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물꼬를 트다(2)
북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한동안 뜸했던 김성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좀 보자는 거였다.
지태는 급히 처리할 업무만 끝내고 곧 가겠다고 했지만, 김성욱은 그리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별일이시네요? 서둘지 말라는 말씀을 다 하시고?”
- 그럴 일이 좀 있어. 암튼 내가 저녁에 다시 연락하지. 절대 다른 약속을 잡으면 안 되네.
김성욱은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지태는 전화를 끊고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별 싱거운 양반을 다 보겠다는 듯 픽 웃어넘겼다.
그랬는데 저녁 8시를 넘겼을 무렵 김성욱과 만난 지태는 제 귀를 의심했다.
단둘이 만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자신과 지금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그 행선지가 바로 청와대라는 거다.
처음엔 자기가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농담하는 거죠?”
“나라님 만나는 일에 농담을 할 만큼 내가 푼수 빠진 사람이 아니야.”
“헐!”
지태와 김성욱은 광화문 근처에 차를 세워 놓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조금 있으려니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청와대 경호처에서 보내온 차량이었다.
경호원이 운전하는 승용차는 별다른 검문 없이 정문을 통과하여 곧바로 대통령의 관저로 향했다.
관저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부속실장이 지태와 김성욱을 맞았다.
“들어가시죠. 대통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속실장이 앞장서 들어서더니 어느 방문 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부속실장이 문을 열었는데 그곳은 작은 회의실 같았다.
기다리고 있던 대통령이 환한 웃음으로 두 사람을 반겼다.
반백의 헤어와 업무 외적인 시간이어서 드레스셔츠 위에 간단히 카디건만 걸쳐 입었을 뿐이었다.
한데 그게 오히려 더 중후한 멋을 풍겼다.
“어서 오세요, 한 회장! 대통령 김무인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대통령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김무인 대통령은 새삼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며 지태에게 친근함을 보여 왔다.
“한지탭니다, 대통령님.”
“어서 오세요, 김 국장!”
김무인 대통령은 김성욱의 직위를 한 단계 승진시켜 국장으로 호칭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통령님. 김성욱입니다.”
“자, 앉으십시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자 대통령은 처음엔 가벼운 주제를 화제로 올려놓고 지태와 김성욱의 긴장감을 풀어 주려 애썼다.
접대용으로 내놓은 찻잔이 적당히 식어갈 무렵 대통령이 문득 그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회장! 녹음 파일은 잘 들었어요. 최고 권력자의 목소리를 녹음해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애 많이 쓰셨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 기억력만 빌려 말씀을 전달한다면 자칫 놓칠 부분도 있고 해서 조금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대통령씩이나 돼서 이런 식으로 말을 해도 되나 싶지만, 암튼 잘했어요. 덕분에 나는 편안하게 앉아서 북쪽 김 위원장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
지태가 이번에는 대꾸 없이 그저 묵례로 화답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면밀하게 지켜봐야 북의 진심을 알겠지만, 우선 한 회장을 통해 내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만 놓고 보면 그래요. 북측도 극단적인 대립으로 인해 서로가 공멸하고야 마는 어리석음은 결코 원치 않는다는 것! 아주 고무적인 일이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북한은 체제 보장만 확보된다면 핵을 과감히 포기하겠다고 하더군요. 핵이 인민들의 굶주림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대통령님.”
“목소리에서 풍기는 뉘앙스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긴 합디다. 뭔가 절실하고 간절하다는 느낌도 받았고.”
“궁극적으로 북한이 꿈꾸는 건 정상 국가로써의 지위를 인정을 받는 것이고, 둘째 그것을 토대로 한 경제 도약입니다.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말입니다.”
과감한 개혁 개방을 시행해 놀라운 경제 발전과 혁명의 신화를 써 내려간 중국이나 베트남의 케이스를 북쪽도 원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북한처럼 1인 독재가 공고히 된 나라에서는 최고 권력자의 의지만 강력하다면 뭐는 불가능할까. 그래요. 그렇담 우리도 북쪽에 가슴을 열어 보이겠다는 성의라도 표시해야겠지요?”
김무인 대통령이 설록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살짝 입술만 적시고는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지태와 김성욱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사실 오늘 새벽에 비공개 NSC를 소집했어요. 안보실장과 국방장관, 그리고 참모총장까지 불러서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조금은 부끄러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동맹인 미군과 유엔사조차 속여야 하는 작전이니까요.”
대통령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곧 말을 덧붙였다.
“두 분이 군의 협조를 받아 이번 작전을 진행해보세요.”
이윽고 땅굴을 통한 골동품 수송 작전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다.
지태는 무심코 김성욱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김성욱이 희미하게 웃는 입술로 고개를 힘주어 끄덕여 보였다.
* * *
“술 한 잔 같이 할 텐가?”
차가 주차되어 있는 광화문 근처에서 김성욱이 물었다.
청와대에 들어갈 때 그랬던 것처럼 나올 때도 경호처요원이 두 사람을 이곳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갔다.
“좋습니다.”
따로 할 말이 있는 듯 보여서 지태는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은 지태 역시도 드디어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진 상황이니 이에 관하여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조용한 곳이 낫겠죠?”
“그러는 게 좋겠지.”
“그럼 친구가 하는 술집이 좋겠네요. 그곳에서의 술값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누구, 아! 그 깡패 친구 말인가?”
“에이, 참. 이젠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니까 그러시네. 양지를 지향하는 척만 하는 부국장님의 회사와는 달리 그 친구는 진짜로 양지에서 놉니다!”
“뭐어? 하는 척만 해, 우리가?”
김성욱이 입을 떡 벌렸다.
“솔직히 국정원은 늘 말만 앞세웠잖아요. 정권 바뀔 때마다 매번 하는 척만.”
지태의 타박에 할 말이 없어진 김성욱은 떫은 입맛만 다셨다.
그러다가 흐흐 웃었다.
“그럼 오늘 모처럼 자네한테 좋은 술 한 잔 얻어먹어볼까?”
“그러시죠, 얼마든지요.”
지태가 밝게 웃어 주었다.
둘은 각자의 차를 몰고 강남으로 넘어갔다.
가는 도중에 지태는 이돈두에게 전화를 넣어 조용한 룸 하나를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돈두에게 말을 안 하고 찾아간다 해도 어차피 그의 귀에 들어갈 것은 자명하다.
그럴 바에는 미리 통고를 해주는 게 낫지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와 술자리를 가질 것인가에 대해 말해주고 나면 불쑥 찾아오는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이돈두가 쓰게 웃었다.
- 야, 염려 마라. 양복쟁이하고 마시는 술자리엔 아무리 네가 사정해도 안 갈 거니까. 그나저나 요즘 성원이하고 통화는 해봤냐?
갑자기 강성원을 언급하는 이돈두의 태도가 수상했다.
“요즘 좀 바빠서……. 근데 무슨 일 있냐?”
- 무슨 일이 있다기보다는……. 그니까 그게 말이지…….
“……!”
지태는 이어지는 이돈두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못 심각해져 갔다.
* * *
이돈두의 지시를 받은 룸살롱의 여 실장은 복도 끝 가장 조용한 룸으로 지태와 김성욱을 안내했다.
자리가 자리니만큼 당연히 여자들은 부르지 않았다.
아직 주문하기 전이었는데 술과 안주가 미리 나왔다.
지태가 여 실장을 보며 농담을 건넸다.
“돈두, 이 자식 나를 완전히 벗겨 먹으려드네.”
“호호, 술값은 걱정하지 마시라고…….”
“에이, 공짜 술 얻어먹고 얼마나 공치사를 들으려고! 오늘 술값은 내가 낼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음 됩니다.”
“그거야 뭐 편하신 대로 하시구요……. 암튼 좋은 시간 가지세요.”
여 실장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룸살롱에 와서 호스티스를 부르지 않고 남자 둘이서 술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긴히 나눌 대화가 있다는 뜻인 거다.
명목상 술자리를 자신이 먼저 제안한 것이니 김성욱이 술병을 들어 지태의 빈 잔에 따라 주었다.
그렇게 술잔이 몇 순배 돌 때까지 두 사람은 조금 전 청와대에서 만난 대통령을 화제로 가벼운 대화만 나눴다.
그러다가 이쯤 하면 워밍업이 되었겠다 싶어 지태가 먼저 골동품 수송 작전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이번 작전은 누구와 세부적으로 논의를 해야 합니까?”
“군사작전이니까 당연히 국방부 측하고 해야겠지.”
그걸 누가 몰라서 묻나.
지태가 빤히 쳐다보자 김성욱이 풀썩 웃었다.
“듣는 귀가 많으면 새어 나갈 입도 그만큼 많아질 거 아냐. 그니까 대통령께 위임을 받은 참모총장이 가장 신뢰할 만한 누군가로 추천해 주시겠지.”
“기무사까지 속일 필요가 있겠군요.”
“그야 물론이지!”
“허, 이거 007작전이 따로 없네.”
“워낙 민감한 사안이 아닌가. 자칫 문제가 불거지게 되면 우리는 미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궁지에 몰릴 수 있어.”
“내부적으론 대통령의 탄핵까지 몰아갈 일이고요?”
“그만큼 골 때리는 상황을 지금 우리가 역적모의하고 있는 중이지.”
김성욱이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따라서 쓰게 웃던 지태가 물었다.
“세부적인 작전을 토의하는 곳에는 제가 참여하지 못하는 거죠?”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 아무리 이번 일을 담당하는 책임자라 해도 군사작전에 민간인이 끼어드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그렇담 다행이네요. 그건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 할 상황입니다. 큭!”
지태가 잘되었다는 식으로 픽 웃으며 술잔을 들자 김성욱 역시 따라 웃고는 자신의 온더록스 잔에 얼음 몇 개를 더 추가했다.
* * *
여 실장은 이돈두의 지시라면서 한사코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지태는 고집을 피워 끝내 술값을 계산했다.
이돈두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신세를 지게 되면 나중엔 스스로 염치가 없어진다.
그러면 마음 편하게 찾아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다.
룸살롱 밖으로 나오니 미리 콜을 해 놨던 대리기사 둘이 와 있었다.
“한 회장, 덕분에 잘 마셨네.”
“뇌물이라고 생각하셔요.”
“웬 뇌물?”
“어지간하면 골치 아픈 일에 저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처음엔 몰라도 내가 보기에 지금은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어휴,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셔요. 내 사업도 바쁜데 영양가 없이 이러는 거 정말 싫습니다요!”
지태가 펄쩍 뛰는 시늉을 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글쎄. 영양가가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김성욱이 적당히 불콰해진 얼굴로 웃었다.
지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김성욱을 승용차 쪽으로 밀었다.
“자, 어서 타세요.”
“자네는?”
“부국장님 가시는 거 보고 저도 바로 갈 겁니다.”
“그래, 먼저 들어가네. 결과 나오면 바로 또 연락하지.”
“예.”
자신의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탄 김성욱이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승용차 후미등이 눈에서 멀어지자 지태도 자신의 승용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 방향으로 가는 도중 지태는 피곤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천천히 눈을 떴다.
문득 이돈두와의 통화가 떠올라서였다.
요즘 강성원의 움직임이 부쩍 바빠진 것 같다고 했다.
타워파의 보스 강창근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거였다.
“왜 찾아다녀? 얼마 전에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 그랬지. 만나서 세상 밖으로 나와 모든 것을 다 폭로하겠다고 약속을 했거든.
“근데?”
- 사라졌어!
“어?”
- 사라졌다고. 잠수를 탄 건지 아니면 하늘로 솟아버렸는지 흔적조차 없어.
“마음이 변한 거 아냐? 그래서 잠수를 탄 거고.”
- 사람 마음이 변하는 것까지야 어쩔 순 없지. 하지만 나나 성원이나 같은 말을 했었어. 창근 형님이 뭔가 확실히 결심은 선 것 같다고.
“아지트는 또 안 가봤어?”
- 당근 가봤지. 근데 없어. 급히 떠났는지 어수선하게 널려져 있더라. 똘마니들 흔적까지 죄다 사라졌어.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었다.
그사이 김성욱과 만나기로 했던 룸살롱에 도착한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