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최고 존엄을 만나다(2)
“나는 한 핏줄, 한 형제인 남조선 인민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든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악착같이 핵무기 개발에 몰두를 했습니다. 한 선생도 밤잠 많이 설쳤갔지요?”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 아니 전 세계인들이 불안에 떨고 우려했던 바는 크지요.”
“하하. 그랬갔지요. 하지만 나라고 마음 편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핵 무력이 완성이 되기 전 미제 양키들이 우리 공화국을 침공하면 어떡하나, 그러면 말짱 다 황이 되는 것은 아니갔나, 노심초사했던 부분이 컸어요. 밤잠을 설친 건 한 선생이나 나나 같다는 말이지요.”
지태는 이렇다 하게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잠자코 경청했다.
“…….”
“한 선생도 아시다시피 우린 이미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니까 미제 양키 놈들도 슬금슬금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까. 유엔을 사주해 우리 공화국의 대외 경제활동을 막고 전략 자산들을 조선반도 쪽으로 몰고 와서 협박을 해대지만, 그 이면엔 불안할 겁니다, 그놈들도.”
지태는 이 뚱뚱한 최고 권력자의 사설이 무지 길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처럼 길게 기름칠을 해대는지 궁금했다.
“난 미국을, 아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쟁이나 벌이려는 게 아닙니다. 더는 우리를 악의 축이니 뭐니 몰아붙이면서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려 꾀하지만 않는다면, 그래요, 나는 기꺼이 핵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핵무기가 우리 배고픈 인민들의 배를 채워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건 내 진심이오.”
“……?”
그래서 뭐?
왜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건데?
지태는 속으로 의아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자신이 정치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명함을 내밀 위치도 아닌데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해대는 것일까.
그는 지태의 궁금증을 읽기라도 한 듯 그제야 서서히 해답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내 지금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 공화국이 정상 국가로서의 지위를 얻는 것입니다, 한 선생! 그리고 당당히 세계로 나아가고도 싶수다. 그래서 우리 인민들이 더는 배를 곯지 않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싶은 게 내가 바라는 최고의 소망이오.”
그는 숨이 가쁜 듯 연신 쇳소리 같은 숨소리를 내면서도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이럴 때 가만히 경청만 하는 것도 멋쩍고 결례일 듯싶어 지태가 잠깐 추임새를 넣었다.
그는 대단히 만족한 듯했다.
두꺼운 목을 끄덕이며 미소로 화답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뜬금없는 소리였다.
“우리 공화국이 정상 국가로 나가는 길을 우리 한 선생께서 만들어 주시갔습니까?”
“예?”
“터전을 만들 길라잡이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 지?”
너무 황당한 소리라서 지태는 짐짓 말까지 더듬었다.
“한 선생을 우리 공화국에 보내갔다고 승인을 해줄 정도면 남조선 최고 책임자의 컨펌이 벌써 떨어진 거 아니갔소. 안 그렇습니까?”
사실이 그러할진대 부인할 수는 없다.
지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인정했다.
“그렇다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김영철 동지한테 보고받은 대로 한 선생께서는 아주 시원시원하시구만요. 하하.”
그는 김영철 쪽에 시선을 주며 혼자서 호탕하게 웃어젖히고선 돌연 뚝 그쳤다.
“난 그동안 남조선 새 정부의 대통령을 지켜봐 왔습니다. 작년에 베를린 선언과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말씀, 특히 조선반도 내에서의 그 어떠한 군사행동도 남조선의 동의 없이는 절대 불가하다는 미국 언론사와의 인터뷰도 감동 깊게 지켜봤어요. 그때는 한창 미제 양키 놈들이 선제 타격론을 줄기차게 주창하던 때였는데도 말입니다.”
최고 권력자는 제 말끝에 입술을 가벼이 깨물었다.
지태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 분명해 보였다.
지태가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가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조선의 새 대통령에 대한 내 믿음은 거기에서부터 연유됐습니다. 아, 이분과 함께라면 우리 북과 남이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진솔하게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갔구나.”
“……!”
“남조선 대통령께 내 이런 신뢰감을 대신 전달해달라는 말입니다. 물론 대통령께서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기에 우리 한 선생을 북조선에 보내준 것이 아니갔소?”
잠시 말을 끊은 북의 최고 권력자가 지태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열어 보인 터라 지태도 마주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그가 먼저 미소를 지었고, 지태가 뒤이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북의 최고 권력자는 거의 두 시간을 함께하고서야 돌아갔다.
고방산 초대소 현관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지태는 그제야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듯 크게 날숨을 뱉어냈다.
긴장이 풀리자 지태의 곱지 않은 시선이 곧장 김영철에게로 향했다.
“이래도 되는 거냐? 예고편도 없이 훅 들어오는 건 반칙이야, 인마!”
“그거이 미안하게 됐어야. 나도 워낙 갑자기 통고를 받은 거라서 미리 말할 새도 없었고.”
김영철이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비껴가며 말했다.
지태가 여전히 고깝다는 시선으로 조소를 날렸다.
지금껏 김영철이 보인 행동을 보면 설령 지태에게 알릴 시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말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동안 북한 지도자들의 행적이 미리 노출된 적이 어디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모든 것이 비밀에 붙여지는 북한의 정서라든가 특수한 사정을 고려한다면 북의 최고 권력자의 움직임을 미리 고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지태는 쏘아보던 눈길을 거뒀다.
여하튼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청와대에서 자신을 이곳에 보내 얻어내려던 소기의 목적을 훨씬 뛰어넘었으니까.
아니, 뛰어넘기만 했을까.
이건 상상을 초월한 그야말로 대박이라고 봐야 옳은 상황이었다.
지태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긴 했지만, 속으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김영철이 이번엔 반대로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지태 동무래 완전히 땡 잡은 거이야. 아니디. 이걸 그 정도로 표현해서는 만족할 수가 없갔고. 어케 표현을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려나?”
“지랄! 헛소리 그만하고 잠도 이미 깨버렸는데 술이나 좀 마시자.”
“기럴까? 축배라도 들게 말이디. 흐흐.”
김영철이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놈이 정말 북한의 최고 전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녀석이 맞는가 싶다.
초대소를 관리하는 여성 근로원이 술과 안주를 들여왔다.
깊은 새벽녘이지만 북의 최고 권력자가 다녀간 직후라서 눈빛은 아직까지 초롱초롱해 보였다.
조금 있으려니 김영철의 지시를 받고 달려 나갔던 사내 하나가 고려호텔의 객실에 있던 지태의 짐을 몽땅 챙겨와 내려놓고 나갔다.
호화로운 고방산 초대소 객실에는 이제 둘만 남았다.
술이 두어 순배쯤 돌았을 때 김영철이 말했다.
“아까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하신 말씀이나 우리 함께 복기해 보자우.”
그러잖아도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
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김영철과의 술자리는 새벽 다섯 시까지 계속되었다.
취기보다는 밀려드는 졸음에 지태가 연신 하품을 해대자 김영철은 그만 쉬라면서 방을 나갔다.
지태는 김영철이 옆방으로 건너가자마자 피곤에 못 이겨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문득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작게, 그러다가 점점 크게 변해갔다.
아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낙숫물 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몽롱함이 어느 정도 가셔지자 이제는 똑똑히 들렸다.
그것은 문을 두드리고 있는 소리였다.
“아직 자고 있는 거이네? 해가 중천에 떴어야! 날래 일어나라!”
노크의 주인공은 김영철이었다.
긴 기지개를 켜며 옆에 놓아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침 10시였다.
다섯 시간도 채 못 잔 것 같다.
그러나 일단 잠에서 깨어나자 몸이 별로 무겁게 느껴지질 않는다.
최봉준의 빙의 이후 생겨난 특별한 능력이다.
지태는 눈곱부터 떼고 문을 열어주었다.
“왜 또? 경애하는 그분께서 또 찾아오신 거냐?”
그러자 돌연 눈매가 매섭게 변해가는 김영철이다.
“우리의 친애하는 최고 존엄을 그런 식으로 놀리디 말라!”
“놀리는 게 아니라 벌써 깨우니까 하는 소리지. 다섯 시간도 못 잤잖아.”
“두어 시간만 자도 팔팔할 나이에 그 무슨 엄살까지 떨고 염병이네?”
쩝.
지태가 입맛을 다신 후 물었다.
“그나저나 왜?”
“대충 옷 갖추고 나와 보라.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대동강변의 풍광은 아주 예술이디. 산책이나 하자우.”
지태는 옷도 벗지 않고 잠든 터여서 특별히 걸쳐 입을 필요도 없었다.
다시금 눈곱만 정리한 후 곧장 김영철의 뒤를 따랐다.
아닌 게 아니라 풍광 하나는 예술이다.
고방산 절벽 아래로 대동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저 너머에는 대동강 5대 갑문 중 하나인 미림갑문이 보였다.
갑문의 형성으로 생겨난 인공 호수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많이 생각해 보았네?”
“생각은 무슨! 자네가 돌아가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는데.”
“큭!”
괜한 것을 물었다는 듯 김영철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 경애하는 최고 사령관 동지께서 비록 젊으신 나이지만, 그래도 생각은 깊으시디. 노인네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혁명적인 사상을 갖고 계신 분이시고. 동무래 그런 생각 안 들었네?”
“그거야 뭐…….”
지태는 말꼬리를 흐렸다.
대놓고 맞장구를 친다는 게 왠지 머쓱해 말꼬리를 흐린 거다.
하지만 두어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선입견이 많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김영철의 주장을 딱히 인정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참 근데……. 그분 말씀 중에 말이다.”
“어떤?”
“나한테 건설 회사를 설립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던 거!”
“아, 그거! 고거이 왜?”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냈나 싶어서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뜬금없이 꺼낸 거 같진 않거든.”
“흐흐.”
김영철이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순간 지태는 그가 뭔가를 알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뭔데?”
“일이 차차 잘 진행되다 보면 나중에 알갔디. 혹시 아네? 지태 동무한테 좋은 선물이 주어질지.”
계속 알쏭달쏭한 대답뿐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캐물어봤자 시원스레 대답해줄 것도 아닐 듯했다.
그러니 괜한 일에 힘을 빼긴 싫었다.
지태가 다시 시선을 돌려 인공 호수 쪽을 쳐다보았다.
“내일 서울로 넘어가야겠다.”
“그렇게 빨리?”
“북한에서 최고 사령관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어?”
“기거이 무슨 소리네?”
“생각해봐. 북한 최고 지도자의 의중을 들었으니 굳이 여기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졌잖아. 빨리 돌아가서 우리 정부에 소식을 전해주는 게 더 낫지 않겠어?”
“길티. 동무 말이 백번 맞구만, 기래.”
“돌아가는 대로 골동품의 수송에 대해서도 상의를 다시 해볼게. 자네가 말한 그거 준비하려면 절차가 아주 복잡해. 미군 측의 눈도 속여야 하고.”
그러자 김영철이 쓰게 웃었다.
지태가 흘깃 돌아보자 그가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내 나라에서 다른 나라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참으로 우스워서 말이디.”
“이제 와 누굴 원망하겠냐.”
“그럼 이제부터라도 바꿔야겠디. 빨리 우리 민족이 하나로 합쳐 더는 그들에게 휘둘리는 일이 없는 강한 조선을 만들어야디 않갔나. 그 길에 우리 두 사람이 등불이 되어 보자우. 통일 조국으로 가는 길목을 비추는 등불!”
김영철이 굳은 결의를 보이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자 지태가 그윽한 미소로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한번 쳐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