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물밑 접촉(1)
설명의 시작은 오늘 오후에 오한표 실장으로부터 보고 받은 내용이었다.
지태의 갑작스러운 중국행에 의문을 품어 지사원들에게 그를 밀착 감시케 했는데 국정원 요원들에 의해 가로막혔다는 이야기.
“……그래서 정확한 경위 파악을 위해 지용이에게 부탁했어. 오신환 의원이라면 국정원 라인을 통해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진즉에 그런 설명을 붙일 것이지…….”
임경남의 말끝에 이현욱이 아직도 머쓱함이 남아있는 표정으로 구시렁댔다.
그러다가 깜빡했다는 듯 모두를 돌아보았다.
“참! 경찰 라인에서 내게 귀띔해준 게 있는데. 그 뭐라더라? 강, 강…….”
“강성원? 한동안 우리의 뒤를 휘젓고 다니던 놈 말이야?”
이현욱이 답답하게 기억을 더듬자 허영만이 얼른 그 이름을 알려줬다.
“그런가? 암튼 그 새끼가 다시 꿈틀대고 있다는 거야. 강창근이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고…….”
“뭐냐, 그 새끼?”
“이거 불씨가 살아나기 전에 미리 손을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이현욱은 허영만의 추임새를 무시한 채 임경남을 돌아보며 물었다.
“으음!”
임경남이 비릿한 신음성을 흘렸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지켜만 보다가 때를 놓치면 어떡하고?”
“그땐 곧바로 잠재우면 되는 거고.”
임경남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때였다.
임경남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어, 지용아!”
- 문 좀 열어줘요, 형님. 도착했습니다.
“어, 그래.”
임경남은 전화를 끊으며 허영만과 송영완 쪽을 쳐다보았다.
이현욱보다 한 단계 낮은 취급을 하는 시선이다.
“둘 중에 누가 문 좀 열어줘라. 지용이 왔단다.”
물론 도토리 키 재기일 테지만, 그 둘 중에서도 그나마 허영만의 급이 좀 더 낮았던 모양이다.
송영완이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돌리자 허영만이 무겁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엉기적엉기적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 * *
한국에서 날아올 연락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지태는 서탑 한인 타운 근처에 있는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저녁 식사는 김영철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 음식점에서 때웠다.
아직 서먹서먹한 사이인 남자 둘이서 객실에 머무는 게 조금은 멋쩍었다.
그래서 저녁 식사 후 두 사람은 호텔 내 라운지 바를 찾았다.
취기에 젖은 목소리로 김성욱의 전화를 받을 수는 없어서 지태는 가볍게 맥주를 주문했다.
김영철이 맥주는 술 같지도 않다며 투덜거렸지만, 지태는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지금은 술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시간을 보내러 온 것이라서 그랬다.
“그나저나 우리 정부에서 합의해준다면 너희 쪽에서 거래하려는 게 뭐야?”
지태가 맥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뒤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뭐가 그리 급하네?”
“거래할 거나 있을까 싶어서 그런 거지. 혹시 아오지에서 캐낸 석탄 같은 거냐?”
“집어치우라! 기딴 걸 지금 농담이라고 지껄이고 있네?”
김영철이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발끈했다.
“농담 한 번 한 걸 가지고 더럽게 지랄이네. 잘하면 패겠다?”
“기러니까 내래 받아들일 만한 농담만 지껄이라!”
쩝.
지태가 본전도 못 찾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도 기왕 내뱉은 말이니 궁금증이나 달래겠다는 심사로 다시 물었다.
“그럼 속 시원하게, 화끈하게 털어놔 봐. 나한테 팔아달라고 부탁할 그 물건이 도대체 뭐야?”
“거 집요하구만, 기래.”
“……!”
지태가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을 쏘아대자 김영철이 맥주가 채워진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은 다음 은근한 시선으로 지태를 쳐다보았다.
“덩치 큰 물건들을 외부로 내보내면 양키 아새끼들이래 위성으로 다 내려다볼 게 아니네. 동무의 말마따나 석탄 같은 건 말이디.”
김영철은 잠시 말을 끊으며 픽 웃었는데 지태가 무표정하게 바라보자 그는 금방 웃음기를 지웠다.
곧 진지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골동품!”
“어?”
“골동품이라고! 고서, 도자기, 그림 같은 거 말이디.”
“허!”
지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았다.
“와 기래?”
“혹시 그거 국보급 같은 걸 팔아먹으려고?”
“우리도 양심이래 있디 기딴 걸 어케 팔아먹네. 아주 오래전 우리 공화국 내의 골동품 전문가들을 전국 각지로 풀었댔어. 그 동무들이 시골 깡촌 같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요강단지 대신 쓰던 백자, 간장 종지로 쓰는 거, 벽장 깊숙이 박아놓은 고서 같은 걸 모조리 수집했댔지.”
김영철은 지태가 북한 당국을 양심도 없는 집단으로 몰아붙이자 거기에 반발해 열심히 침을 튀겨가며 항변했다.
“국보급 문화재나 보물들은 우리 공화국 박물관에 고이 모셔두고 있어야. 어디서 함부로 무시하고 기러네?”
“알았어, 알았다고. 그건 미안한데, 그래도 1절만 하셔.”
“이거 자존심이래 확 상하는구만, 기래.”
“알았다니깐!”
지태가 미안함을 희석하고자 김영철의 빈 잔을 채워주며 건배를 제의했지만, 그는 굳이 마다하고 혼자서 벌컥 마셔댔다.
“그래서 그렇게 모아놓은 게 얼마나 되는데?”
지태는 화제를 골동품으로 가져가며 김영철에게 화해를 꾀했다.
다행히 먹힌 것 같았다.
비록 퉁명스럽긴 했지만, 김영철의 대답이 곧 날아왔다.
“상당히 많아.”
“음! 그러면 문젠데, 이거.”
“뭐가 또?”
“그 많은 걸 어떻게 운반해? 미국이며 유엔의 감시망은 어떻게 뚫고?”
지태가 인공위성을 가리키듯 검지를 허공으로 향했다.
그러자 김영철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허! 그 웃음의 의미는 뭔데?”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이거는 어디까지나 남조선 당국의 협조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서 말이디.”
“어떤 거창한 방법이길래?”
“기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우. 일단은 북남 간에 합의가 이뤄진 후라야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알갔시요. 니 맘 내키는 대로 하시라요.”
지태는 자신의 궁금증을 거둬들이는 대신 김영철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쉬움을 달랬다.
김영철이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흘길 때였다.
뷔이익, 뷔이익.
이윽고 기다리던 지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지태는 김영철에게 양해를 구할 사이도 없이 바쁘게 밖으로 내달렸다.
라운지 바를 나와 구석진 자리로 걸음을 옮긴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많이 기다렸지?
김성욱의 목소리가 밝았다.
BH에서 VIP의 긍정적인 사인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기다리다가 눈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 내 목소리를 들으면 모르겠나. VIP께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다는 전갈이야. 일단 좋은 방향으로 추진해 보라고 하셨다더군.
“그럼 북측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라는 말씀이에요?”
- 걔들이 먼저 손을 내민 걸 보면 아주 다급하다는 얘기지. 그들이 원하는 걸 먼저 들어주는 게 실마리를 풀어 가는 데 도움이 되겠어. 우리 나름의 성의를 보여준 후에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걸 끌어내자는 게 BH의 방침 같아.
“만일 저들이 원하는 것만 쏙 따먹고 나중에 오리발을 내밀면요?”
- 저들이 그리 여유 부릴 입장은 아닌 것 같아. 고난의 행군 시즌2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때야. 그만큼 절실하다는 얘기지. 아무래도 우리를 디딤돌 삼아서 활로를 모색하려는 것 같아. 그런데 우리가 던진 미끼만 따먹고 오리발을 내민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일단 그들이 제안하는 거래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첫 번째겠지.
“골동품요.”
- 응?
김성욱이 즉각 되물었는데, 그것은 못 알아들어서라기보다는 너무 엉뚱한 답변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아까 김영철한테 슬쩍 물어보니까 그러더라고요, 골동품을 팔아달라고.”
- 걔들한테 팔아먹을 만한 게 아직 남았나? 암암리에 중국으로 다 빼돌려서 남아있는 게 이제 없을 텐데?
“아직 많다던데요.”
-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뭐. 그나저나 한 회장!
“예.”
- 이제부턴 자네의 임무가 막중해졌어. VIP께서도 인정하는 진짜 특사가 아닌가. 물론 아직은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사냥이 끝나고 가마솥에나 던지지 마시라니까요.”
-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말아. 이제부터 나도 자네를 극진하게 대접해줄 거야.
“믿어보죠.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요?”
지태가 정색하며 물었다.
- 음, 그건 말이지…….
김성욱 역시 농담 띤 목소리를 서둘러 지우고 진지하게 말문을 열어갔다.
* * *
양재동 빌라의 거실 안은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술과 약에 취한 임경남과 그의 패거리들이 소파 등받이에 드러눕듯 몸을 파묻은 채 오지용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오지용 역시 해외 유학파답게 패거리가 내민 알약을 거침없이 입안에 털어 넣은 후라 만취자의 그것처럼 말투가 어눌해 보였다.
오지용의 설명이 얼추 끝나갈 무렵 임경남이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러니까 3차장 산하 어떤 부서에선가 무슨 움직임을 보이긴 하는데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를 특정할 수 없다?”
“그들은 서로 간에 업무를 공유하지 않잖아요. 같은 임무를 부여받은 팀이 아니라면 한 부서 내라 해도 바로 옆 동료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시스템이니까.”
“음.”
임경남은 다시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낮은 신음성을 흘렸다.
하긴 이 정도의 정보라 해도 그들의 업무 특수성에 비추어 보면 오신환 의원이나 되니까 얻어낼 수 있는 거다.
“대북 공작을 담당하는 3차장 산하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렇담 한지태 그 새끼가 빨갱이들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던가, 그게 아니라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건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임경남이 불현듯 눈을 떴다.
“아!”
“왜?”
임경남이 낮은 탄성을 내지르며 눈을 번쩍 뜨자 옆에 있던 이현욱이 힐끔 쳐다보며 물어 왔다.
“미얀마!”
“미얀마가 왜?”
“얼마 전 듣도 보도 못한 DD무역이라는 곳에서 만달레이로 화물 전세기를 띄운 적이 있었거든. 그때 그곳을 한지태 그놈이 내세운 페이퍼컴퍼니라는 의심을 했었거든. 그래서 우리 애들을 시켜 미행하게 했었고. 근데 꼬리를 자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
이제는 모든 시선이 임경남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몽환적인 표정을 애써 지우며 그의 말에 집중하려는 게 눈에 확연했다.
“그때 공항에 웬 개떼 같은 놈들을 보았다고 했지. 물품을 중심으로 경계를 서고 있는 게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았고. 그래, 맞아, 그 새끼들! 분명 그놈들하고 연관이 있을 거다.”
“뭐가?”
이번에도 이현욱이었다.
어떤 점이 지태와 그놈들 간에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궁금한 거다.
“용병들 같아 보였다는데 남쪽 놈들이 아니라 북쪽 애들 같다고 했거든. 그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호통을 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맞아, 분명해.”
“그럼 그 새끼하고 빨갱이 놈들하고 뭔가 있다는 걸 국정원에서 캐치했다는 거겠네요, 형님.”
오지용이 임경남의 추측에 자기의 생각을 추가했다.
“정황상 그렇다고 봐야지.”
“그럼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좀 더 상세히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죠, 뭐.”
“그래 주면 고맙고.”
임경남이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 * *
지태는 라운지 바의 술자리를 정리하고 김영철과 함께 객실로 올라왔다.
그냥 멀거니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간단하게나마 술을 곁들이고 싶어서 맥주 몇 캔을 사 들고 왔다.
두 사람은 선양시 서탑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한 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지태는 팔짱을 낀 채 맞은편에서 캔맥주의 뚜껑을 따는 김영철을 조용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