 부장이 가리키는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멀어지자 지태가 물었다.
“이곳 보안은 괜찮습니까?”
“우리 애들이 지킬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저거 잃어버려도 나야 상관없는데, 그러면 이 친구가 통곡할 겁니다. 아니면 북에 돌아가자마자 아오지 탄광에 끌려가던지.”
지태가 짓궂은 표정으로 김영철을 가리켰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자 농담을 던질 여유도 생긴 지태였다.
“이 간나래 지금 뭐라 하는 거이네. 똥개도 제 구역에선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더니 딱 그 짝인 거이네?”
“거봐, 벌써 울먹이는 게 저거 잃어버렸다간 통곡할 얼굴이라니까.”
“이거이 환장하갔구만, 기래.”
김영철이 제 가슴팍을 킹콩처럼 주먹으로 쳐댔다.
잠시 웃고 즐기던 시간이 지나자 지태가 정색했다.
그리고 김성욱에게 물었다.
“구매자들은 언제쯤 소집하기로 했습니까?
“가만있자. 아, 딱 5일 후. 일단 전문가들을 시켜 저것들 감정에 들어갈 거야. 그런 다음 은밀한 장소로 옮겨갈 거고. 거긴 차후에 알려 주도록 하지.”
김성욱은 물건을 다 내리고 이제 막 창고를 빠져나오는 빈 트럭을 보며 말했다.
지태는 어쩌면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재벌가 사모들의 행차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이 친구는 그동안 어디에……?”
지태가 턱짓으로 김영철을 가리키며 물었다.
떳떳하게 얼굴을 드러내 놓고 서울 시내를 활보할 처지가 아니라서 묻는 거였다.
그게 아니라면 시내 호텔을 잡아 북에서 자신이 대접을 받았던 것처럼 그에게도 똑같이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리 부서 전용 안가로 모실 거야. 괜찮겠죠, 김영철 중좌?”
“굶기지 않고 밥만 멕여 준다면야 문제래 있갔습네까. 내래 일 없시요.”
“쫄지 말고 얌전히 지내고 있어. 이 형님이 자주 찾아가서 놀아줄 테니까.”
“계속 깝죽댈 거이네? 기러다 맞는 수가 있어야!”
김영철은 짐짓 인상을 긁어댔지만, 사실 지태의 진심을 읽었다.
생소하고 낯선 환경, 적지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느낄 자신의 무거운 긴장감을 애써 풀어주려고 조금은 오버하고 있다는 것을.
* * *
한강실업의 전용 안가는 광진구 아차산 근방에 있었다.
현재 시각 아침 6시.
바지런한 샐러리맨이라면 출근을 위해 벌써 서두르고 있을 시각이다.
지태는 혼자 낯선 환경에 놓일 김영철을 배려해 그와 안가까지 동행했다.
날밤을 새우고 곧장 회사로 출근하기도 그래서 지태는 김영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점심 무렵까지 한숨 푹 자고 나면 피로는 곧 풀릴 것이다.
최봉준이 빙의한 이후 피부로 느끼는 점이 바로 이거였다.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약간의 휴식만 취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
신장 하나를 떼어낸 몸인데도 그렇다.
안가엔 방이 세 개가 있었는데, 그중 안방쯤으로 여겨지는 큰 방을 김영철에게 내주었다.
나머지 작은 방 두 개 중 하나는 요원 셋이 벌써 들어가 시체 놀이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김성욱이 독차지하고 누워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나 뭐라나.
“내래 이런 말 한 적이 있던가?”
잠자리에 누운 채 김영철이 고개만 돌려 지태를 쳐다보았다.
아직 말똥말똥한 눈동자로 천장을 보고 있던 지태가 시선은 그대로 둔 채 대답했다.
“뭘?”
“내래 고추 떨어질까 쑥스럽긴 하지만 말이디…….”
“뭔데?”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머뭇대는 김영철의 태도에 지태가 급기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쩝 소리가 나게 입맛을 다신 김영철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기거이, 기러니끼니 거 뭣이냐, 고맙다고!”
“엉?”
지태는 똑똑히 들었지만, 행여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고 굳이 되물었다.
억세고 단단하며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김영철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온 까닭이다.
“이거이 엄청시리 쑥스럽고만, 기래. 고맙단 말이디.”
지태가 확인을 받은 다음에야 풀썩 웃었다.
“자네도 그런 말을 할 줄 알아? 의외다, 그거.”
“내래 지금껏 살아오면서 별로 해 보디 못한 말이야. 긴데 이번만큼은 꼭 해야 되갔다. 내래 한 몸만 생각했다면 이런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질 못해. 아암, 기렇고말고. 한데 말이디, 이건 공화국 차원이란 말이야. 기래서 고맙다고 기러는 기야.”
“그런 정신은 사상적 이념을 떠나 좋은 거지. 애국심을 품고 산다는 거. 난 이번 일에 끼어들긴 했지만, 자네처럼 그런 애국심 따위로 똘똘 뭉쳐있는 건 아니었거든.”
“기건 지태 동무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내가 볼 땐 지태 동무도 남조선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 기걸 동무래 스스로가 못 느낄 뿐이야, 기럼!”
“그런가?”
지태가 쓰게 웃었다.
타인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런 거라면 어쩌면 그럴지도.
지태가 손을 뻗어 김영철의 복부를 톡톡 쳤다.
“밤새 움직이느라 많이 피곤할 텐데 이제 눈 좀 붙이자.”
“기래. 잘 자라우.”
김영철은 고개를 바로 하며 두 눈을 감았다.
지태가 눈동자만 굴려 흘깃 돌아본 후 그 자신도 슬슬 무거워져 오는 눈꺼풀을 천천히 닫았다.
* * *
생각보다 많이 고단했던 모양이다.
정오가 되기 전에 깬 지태보다 김영철은 한 시간쯤 더 누워 있었다.
그렇다고 잠을 깊이 든 것 같지는 않았는데 비몽사몽간에 꾸물대는 듯 보였다.
지태가 샤워를 마치고 말끔한 슈트로 갈아입었을 즈음에야 김영철은 겨우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밥 먹게 씻어.”
한마디를 던지고 거실로 나온 지태는 국정원 요원과 눈이 마주치자 물었다.
“부국장님께선?”
“아, 사장님은 벌써 출근하셨습니다. 두 분 일어나시면 맛난 점심을 대접하라 하시고.”
“외출할 수는 있는 겁니까?”
지태가 안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김영철을 지칭하는 거다.
요원이 머쓱한 웃음을 피워냈다.
“배달의 민족답게!”
결국 음식을 배달해 먹자는 이야기다.
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원이 다가와 물었다.
“메뉴는 뭐가 좋을까요?”
“글쎄요. 난 좀 더 좋은 걸 대접해주고 싶었는데…….”
북한에서 후한 대접을 받은 것을 상기하는 지태였다.
최고 수준의 대접을 받고 왔는데 난생처음 남한을 방문한 김영철에게 배달 음식이 고작이라니.
지태는 입맛이 썼다.
“무난하게 탕 종류가 어떨까요?”
“알겠습니다. 해물탕을 전문으로 하는 맛집이 근처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배달을 시키죠.”
요원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 * *
“이야,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김영철과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회사로 출근했을 때였다.
조현민이 홀딩스 대표이사실로 찾아와 내뱉은 첫마디였다.
자세한 일정은 함구했던 터라 지태가 언제 돌아오는 것까지는 그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됐어요. 별일 없었죠?”
“우리 그룹에서 너만 별일 없으면 전부 다 무난해.”
조현민이 큭큭 웃었다.
그러다가 생각났다는 듯 지태를 쳐다보았다.
“참, 박찬익 사장이 케냐에서 귀국했어.”
“아, 그래요? 매장 설치는 다 마무리했대요?”
“이제 물건만 입점하면 돼. 케냐 법인에서 L/C를 보내오는 대로 우린 선적해주면 되고.”
“잘됐네요.”
지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
대답에 맞춰 문이 열리고 이동구 한스전자 사장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 회장, 출장은 잘 다녀오셨소? 조 사장도 계셨네.”
이동구 사장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제가 출근한 건 어떻게 아셨을까? 혹시 이 사장님께서 여기에 누구 심어 놓은 거 아닙니까?”
“에이, 한 회장이 무슨 투명인간이에요? 그리고 여기 직원들이 몇인데, 보는 눈이 어디 하나둘입니까?”
이동구 사장은 조현민의 맞은편에 앉으며 다시 웃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겸사겸사해서 들렀어요. 보고드릴 것도 좀 있고.”
“예, 사장님. 말씀해 보세요.”
“요즘 부경물산에서 소형가전 매장을 추진 중이라는데, 혹시 소문 들으셨습니까?”
“그런 소문이 돌고 있습니까?”
“나도 다모아에 납품하는 전자 사장들한테서 들은 얘깁니다. 그쪽에서 압박이 심한가 봐요. 다모아하고 거래를 끊으라고 말이지. 안 그러면 모든 판로를 막아버리겠다고.”
“허, 이런 개새끼들이 다 있나!”
다혈질인 조현민의 입에서 먼저 분기 어린 욕설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