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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12화 (212/272)

212화. 북으로 가는 지태(4)

김영철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바짝 긴장하는 눈빛으로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예. 옛? 지, 지금 말입네까? 알갔습니다.”

김영철이 절도 있게 대답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지태가 누군데 그리 군기가 바싹 들었느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김영철이 대답을 주었다.

“김호상 상장 동지야. 곧 도착하신다고 하시누만.”

김호상은 평양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호위사령부의 부사령관 겸 김영철의 아버지였다.

지태는 편안한 저녁 식사는 애초에 글렀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 고위급 인사와 접촉할 기회가 빠르게 다가와 반갑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10여 분쯤 긴장하며 대기하고 있을 때 식당 출입구 쪽에 조금은 요란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북한 최고 지도자의 경호 및 평양의 방어를 책임지는 호위사령부의 부사령관의 행차다.

당연히 그에 걸맞은 소음이라 할 수 있었다.

김호상 상장이 군 장성다운 걸음걸이로 당당하게 다가왔다.

거수경례로 맞이하는 김영철에게는 살짝 미소만 띠우더니 지태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반갑습네다, 한지태 선생. 내래 김호상이야요.”

그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지탭니다.”

“한 선생이래 우리 공화국의 경제 사업을 위해 오셨으니 내래 더 감사를 드려야갔디. 자, 일단 앉으십시다.”

지태와 김영철은 김호상 상장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물건은 보고 오셨갔디요?”

“예. 골동품엔 전혀 문외한이지만 제 눈에도 전부 진품 같았습니다.”

“길티, 길티! 아무렴은 우리 공화국이 남조선 사업가께 거짓부렁을 했갔소. 전문가의 검증을 마친 물건들이니 확실할 겝니다.”

김호상 상장은 만족스럽게 웃었지만, 지태는 어려운 자리인 만큼 따라 웃을 수는 없었다.

“아시갔지만, 이놈이 내 아들이오.”

그가 웃음을 뚝 그치더니 김영철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알고 있습니다.”

“내래 이놈하고 기타 여러 첩보를 통해서리 한 선생에 대해선 익히 들었시오. 자수성가를 했더구만. 남조선에선 낮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두고 흙수저라고 한다지?”

“예, 맞습네다, 아버지.”

김호상 상장이 지태에게 물었으나 정작 대답은 김영철에게서 나왔다.

“남조선의 무지막지한 매판 자본가들 틈바구니에서 이만한 성장을 해냈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오. 아주 대단한 한 선생이라고 해야겠디. 기런 점에선 나랑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구만, 기래. 나도 기실 따지고 보면 남조선에서 말하는 아주 보잘것없는 흙수저였디.”

지태는 그 와중에도 음식 주문은 언제 하려고 오자마자 이리 썰을 풀어 대나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만 그러하지 실상 배고픈 줄은 잊어버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의 시선에 지태의 그러한 눈빛이 읽혔음인가.

김호상 상장이 문득 말을 끊고는 김영철을 돌아보았다.

“내래 오자마자 바빴고만, 기래. 우리 한 선생께서 배래 많이 고프시갔다야. 주문부터 넣으라.”

“예.”

김영철이 손짓으로 종업원을 부르려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문을 하러 갔다.

그사이에 김호상 상장은 잠시 끊어졌던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방으로 시찰을 나오신 친애하는 김정일 대원수님의 눈에 띄게 된 것은 내 생애에 있어 최고의 영광이자 행운이었디.”

김호상 상장의 이야기는 결국 김정일과의 만남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이 뒤바뀌게 된 시절로 이어졌고, 그 후속편들은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오는 요리마다 진귀하고 훌륭한 것들이었지만, 워낙 부담스러운 자리여서 그런지 지태는 맛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귀로 들어가는지 코로 먹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가운데 몇 수저를 떴을 때였다.

김호상 상장이 문득 수저질을 멈추며 은근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한 선생!”

“예, 사령관님.”

지태는 호칭을 한 단계 높여 부사령관 대신 사령관이라고 불러주었다.

듣기에 좋았던지, 아니면 그게 본질이 아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김호상 상장은 그것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북남 간의 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마당에 한 선생이 우리 공화국에 온 것을 보면 남조선 당국에서도 뭔가 우리 북조선에 바라는 게 있갔디요?”

이제야 지태를 일부러 찾아온 이유를 밝히려는 거다.

지태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참이라서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맞습니다. 그런 차원으로 보시면 됩니다.”

지태는 순순히 실토했다.

남측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는 거다.

“그거이 이런 거 아니갔소? 북남 간에 꽉 잠긴 빗장을 풀어 보자는 거.”

김호상 상장은 포인트를 제대로 짚고 있었다.

기회를 봐서 자신이 어렵게 꺼낼 주제를 김호상 상장이 먼저 꺼내준 것이니 지태로서는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예. 맞습니다, 사령관님. 이번에 들어선 우리 대한민국의 새 정부에서는 그걸 지향하고 있습니다. 남북 간 평화 공존을 통한 상생 말입니다.”

“좋디, 아주 좋은 말이디, 상생과 평화!”

김호상 상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표정을 보면 이런 기회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유엔의 제재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미국의 주도하에 북한의 대외 수출 길은 그야말로 원천봉쇄가 된 형국이 아니던가.

대외적으로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도 바쁜 게 북한의 현실이었다.

인민들의 불만을 겨우 틀어막고 있는데 자칫 그것이 폭발해 전국적인 소요로 이어진다면 일순간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남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형국이니 반가울 수밖에.

북한 고위 당국자들은 이참에 남한과 손을 잡고 평화의 길을 나서려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것을 통해 활로를 열어가려는 거다.

“기카믄 우리가 당장 무얼 내놓으면 좋갔소?”

“그야 일단은 대화가 아니겠습니까. 진솔하게 가슴을 열고 상대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진정한 자세 같은 거 말입니다.”

“음!”

지태의 의견에 김호상 상장이 침음을 흘렸다.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리 없이 입만 벌려 웃었다.

“우리 한 선생이래 아주 작심을 하고 오셨드랬구만.”

“이게 우리 당국에서 저를 이곳에 보내준 이유이고, 우리 정부가 제 입을 통해 북한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기래, 아무래도 기렇겠지. 우리도 그리 정나미가 없는 사람들은 아니야. 남조선이 보여준 성의에 상응하는 선물을 주는 게 마땅하갔디. 아암!”

김호상 상장이 마지막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이후로 남북한의 현안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반주로 내어 온 들쭉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주로 가벼운 사담을 나눈 것이 전부였다.

* * *

약 2시간 동안 함께 했던 김호상 상장이 마침내 돌아갔다.

둘만 남게 되자 김영철은 지태에게 자리를 옮겨 한잔 더하자고 했다.

표정을 보니 목적 없이 술자리를 제안한 것은 아닌 듯했다.

지태는 흔쾌히 수락했다.

김영철이 호텔 밖으로 지태를 이끌었다.

고려호텔이 위치한 창광거리는 식당가였다.

길가에 음식점뿐만 아니라 술집들도 즐비했다.

김영철은 그중 가장 세련돼 보이는 맥주 전문점으로 지태를 데리고 들어갔다.

둘은 곧 북한의 유명 맥주 브랜드인 대동강맥주와 마른안주를 놓고 술잔을 두어 잔쯤 주고받았다.

세 번째 잔을 서로 채웠을 때 김영철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자네를 이제 친구로 생각하니까 내래 솔직하게 말하디.”

“……?”

“골동품을 팔아달라고 자네한테 제안한 거는 사실 핑계야.”

“무슨 말이야, 그게?”

“벌써 눈치를 챘는지 모르갔지만, 끊어진 북남 간의 관계를 복원하자는 차원이라고 봐야 하디.”

“……!”

“말이야 바른말이디 우리 공화국 사정이 아무리 나쁘다지만 나라의 보물까지 팔아먹을 정도까진 아니야.”

“어쩐지 그런 것 같긴 하더라.”

지태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맥주로 잠깐 목을 축였다.

그리고 바로 물었다.

“그런데 이런 걸 털어놓는 이유는?”

“이유래 별거 있간. 우리 서로가 좀 더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 보자는 거이지.”

김영철은 그윽한 시선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 지태는 짐짓 인상을 썼다.

“야! 그런 눈빛 쏘지 좀 마라. 누가 보면 우리 둘이서 사귀는 줄 알겠다.”

지태는 머쓱한 탓에 농담으로 치부했지만, 김영철의 눈빛에선 호감을 표하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또한 서로의 마음을 열자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경우의 수를 따지는 등의 계산적이거나 꼼수를 부리지 않겠다는 말로도 들렸다.

김영철의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자네의 생각은 어때? 윗사람들하고 똑같은 생각이야?”

“물론이디. 나도 북남 간에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행위는 바라지 않아. 같은 민족끼리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물고 뜯는 거 내래 원티 않아.”

“그럼 응원을 한다는 말이지?”

“어디 응원뿐이갔나. 내래 그 일의 선봉에 서고 싶은 욕심이 있어야. 이거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네. 동무는 안 그러네?”

“그거야 뭐…….”

남북 간 화해의 물꼬를 트는 일에 선구자가 되는 일이다.

개인의 영광을 넘어 김영철의 말마따나 가슴 벅찬 일이 될 것이다.

“그 선봉에 자네가 설 수 있게 하자면 내가 골동품부터 잘 처리해야 되겠지?”

“거거야 당연하, 뭐래니, 이 동무! 잘 나가다가 샛길로 빠질 기야?”

“현실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자는데, 뭐가 어때서?”

“기래. 기렇담 현실적으로 물어보디. 몽땅 다해서 얼마나 받아줄 거이간?”

“그거야 나도 모르지. 요즘 거래되는 골동품들의 시세도 모를뿐더러 내가 결정할 사항도 아니니까.”

“2천만 불만 받아내라. 그것 외에 요령껏 더 받아먹을 수 있거든 나머지 차액이래 동무가 먹든지 하고.”

김영철은 북한 골동품 전문가들의 감정을 받아본 결과 최하 3천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했었다.

골동품을 보는 눈이 남과 북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을 것이니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1천만 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110억이 넘는 차액은 자신의 몫으로 가져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지태가 수상쩍은 시선으로 김영철을 쳐다보았다.

이런 말을 하는 이면에 뭔가 다른 의도가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조건 하나를 덧붙여왔다.

“긴데 말이디, 대신…….”

“대신, 뭐?”

“현물 말고 현금으로 달라.”

“뭐?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잖아.”

“약속하갔어. 그 돈은 절대 핵실험을 하거나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쓰지 않갔다고 말이디.”

헐!

김영철 따위가 약속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겠는가.

설령 북한 최고 권력자가 약속을 한다고 해도 선뜻 믿어주기가 어려운 판국에.

“나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냐. 우리 당국에서 이번 거래를 묵인해 준 데에는 현금이 아닌 현물로 북한 주민들을 구휼하는 데 보탬이 될까 해서 그런 거야. 그런데 현금으로 달라고? 그랬다간 우리나라 보수 세력들이 몽땅 다 들고일어날 거다. 정권이 위태로워져, 알아?”

“알디. 잘 아는데 우리 공화국 사정이 어려워서 기래. 먹고사는 건 쌀 지원이 없어도 아쉬운 대로 자급자족이 돼. 하지만 인민들이 살아가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다는 아니잖네. 모든 물자가 다 부족해. 기걸 메꾸갔다는 거이야. 무기 개발에 쓰겠다는 거이 아니고.”

김영철은 적극적으로 열변을 토했다.

열변이라기보다는 필사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햐, 씨! 사람 또 골치 아프게 만드네.”

지태는 머리 아픈 문제를 떠맡았다는 듯 관자놀이 부근을 검지로 누르며 빙빙 돌려댔다.

“암튼 장담하진 못해. 몇 번을 말했지만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냐.”

“여하튼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 달라. 가슴을 열고 내래 배때기에 든 내장까지 다 내보였으니 말이디.”

지태가 찡그렸다.

그 표정으로 김영철을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속이 타는 듯 맥주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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