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물밑 접촉(2)
빤히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김영철이 어색한 웃음을 그린 채 물었다.
“사람을 와 그리 쳐다보네? 술 안 마실 거이네?”
“조금 있다가.”
지태가 생각 깊은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기러던지…….”
김영철은 잠시 그의 표정을 살피는가 싶더니 곧 캔맥주를 입에 대고 두어 모금을 벌컥 마셨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근데 동무래 와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었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뭔 생각을? 인차 다 해결되었디 않아?”
뻔뻔하게 대답을 내놓는 김영철을 지태가 눈동자만 살짝 들어 올린 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왠지 미덥잖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해결은 무슨!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그건 그렇고 기왕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묻자.”
“물어보라.”
“혹시 너희들 잘하는 그것 있잖아. 그렇게 먹튀하지는 않겠지?”
“먹튀? 기거이 무슨 말이네? 무슨 튀김 종류네?”
“튀김은 니미. 우리가 던져준 미끼만 날름 주워 먹고 혹시 나중에 오리발 내밀거냐고 묻는 거다!”
“……!”
순간 김영철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성질을 건드려놓고도 지태는 약간 뻔뻔한 모습으로 되물었다.
“왜?”
“동무래 내 심기를 자꾸 건들 거이네?”
“그니까 내 말은 혹시 라고 했잖아. 혹시 라는 말 몰라?”
지태가 변명하듯 내뱉고는 쓴맛을 다셨다.
잠시 노려보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김영철 역시도 이내 쓴맛을 다셨다.
“기럴 일 절대 없을 것이니까네 걱정하디 말라. 우릴 어드렇게 보고서리, 쯔쯧.”
김영철은 여전히 심사가 배배 꼬인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일부러 시비를 걸고자 던진 말은 아니다.
하지만 김영철이 저리 정색하는 바람에 지태는 머쓱했다.
지태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그러면서도 기왕 이야기를 꺼내들었으니 그 끝은 꼭 보겠다는 듯 기어이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그럼 정식으로 거래를 하기 전에 어떤 문서 같은 걸로 약속을 해줘라. 그럼 의심 없이 깔끔할 거 아니냐.”
“사람 자체를 믿지 못하갔다면 문서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갔나. 지태 동무의 말마따나 우리가 오리발이라도 내밀면 기거이 전부 다 무용지물이 되는 거 아니갔네!”
“험!”
딴엔 옳은 소리여서 지태는 가래 끓는 듯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믿어보라. 우리 공화국의 윗선을 믿지 못하갔다면 나를 한 번만 믿어보라. 나 역시도 못 믿갔나?”
김영철이 지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 눈빛을 보고 진실 여부를 판단하라는 것 같았다.
지태가 이제는 장난기를 쏙 뺀 채 그윽한 미소로써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눈빛을 보니까 나를 상대로 사기 칠 것 같진 않아 보이네.”
“헛, 이거 참! 그야말로 엎드려 절을 받는구나, 야.”
김영철이 결국은 털털하게 웃었다.
“근데 자네가 말한 골동품의 수량이라든가,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그걸 팔게 된다면 지급은 어떻게 해줄까? 그전에 그 귀한 것들을 아무 의심 없이 나를 믿고 다 맡길 수 있겠어?”
“첫 번째 질문부터 헷갈리는데 기게 무슨 말이네? 지급을 어떻게 해주다니?”
“그럼 골동품 판 걸 몽땅 다 현금으로 달라는 거야?”
“기걸 말이라고 하네?”
“헛!”
지극히 당연하다는 눈빛을 보내오는 김영철을 보면서 지태는 절로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풀풀 내뱉었다.
이내 정색하고 말했다.
“그랬다가 그 돈이 만약 핵실험이나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 비용으로 쓰이면 어쩌게? 예전 진보 정권 당시에 남북 화해 명목으로 너희들한테 지원해준 거 있지? 그때 그 돈이 그런 용도로 쓰였다고 보수 진영에서 얼마나 떠들어댔었는데. 한 번 데어본 경험이 있어서 아마 그건 좀 힘들 거 같다. 모르긴 해도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을 공산이 커!”
“이런! 이제 와서 말을 바꾸자는 거이야?”
“말을 바꾸자는 게 아니고,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얘기야. 아무리 남북 간 관계 복원에 공을 들인다 해도 반대 진영의 목소리까지 깡그리 무시할 순 없거든. 우리 대한민국이 워낙 민주적인 국가라서.”
“허, 이런!”
김영철이 예기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는 듯 연신 혀를 차 댔다.
“현금이 아니라면 뭘 어쩌갔다고?”
“현물로 지급해야겠지. 그것도 유엔 제재로 합법적인 교역은 불가하니까 민간 구제 차원이라는 명목으로.”
“우리가 뭐 거지새끼니? 이 간나쌔끼래 가만 두고 보쟀더니!”
김영철이 급기야 티 테이블을 주먹으로 꽝 내리쳤다.
그 바람에 캔맥주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며 하얀 거품을 쏟아냈다.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란 얘기야!”
김영철의 거친 대꾸와 소란을 보면서도 지태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자 김영철은 아직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반발은 없었다.
“이번 건을 제안할 때 자네가 그랬지? 유엔 제재로 북한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예전에 고난의 행군 때처럼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날 거라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번 일을 기획하게 된 거라고 말이지.”
“……!”
“그럼 된 거잖아. 현물로 지급되는 쌀과 기타 곡식들로 당장 급한 불이나마 끌 수는 있는 거잖아. 당장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보다 그게 더 현실적인 거 같은데 내 생각엔! 그게 본래의 목적이기도 하고. 안 그래?”
차근차근 설득해 가는 지태의 말에 김영철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위에 대고 지태는 쐐기를 박았다.
“물론 너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는 거 잘 알아. 윗선에 보고하고 컨펌을 받아봐. 골동품을 팔아 다른 목적에 쓸 의도가 아니라면 아마 내 말대로 따라줄 거다.”
“음…….”
아직 상처 난 자존심이 회복되지 않은 듯 김영철은 묵은 신음 소리를 냈지만, 어느 정도는 지태의 말에 수긍하는 눈빛이었다.
거기에 대고 지태가 이 대화의 마침표를 박았다.
“골동품을 빼내 올 문제는 그 후의 일이니까 나중에 다시 상의하자고.”
쩝.
김영철이 마침내 입맛을 다셨다.
그게 지태의 귀에는 알겠다는 수락의 뜻으로 들렸다.
“오늘은 합의를 이룬 기념으로 한잔하지. 자, 건배할까?”
지태가 비로소 미처 따지 않은 자기 몫의 캔맥주 뚜껑을 따고는 김영철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기래, 까짓 꺼! 건배나 하자우.”
김영철이 계면쩍게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캔맥주를 앞으로 쏙 내밀었다.
* * *
다음 날 오후 비행기로 지태는 귀국했다.
선양을 떠나오기 전 김영철과 한 차례 더 만났다.
김영철은 전날 밤 지태가 묵던 호텔 객실을 나와 곧바로 선양시에 있는 북한의 국가 보위성 안가로 돌아갔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북한 고위 당국자와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지태의 제안대로 골동품에 대한 대금 지급을 현금이 아닌 현물로 받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
“어서 오시게, 한 회장.”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김성욱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여느 때와는 사뭇 달랐다.
낯간지러울 정도로 아주 살갑게 굴었다.
적응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지태가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따라 왜 이래요, 얼굴 뜨겁게!”
“이제는 나라를 위해 애쓰시는 귀한 몸이 아니던가. 나라에서 그만한 대접을 해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아, 눼에, 네! 그 마음이 오래토록 변하지만 마시죠.”
“하하, 알겠네. 일단 타지. 내가 지금 궁금한 게 엄청 많아. 아니, 나보단 윗선에서 말이지.”
김성욱은 호탕하게 웃는 얼굴로 한쪽에 세워놓은 밴을 가리켰다.
짙은 선팅도 모자라 창문마다 커튼까지 쳐놓아서 밖에선 내부를 전혀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차였다.
요원 하나가 밴의 문을 열어주며 한쪽으로 비켜서자 지태가 먼저 차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서울로 이동하는 내내 지태는 김영철과 합의 보았던 내용을 빠짐없이 전달했다.
“음.”
“아, 그렇군!”
김성욱은 그렇듯 간간이 추임새를 넣기도 했지만, 설명을 듣는 내내 대체로 묵묵히 듣는 위주였다.
지태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그는 비로소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말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협상하는 게 아주 시원시원하구먼, 그래. 우리가 껄끄럽게 여겼던 부분을 아주 확실하게 잘 긁어줬어. 잘했네!”
김성욱은 대단히 흡족한 표정으로 지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대목은 다름 아닌 골동품의 판매대금에 대한 지급 방법이었다.
김성욱과 윗선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많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던 거다.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조건으로 북측의 요구를 먼저 들어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다만 유엔의 제재 하에 놓여있는 북한 쪽에 현금을 전달해야 한다는 게 내내 걸렸던 것이다.
“근데 문제는 판로입니다, 부국장님. 김영철은 내게 믿고 맡긴다고 했는데 내가 그런 쪽으로는 영 문외한인데다 연결해줄만한 사람도 없고…….”
“그 점에 대해선 아무 염려하지 마시게. 내가 나서서 골동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주선해 보지. 아니면 단체라든가.”
“그러면 나야 좋죠. 하지만 헐값으로 눈탱이 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에끼, 이 사람! 그나저나 한 회장한테 아무리 믿고 맡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북측에서 한 사람쯤은 남쪽으로 내려 보내지 않겠나?”
“그러잖아도 골동품을 보낼 때 김영철이 내려오겠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가 담당자니까요.”
“음.”
김성욱이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는 표정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참, 근데 골동품의 양이 상당하다면서?”
“예. 좀!”
“그걸 어떻게 가져오겠다는 거지? 그 정도 물량을 외부로 빼내 오려면 위성의 감시망을 피하긴 힘들 텐데.”
그러자 지태가 피식 웃었다.
거기엔 압정 수십 개만큼의 야릇한 의미가 날카롭게 박혀 있었다.
“뭐, 뭔데, 그 웃음?”
“우리 정부가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아주 비밀스러운 협조가 필요하다던데요.”
“도대체 무슨 방법인데 그리도 비장해?”
“땅굴.”
“어?”
너무도 뜻밖인데다 황당해서였을까.
김성욱은 무의식중에 되묻고는 이내 입을 떡 벌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따, 땅굴?”
“그렇다니까요.”
“허!”
김성욱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한번 떡 벌어진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 * *
김성욱에게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과제를 안겨준 지태는 국정원의 특수 임무용 밴이 테헤란로 인근에 이르자 곧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차에서 내린 지태는 곧장 회사로 복귀해 조현민부터 불렀다.
그러고는 1박 2일간의 중국 출장 중에 벌어졌던 모든 과정을 가감 없이 설명해 주었다.
조현민의 표정도 설명의 막바지에 이르자 김성욱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뭐어, 땅굴?”
처음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토해내더니 급기야 소회의실이 떠나갈 듯 웃어젖혔다.
“야, 그놈 미친 거 아니냐? 땅굴이라니, 도대체 뭘 잘못 처먹었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대는 건데?”
“나도 첨엔 황당했는데 몇 번 곱씹어 생각해보니까 그리 나쁜 발상은 아닌 것 같던데요.”
“너도 그놈 따라서 같이 미쳐가는구나. 그게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말이 안 되긴 하죠. 근데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감시 위성이 밤낮으로 훑어대고 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헐!”
지태가 그저 흘러가는 소리로 한번 내뱉은 게 아니라 지극히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조현민은 끝내 혀를 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