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물꼬를 트다(3)
지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자정 언저리였다.
‘지금쯤 성원이는 잠자리에 들었을까?’
잠시 고민하던 지태는 곧 전화 목록을 뒤져 강성원을 찾아내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강성원의 목소리는 생생했다.
“안 잤냐?”
- 잠이 다 뭐냐. 귀한 자제분들께서 곧 파티를 벌인다고 해서 잠복 중이다.
“웬 파티?”
- 몸들이 허약한가 봐. 단체로 약을 복용할 모양이야.
지태가 쓰게 웃었다.
상류층 자제들이 마약 파티를 벌인다는 제보가 들어온 모양이다.
“통화 괜찮냐?”
- 말해, 괜찮아. 옆에 아무도 없어.
“아까 돈두하고 통화를 해봤는데, 너 요즘 강창근이 찾고 다닌다며?”
- 들었냐?
강성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김이 팍 샌다는 느낌이었다.
- 근데 두 번째 약속날짜 잡아 놓고는 갑자기 튀어버렸다. 시발, 깡패 놈의 말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갑자기 그놈 마음은 왜 변한 거냐?”
- 내가 알게 뭐냐. 생각해보니 억울한가 보지, 뭐. 주범은 임경남 패거리들인데 자기 혼자 독박 쓸까 봐.
“음!”
지태가 입맛이 쓴 듯 묵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강성원이 물었다.
- 넌 별일 없고?
“나야 뭐 팔자에도 없는 애국한답시고 이리저리 채이고 다니지, 뭐. 그나저나 결혼 앞둔 새신랑께서 이렇게 바빠서 어뜩하냐? 요즘 아름 씨는 자주 만나?”
- 그러잖아도 얼굴 잊어먹게 생겼다. 날마다 툴툴거려. 이 나라에 오빠 혼자만 경찰이냐고.
“언제 한번 같이 만나자. 좋은 데서 식사나 하게.”
- 그래. 야, 전화 끊자. 이제 슬슬 움직이는가 보다.
강성원이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지태는 끊어진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다하며 바쁘게 사는 것까지는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여유롭게 우정 나눌 시간이 없다는 점이 지태는 아쉬웠다.
* * *
끄응.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가 들려 유성두가 옆을 돌아보았다.
두 손이 뒤로 결박된 채 콘크리트 기둥에 묶여있던 강창근이 꿈틀대며 낸 소리였다.
유성두는 자신도 그와 똑같이 묶여있으면서도 보스를 아픈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회, 회장님.”
“괜찮아, 너는 견딜 만하냐?”
강창근의 물음에 유성두는 고개를 푹 떨궜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네놈이 죄송할 게 뭐 있어. 설마 대검 애새끼들한테 꼬리가 밟혔을 줄 어디 예상이나 했겠냐.”
“제가 애들을 하루만 늦게 내보냈어도…….”
유성두는 차마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급기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강성원을 만나고 온 뒤 강창근은 아지트에 함께 머물던 행동대를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어차피 보스인 그 자신이 세상에 나서는 순간 타워파라는 조직은 유명무실해지고 말 것이어서 얼마간의 돈을 쥐어 주며 제각각 살길을 찾으라고 내보낸 것이다.
그렇게 조치를 취한 것은 이 난데없는 습격을 받기 하루 전이었다.
유성두는 지금 그것을 자책하고 있는 거다.
하루만 늦게 애들을 내보냈더라면 보스와 자신이 이렇듯 처참하게 묶여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들을 내보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날 새벽 방배동의 아지트로 한 무리의 괴한들이 쳐들어왔다.
연변 사투리를 심하게 구사하는 놈들이었다.
누군가의 청부를 받은 연변 거지들 같았다.
“임경남, 이현욱, 이 개새끼들!”
강창근은 습격의 배후로 두 사람을 확신하는 듯했다.
자신의 은신처를 찾아내 임경남에게 정보를 넘긴 것은 바로 대검 조직범죄과였다.
원래 강성원이 내사 중이던 것을 양재동 멤버들의 청탁으로 사건 자체를 무마할 요량으로 빼앗아간 그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정황상 이 모든 게 임경남과 그의 패거리들의 소행이라고 보고 있는 거다.
“회장님,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제가 어떡하든 기회를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유성두가 나름 비장한 목소리를 냈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이었다.
목소리 끝이 떨리며 곧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 그 증거였다.
강창근이 쓸쓸한 미소를 날렸다.
그 자신이나 유성두나 현재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곳이 머잖아 자신들의 무덤이 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방배동 아지트를 급습한 연변 거지들에 맞서 목숨을 건 혈투를 펼쳤지만, 단둘이서 열 명 남짓 되는 전문 싸움꾼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힘에 부쳐 놈들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는데 이곳으로 이동하는 도중 겨우 의식을 차려 밖을 내다보니 청평 별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국내인이 아닌 연변의 청부업자들까지 사서 자신들을 습격한 것을 보면 결코 살려 두지 않겠다는 놈들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송민철을 살해하기 직전 데려왔던 바로 그 청평별장이 아니던가.
그러니 강창근이나 유성두가 자신들의 마지막을 예감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강창근은 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로 지하실 출입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밖에서 희미하게 연변 사투리가 들려온 까닭이다.
연변 거지들을 총지휘하는 대가리의 목소리였는데, 다른 연변 거지들과는 달리 전문 청부업자 같았다.
“이보쇼. 우리 얼매나 기다려야 하오? 긴데 기거 암까? 시간이 갈수록 내 몸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는 걸 말이오. 그니까 그냥 토막 내서 묻어버리는 게…….”
청부한 의뢰인 중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듣기에도 오싹한 소리를 스스럼없이 토해내던 대가리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지하실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듯했다.
강창근과 유성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그룹 사장단 회의가 소집됐다.
모처럼 지태가 주관하는 회의였다.
무역의 조현민, 전자의 이동구와 유근영, 다모아의 박찬익, 멋진 사람들의 강동진, 홀딩스의 유기영 등이 회의실에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지태는 각 사의 대표들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았다.
사실 조현민으로부터 그룹 돌아가는 사정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자리를 소집한 것은 좀 더 경각심을 갖고 업무에 임하라는 일종의 채찍질과 더욱 분발해달라고 격려를 하기 위함이었다.
무역과 전자, 그리고 새로 인수한 ‘멋진 사람들’의 강동진 사장의 보고에 이어 다모아 박찬익 사장의 보고까지 모두 끝났다.
각 사의 사업들이 별 무리 없이 잘 진행되어가고 있어서 지태는 만족스러웠다.
“박찬익 사장님!”
“예, 회장님.”
“다모아 해외 1호 매장 설치 건 말입니다. 현재 어느 정도까지 진척이 있습니까?”
“기민성 지사장이 건물주와 가계약을 했다고 합니다. 기 지사장이 어련히 알아서 잘 진행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안으로 케냐에 한번 다녀올 생각입니다.”
“박 사장님이 워낙 빈틈이 없으신 분이니 믿고 있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지태가 박찬익을 칭찬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주머니 안에 진동으로 놓아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회의가 진행되는 중이라서 당장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 몰라서 발신자는 확인해 보았다.
국정원 김성욱의 전화였다.
룸살롱에서 술자리를 함께하고 헤어진 지 5일 만에 취해온 연락이다.
골동품 수송 작전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가 끝난 모양이다.
지태는 종료 버튼을 옆으로 밀어 일단 전화를 끊은 다음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
10분 뒤에 자신이 연락을 주겠다는 메시지였다.
* * *
오후 3시.
김성욱은 회사 근처 카페에 와 있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미리 와서 전화를 했을까 싶어 지태는 웃음이 났다.
지태가 웃음 띤 얼굴을 하고서 김성욱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면 우리 부국장님께서 손수 달려오셨을까?”
“쫄병이 무슨 힘이 있나.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얼른 명을 받들어야지.”
“부국장님이 쫄병이면 그 밑에 계신 분들은 뭡니까?”
“이번 작전에서 내가 젤 쫄병이란 얘기야.”
김성욱은 떫은 입맛을 다시더니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결과는 나왔고요?”
“그랬으니까 이렇게 한달음에 왔지.”
“언제죠, 작전은?”
지태가 묻자 김성욱은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바싹 붙이며 다가왔다.
손님이 없어 듣는 이도 없을 테지만, 그만큼 민감한 사항이라서 본능적으로 취해진 행동이었다.
“앞으로 열흘 뒤!”
“열흘 뒤요?”
“그래. 앞으로 열흘 동안은 땅굴을 보강 공사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 안보 관광객들을 입장시키지 않을 거야. 물론 관할 부대 병사들도 마찬가지고.”
“작전은 밤에 이뤄지겠죠?”
“그걸 말이라고 해? 운반 차량도 일정 지점까지는 군용 트럭을 이용할 거야.”
“그럼 운전병들이 눈치를 챌 거 아닙니까?”
“차량은 홍천 제1 야수교의 교육생 차량을 빼내서 쓸 거고, 운전은 우리 요원들이 직접!”
“그런 움직임에 대해서 기무사가 감지하지 못할까요?”
“그에 대한 방안과 조치는 이미 마련해 뒀으니까 걱정 마.”
김성욱이 비로소 숙였던 상체를 거둬 가며 씩 웃었다.
지태가 짓궂은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그 회사는 댓글만 잘 달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이런. 또, 또 그 이야기!”
김성욱이 째려보았지만, 그것은 지태의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려는 과장된 몸짓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정색하고는 주변을 다시 본능적으로 훑었다.
“그리고 이거!”
김성욱은 주머니 안에 넣어둔 뭔가를 꺼내 주먹을 꽉 쥔 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지태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뭔가를 툭 떨궈주었다.
받는 순간 지태도 손바닥을 오므렸다.
워낙 순식간에 주고받은 것이라서 내용물을 확인할 새도 없었지만, 딱딱한 그 물체의 정체를 지태는 USB라고 직감했다.
“작전 시간과 이쪽에서 취할 내용들이 모두 담겨있어. 그걸 북에 전해주게.”
“……?”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전달만 하면 되는 겁니까? 부국장님 눈빛을 보니까 뭔가를 또 숨겨 놓은 거 같은데……?”
“허허. 이제 우리가 부부지간이 다 됐구먼. 눈빛만 보고도 내 뜻을 알아차리다니.”
“설마 그겁니까?”
“설마… 그게 맞을 거야!”
“하아!”
순간 지태가 허공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가 올라갔다가 그 물건들과 함께 같이 내려오는 거야.”
“미치겠네, 정말!”
그러나 김성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서두는 게 좋을 거야. 그쪽도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내 생각엔 늦어도 삼사 일 뒤엔 출발해야 겨우 시간을 맞출 거 같아.”
지태는 ‘어련하시겠어!’ 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김성욱이 짓궂은 표정으로 씩 웃었다.
* * *
이돈두는 하나 파이낸스의 대표이사로부터 모처럼 영업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보고가 끝나갈 무렵 그는 아우를 근엄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고객들에게 절대 건달 냄새는 풍기지 마. 양아치 사채업자 마인드로 회사를 운영하지 말라고. 알겠어?”
“예, 회장님.”
“우린 이제 음지를 나와 양지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예, 회장님.”
이돈두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밖에 나갔던 윤학수가 다시금 급하게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