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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11화 (211/272)

211화. 북으로 가는 지태(3)

지태는 김영철과 나란히 고급 세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순안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나가는 동안 김영철은 그 어떤 말도 붙여오지 않았다.

다분히 운전기사를 의식한 행동으로 보였다.

서평양 순안공항에서 평양 시내까지는 약 22km 정도.

20분 정도를 침묵 아닌 침묵을 강요당한 채 오다 보니 승용차가 마침내 멈춰 섰다.

지태는 밖을 내다보았다.

쌍둥이 탑 형식으로 된 특이한 건물, 뉴스에서 간간이 보았던 바로 그 호텔이었다.

고려호텔.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호텔 로비로 발을 내딛자 단정한 투피스 차림의 여성 두 명이 간드러지는 평양 특유의 발성으로 맞았다.

지태가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다음 캐리어를 끌고 김영철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김영철이 픽 웃었다.

“와 그리 넋이 빠져있네? 우리 공화국 여성 동무들의 미모에 푹 빠져버린 거이네?”

“빠지긴. 미모로 따지면 남쪽 여자들이 훨씬 낫지.”

“갸들이래 칼 대서 고친 거 아니네. 여긴 순수한 본바탕이다, 이 말이디.”

하긴 성형 공화국이라는 오명이 붙을 만큼 성형괴물들이 많은 나라이니 할 말은 없다.

지태가 화제를 돌릴만한 핑곗거리를 찾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김영철을 훑었다.

“와 기러네?”

“평양 사람들의 말투를 보면 억양만 다르지 사투리를 거의 안 쓰던데, 넌 왜 그러냐?”

“내래 촌놈 출신이거든. 울 아버지, 아니 그 이전부터 쭉 함경도에 터를 잡고 살았디. 기래서 내래 고등중학교 시절엔 피양 애들한테서 놀림을 참 많이 받았댔어.”

“출세했네, 촌놈!”

“암, 출세했디. 그것도 엄청 많이!”

짧은 농담 덕분에 긴장감은 좀 풀렸다.

심호흡으로 다시금 정신을 단단히 무장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43층에 도착했다.

북에서 지태를 얼마나 귀빈 대접해 주려는 것인가는 숙소에서 또 한 번 확인 가능했다.

객실은 이곳에서 흔히 말하는 1등실, 즉 스위트룸이었다.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둔 지태가 거실의 응접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김영철이 그 옆자리를 꿰차고 앉는 것을 보며 지태가 물었다.

“오늘 일정은?”

“골동품 땜에 온 것이니 잠시 숨 좀 돌린 다음 그것부터 보러 가자우.”

“그다음엔?”

“저녁을 먹어야갔디.”

“그리고 그다음엔?”

“뭘 그리 급하네? 하나씩 차근차근 가자.”

김영철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못마땅한 듯 흘겼다.

자신의 장난이 과했다는 식으로 지태가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가 내렸다.

지태는 객실 안을 휘둘러보았다.

스위트룸답게 욕실이 딸린 객실 하나에 널따란 거실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한국의 웬만한 특급 호텔과 비교해도 절대 빠지지 않을 만큼 객실 내 시설과 수준이 높았다.

* * *

지태와 김영철은 객실에서 내려와 아직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랐다.

그저 운전이나 담당하는 기사는 아닌 듯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운전사는 무뚝뚝함이 마치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는 듯 내내 입을 다물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승용차는 고려호텔이 있는 창광거리를 나와 보통강변으로 방향을 틀었다.

보통강 다리를 건너 다시 서쪽과 북쪽을 오가며 방향을 바꾸더니 이내 도심을 빠져나와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약 30분간을 달렸을 때 예의 무뚝뚝함을 유지하던 운전기사가 문득 차를 세웠다.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대기하라.”

김영철 역시 기사에게 딱딱하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따라 지태가 내렸다.

대동강의 제1 지류인 보통강의 상류 쪽인 것 같았다.

강 건너 쪽은 제법 넓은 평야 지대가 펼쳐졌는데, 반면 이쪽은 야트막한 산자락이 강변을 굽어보고 있는 형태였다.

김영철이 지태의 팔뚝을 건드리며 길을 이끌었다.

아스콘 포장이 되어 있는 도로를 따라 얼마쯤 걸어가자 별장처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엔 철망으로 된 펜스가 담장처럼 빙 둘러쳐져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무장 군인이 경계를 서고 있다는 점이었다.

언뜻 보면 별장이라기보다는 높은 수준의 보안을 요하는 군사시설 같았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들이 김영철을 보자 절도 있게 경례를 붙여 왔다.

김영철이 건성으로 경례를 받아줄 때 사복 차림의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 역시도 김영철을 보자 숨 가쁜 와중에도 경례를 붙여 왔다.

이곳의 경비 책임자인 듯했다.

“뭐 하다가 왔길래 숨이 넘어가는 거이네?”

김영철이 위아래를 훑으며 매섭게 묻자 책임자는 꼿꼿이 선 채 대답했다.

“배탈이 나서 위생실에 다녀왔습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중 수상한 인기척에 서둘러 달려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뭘 먹었길래……. 암튼 수고하라.”

김영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태를 안으로 이끌었다.

책임자가 급히 뒤따라오려고 하자 김영철이 뒤돌며 말렸다.

“개의치 말고 동무는 가서 일 보라.”

“옛!”

책임자는 스톱모션으로 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그대로 뒤돌아섰다.

김영철은 별장처럼 보이는 건물의 현관문 앞으로 다가서자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원래 뭐 하는 건물인데 이리 잘 꾸며놓은 거지?”

김영철이 현관문을 여는 사이에 지태가 물었다.

“군 간부들의 휴양소! 긴데 여긴 아무나 오는 덴 아니고 대가리에 별 박고 있는 장성들이나 올 수 있는 곳이디. 그것도 힘깨나 쓰는 동지래 올 수 있고. 아, 물론 지금은 임시 폐쇄한 상태이디.”

골동품을 이곳에 보관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러했을 거다.

지태가 픽 웃고는 김영철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북한의 경제가 어렵네, 주민들이 굶어서 몇 만 명이 죽어 나갔네 하더니 말짱 다 거짓 같았다.

적어도 이곳의 풍경만 보면 그러했다.

화려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내부에는 외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집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태는 속으로 비웃었지만, 김영철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아 굳이 입 밖으로는 피력하지 않았다.

김영철이 거실을 가로질러 가더니 2층으로 올라가는 목조 계단 옆에 멈춰 섰다.

계단 아래쪽으로 다시 또 견고한 철문이 보였다.

거기엔 한눈에도 단단한 자물쇠가 여러 개 채워져 있었다.

만일 열쇠가 없다면 아예 폭파하거나 꽤 많은 공력을 기울여야 겨우 문이 열릴 것 같았다.

김영철은 손에 들고 있던 열쇠 꾸러미에서 각각의 자물쇠에 맞는 열쇠를 찾아 열기 시작했다.

이윽고 자물쇠를 따는 일이 끝나고 철문을 열자 안으로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딸깍.

김영철이 벽면에 부착된 스위치를 눌러 조명을 켜고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지하실에 다다르자 또 하나의 문이 나왔지만 조금 전처럼 자물쇠는 채워지지 않았다.

김영철이 지하실의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헐!”

순간 뒤따르던 지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골동품의 양이 상당하다는 말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죄다 쓸어와 이곳에 갖다 놓은 듯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거 전부 다 진품이야?”

“기걸 말이라고 하네? 모조품 따위나 지키갔다고 무장 군인들을 데려다 놓은 줄 아네?”

하긴 너무도 지당한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이 없어진 지태였다.

자기(瓷器)류는 자기류대로, 족자나 고서화 등은 또 그것들대로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

지태는 그것들을 천천히 살펴 나갔다.

골동품에 일가견이 있다거나 전문 감정사는 아니라서 이들 하나하나의 가치를 따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골동품에 무지한 자신의 시선에도 그것들의 대단함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태는 조용히 최봉준을 소환했다.

이것들의 진면목을 따져보기 위함이었다.

소환에 응했다는 듯 머릿속에 작은 전기 자극이 느껴졌다.

지태가 속으로 최봉준을 불렀다.

‘어르신?’

- 이미 불러 놓고 새삼스럽기는!

지태가 흘깃 김영철을 돌아보았다.

전음입밀, 혹은 더 나아가 어기전성(御氣傳聲)이나 혜광심어(慧光心語)로 설명 가능한 두 사람의 은밀한 텔레파시를 김영철은 당연히 눈치 채지 못했다.

지태가 최봉준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르신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 나라고 골동품에 대해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조예가 깊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짜는 아니라는 거야. 척 보면 알 수 있네.

최봉준이 그렇다면 맞는 말일 것이다.

지태가 당장의 궁금증을 해소하였다는 듯 속으로 웃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 이런 사소한 일로 휴식 중인 나를 부르지 말게나. 한 번씩 발걸음을 할 때마다 내 수명이 10년씩은 깎여 나가는 기분이야.

‘돌아가신 분도 수명이 깎입니까?’

-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최봉준은 그것을 끝으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때 김영철이 물었다.

“어떠네? 지태 동무 눈에는 이거이 가짜로 보이네?”

“아니. 초짜인 내 눈에도 진품 같기는 해.”

“기럼 얼마나 받갔나? 이거 전부 다 해서.”

“글쎄. 난 가치를 모른다니까. 남쪽으로 가져가서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우리 공화국에도 전문가들은 있어야! 최하 못 받아도 3천만 불은 넉넉히 받을 거라고 했디.”

3천만 달러면 현재의 환율로 치면 320억 원을 상회하는 금액이다.

지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이것들이 전부 진품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 정도의 가치를 지녔겠나 하는 의문.

그러나 골동품에 대해선 문외한이니 무턱대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김영철이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 부정적인 태도의 지태에게 한 마디 던졌다.

“이것 보라. 이거이 추사의 서찰이디. 가포 임상옥에게 보냈던 편지! 동무래 임상옥이라고 들어는 봤네?”

가포 임상옥과 추사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야말로 상식이 아닌가.

지태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흘겼다.

김영철이 딴청을 피우며 족자 형태로 만들어 놓은 추사의 서필로 눈길을 돌렸다.

“이거이 가포 임상옥이 귀성 부사로 임명된 것을 축하하며 보낸 서찰이디. 귀성 부사(龜城府使)는 가포의 말년에 수재민들을 구휼했다는 공로로 임금이 내린 벼슬이고.”

엄청 잘난 체를 해댄다.

지태가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와?”

“영철 동무래 아는 거이 많아서 처먹는 것도 많디? 그래서 똥도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굵겠다야.”

“하, 리거야!”

김영철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 *

보통강변에 위치한 군 휴양소를 돌아보고 다시 평양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영철이 농담을 섞어 저녁 식사를 언급했다.

“거 아는 체를 너무 많이 했더니 내래 배때기가 확 꺼져버렸어야. 날래 가서 한술 뜨자우.”

마침 출출하던 참이었다.

지태 역시 농담으로 응수했다.

“알긴 아네. 날래 가서리 한술 때리자우.”

두 사람이 웃고 즐기는 사이 운전기사는 고려호텔에 그들을 내려 주었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김영철이 맨 꼭대기 층의 숫자 버튼을 눌렀다.

고려호텔의 스카이라운지 격인 44층과 45층엔 회전식 전망대 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전망대는 1시간에 한 번 회전하는데 평양 시가지를 관망하면서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장치를 해놓은 거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북한식 표현을 빌리자면 김영철의 손전화가 문득 요란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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