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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15화 (215/272)

215화. 물꼬를 트다(1)

특급 호텔보다 더 나은 시설을 자랑하는 고방산 초대소였으니 이곳의 음식 또한 최고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태는 옥류관의 냉면이 더 궁금했다.

TV나 소문으로만 접했던 옥류관의 냉면 맛을 기어이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기렇갔구만. 옥류관 랭면이래 입에서 살살 녹디. 고럼!”

김영철도 인정한다는 듯 군소리 없이 지태를 평양 시내로 데리고 나왔다.

옥류관은 평양 시내 중구역 대동강변 옥류교 근처에 있었는데 2층 구조로 된 한옥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역시 끝내주는 맛이었다.

왜 옥류관의 평양냉면이 북한 음식의 대명사처럼 되었는지를 바로 알게 만들어주는 맛이었다.

지태는 한 그릇으로는 부족해 한 그릇을 더 추가해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옥류관을 나오는데 김영철이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앞에 없는데도 군기가 바짝 든 것을 보면 꽤나 높은 사람 같았다.

김영철은 주로 ‘네!’라는 대답만 연발했다.

전화를 마치고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김영철이 지태를 쳐다보았다.

“누군데 그렇게 쫄았어?”

“인민군참모장 동지!”

인민군참모장이라면 군부 내 최고의 실력자였다.

“근데 왜?”

“동무래 좀 보자신다.”

“나를?”

“골동품 수송 작전에 관해 이야기를 좀 나누자는구만.”

지태가 입술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철의 제안대로 땅굴을 이용해 수송할 것이라면 남북 간 군사 당국자들 간의 승인과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의견을 충분히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태는 현재 남북 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정 합의된 내용을 한국 정부에 가져가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자신에겐 있었다.

“언제?”

“저녁 무렵에. 고방산 초대소에서 저녁을 함께 하시자는구만, 기래.”

지태가 알겠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지태 선생, 반갑소.”

약속된 시간에 맞춰 초대소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태에게 인민군참모장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악수를 청했다.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그는 거침이 없었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한지태 선생은 우리 공화국의 아주 귀한 손님이야. 경애하는 최고 사령관 동지께서 각별히 신경을 쓰라시더구만. 뭐 불편한 건 없었소?”

“예. 모든 게 다 편안합니다.”

식당에 차려진 저녁 식탁에서 세 사람은 빙 둘러앉았다.

소소한 이야기로 기름칠을 한 다음 본격적으로 골동품 수송 작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한국군의 보안과 작전 같은 세밀한 부분은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 지태는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주로 군 참모장의 설명과 제안을 경청하는 수준이었다.

지금 들은 바를 토대로 한국 정부에 가감 없이 전달해 준다면 그에 대한 판단은 청와대와 군 수뇌부에서 할 것이다.

반주로 나온 들쭉술을 군 참모장으로부터 세 잔째 받았을 때였다.

“한 선생! 사업가라는 거 혹시 위장 아니오?”

군 참모장이 농담처럼 물었지만, 그렇다고 그저 웃자고 던진 물음은 아닌 듯했다.

물음을 던진 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니까 내 말은 사업가라는 게 위장 신분이 아니냐 하는 것이야. 한스라고 하는 위장 회사를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 국정원의 요원 같은?”

지태가 어이가 없어 털털하게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장단이라도 맞추며 대꾸라도 해줄 터였다.

“제가 그리 보였습니까?”

“하하, 너무 민감하게 굴지 마시오. 난 그저 분위기가 딱딱하니 웃자고 한 소리야. 하지만 좀 의심케 만드는 측면도 없지는 않지.”

“뭐가 말입니까, 참모장님?”

“음, 뭐랄까, 대범함? 그리고 마치 고도의 훈련을 받은 요원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

“하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가 어려서부터 좀 거칠게 살아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깡다구로 똘똘 뭉쳤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특수부대 출신입니다. 아마도 그리 느끼셨다면 그래서일 겁니다.”

“아! 그래? 하하.”

군 참모장이 의심스러운 부분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려는 듯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말은 비록 빙빙 돌려서 했지만, 그가 지태의 정보를 모를 리 없을 터였다.

남한 내 고첩이든 어떤 라인을 통해서든 작은 것 하나까지 수집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수집된 정보들은 북한 수뇌부에서 서로 공유하고 있을 터.

군 참모장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더니 문득 정색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조선반도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한지태 선생에게도 분명 기회와 보상이 찾아들 거요. 아암, 당연히 그렇게 되갔지. 농담의 연장선상이지만, 한 선생이 진정한 사업가가 맞는다면 말이지.”

지태를 시험했던 게 미안해서였을까.

군 참모장이 이제는 당근을 제시해왔다.

아직 그 당근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한 바가 없어 그 맛을 모르겠지만, 최고 지도자와 군 참모장의 말투에서 풍기는 뉘앙스로 볼 때 그게 무엇이든 결코 작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게 지태의 예감이었다.

* * *

다음 날 오후 지태는 순안공항으로 나왔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배웅을 나온 김영철이 악수를 청했다.

“이제 곧 또 만나갔지만 이런 거이 우정이 아니갔나.”

“이러다 살림 차리자는 말이나 하지 마라.”

지태가 썰렁한 농담으로 그의 우정에 화답했다.

이번에 지태가 타고 갈 고려항공은 베이징행이었다.

단둥으로 가는 비행기는 화요일과 금요일 두 번뿐이라서 일정에 맞는 베이징행으로 정한 거다

베이징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국정원의 김성욱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다.

북에 있는 동안 연락이 끊긴 지태의 소식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전화상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극비를 요하는 것이라서 지태는 인천공항 도착 시간만 알려주고 곧 끊었다.

인천공항에 내려 입국장으로 나오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김성욱이 마치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맞듯 반겼다.

“내가 반가운 거요, 아님 내가 가져온 소식이 반가운 거요?”

지태가 목을 빳빳이 세우며 괜히 거드름을 피워댔다.

“다 반가워, 모두 다! 자, 일단 서울로 이동하면서 우리의 반가움을 풀어보자고!”

김성욱이 지태의 등을 대합실 밖으로 바쁘게 밀었다.

“고방산 초대소에서 이틀을 보냈어요.”

서울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지태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김성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 고방산 초대소?”

“뭘 그리 놀라요?”

지태가 천연덕스럽게 내뱉었지만, 김성욱의 심정을 몰라서 그런 건 아니다.

괜히 한번 목에 힘을 줘보는 거다.

“이게 안 놀랄 일이야? 고방산 초대소가 어디야. 국빈급 인사들만 묵는다는 곳 아닌가!”

“그럼 내가 국빈급 대접을 받고 왔다는 얘기네요?”

“허, 이 친구 정말! 그게 말이야, 방구야.”

“그럼 좀 더 놀라게 만들어드릴까?”

“이보다 더 놀라운 게 또 있어?”

되묻는 김성욱에게 지태는 피식 웃으며 뭔가를 내밀었다.

작은 소형 녹음기였다.

“직접 확인해 보시죠.”

“……?”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던 김성욱이 소형 녹음기를 받아 들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오래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귀에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곧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김성욱이 말문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쳐다보았다.

지태는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마, 만난 거야?”

“들으셨다시피요.”

“이거 경천동지할 일이로구먼.”

김성욱은 주머니 안에서 이어폰을 꺼내 녹음기에 꽂았다.

주위의 소음 없이 좀 더 정확하고 자세히 듣기 위함이었다.

소형 녹음기 안에는 북의 최고 권력자와 군 참모장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저장돼 있었다.

지태의 뛰어난 재치와 위험을 감수한 모험 덕분에 얻어낸 놀라운 수확물이었다.

김성욱은 밴이 강남에 도착할 때까지 귀에서 이어폰을 떼지 않았다.

차가 멈추고도 약 20분 넘게 녹음기 속 대화에 집중하던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면서 이어폰을 떼어냈다.

“완전 대애박!”

김성욱이 존경스럽고도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덥석 끌어안았다.

“자넨 진정한 애국자야. 아니, 충신이야, 충신!”

“아이, 참! 낯간지럽게 왜 이러십니까.”

지태가 계면쩍다는 듯 김성욱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는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됐어, 이제 됐어!”

김성욱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지태를 추켜세우더니 느닷없이 마음이 바빠진 모양이었다.

지태로 하여금 한시바삐 차에서 내리게 했다.

명목상 여행에 지쳐 피곤할 테니 쉬라는 것이었지만, 사실 지태가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위에 보고하고 싶어 안달이 난 까닭이었다.

“북의 의중과 행간까지 깊이 연구하고 검토한 다음에 바로 연락하지. 푹 쉬어, 한 회장!”

인사를 마친 김성욱은 곧 차를 움직이게 하여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지태는 차가 멀어질 때까지 웃는 낯꽃으로 서 있다가 곧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 * *

지태가 캐리어를 끌고 한스 홀딩스 대표실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조현민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들어오던 중 복도에서 마주친 직원들이 그에게 귀국 사실을 전해준 모양이었다.

그러잖아도 어차피 부르려던 참이어서 지태가 반갑게 맞았다.

“잘 다녀온 거야?”

“예, 형님. 대접 잘 받고 왔어요.”

“오홍! 대접까지?”

조현민은 지태가 북한 최고 권력자까지 만나고 왔음은 아직 모른다.

그래서 위아래를 훑어대며 장난기를 보이는 것이었는데 지태가 피식 웃으며 그 사실을 말하자 조현민의 반응도 처음 김성욱이 보였던 반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그게 정말이야?”

“비싼 밥 먹고 헛소리나 내뱉을 사람이에요, 내가?”

“햐, 이거야 원! 완전히 놀랠 노자네, 정말.”

세계적 은둔의 지배자라는 소리를 듣는 북한 최고 권력자를 직접 대면하고 왔다니 하는 말이다.

어지간한 거물 방북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만나볼 수조차 없는 인물이 아니던가.

지태는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조현민을 일단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중요한 것만 몇 가지 간추려 설명해 주었다.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던 조현민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목이 있었다.

바로 북의 최고 지도자가 언급했다는 건설회사 관련 대목이었다.

“왜 그런 걸 물었을까?”

“글쎄요. 속 깊은 말까진 털어놓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죠. 하지만 그리 나쁘게 들리진 않더군요. 뭔가 선물을 주겠다는 뉘앙스로 얘길 했으니 두고 보면 알겠죠, 뭐.”

“그렇긴 한데 그게 뭔지 궁금하기는 하다, 야!”

“회사 업무는 다 순조롭고요?”

“그게 우리들이 한 회장님을 대신해 할 일인뎁쇼. 모든 게 다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습니다요.”

조현민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못 말리겠다는 듯 웃던 지태가 정색하고 말했다.

“당분간은 형님이 주축이 돼서 각 사의 사장단들을 잘 이끌어줘요. 난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신경을 쓰지 못할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참, 간부 및 임원급들 채용은 어떻게 돼 갑니까?”

“임원들한테서 추천받은 인원들을 모아놓은 게 있으니까 검토해 보고 낙점을 해줘.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러세요, 형님.”

“그나저나 조만간 뭔가 터질 분위긴데. 안 그래?”

“김칫국부터 먼저 마시진 말죠.”

지태가 무심한 듯 던지긴 했지만, 속으로는 그 자신도 조현민과 같은 마음이었다.

다만 리더가 먼저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금물이라는 판단 아래 그리 에둘러 말했던 것이다.

지태는 뿌듯함을 속에 꽉 채운 채 조현민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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