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깡으로 쓰는 재벌신화-204화 (204/272)

204화. 은밀한 중개인(4)

“잊었네? 지태 동무래 미얀마 연방 정부의 요주의 인물이 됐어야. 거기에 얼마 전 탕 마이의 시체까지 발견됐잖네. 뭐, 기거야 내래 만든 작품이기는 하지만 말이디.”

“그렇다고 노다지를 포기해?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좀 잠잠해지면 적당한 방도를 찾아볼 거야.”

“기래, 확실히 그곳이 노다지는 노다지디. 한데 말이야, 적당한 방도를 찾는다는 게 그리 쉽갔네?”

“내 비즈니스를 언제부터 그리 염려해주셨어. 누가 보면 자네가 내 절친인 줄 알겠네.”

지태가 콧방귀를 뀌며 툴툴댔지만, 사실 속으로는 김영철의 후속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말투에서 뭔가 해결책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다.

역시나 지태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김영철이 빙긋 웃더니 지태를 은근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나를 에이전시로 내세우면 어떡하갔나?”

“뭐, 자네를?”

“와? 일 없지 않갔네? 어차피 북남 간에 물밑 접촉만 잘 이뤄진다면 너희 남조선에서도 나랑 거래하는 걸 방관하디 않갔어?”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김칫국부터 마셔대기는! 설령 우리 당국에서 눈을 감아준다고 해도 자네가 어떻게 하려고? 미얀마 내에 법인도 설립하고 그래야 하는데.”

“기건 염려하디 말라우. 기까짓 것쯤 내래 알아서 할 테니까.”

“하이고, 참!”

지태가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들이는 눈치를 보이자 김영철이 정색했다.

“내래 지금 농담으로 내뱉는 말이 아니야. 진지하게 제안하는 거인데 한입에 싹 무시하디 말라.”

“진담이라고?”

“기럼! 그 대신 수수료는 아론이 받은 것만큼 똑같이 달라.”

김영철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당장 즉답을 줄 만한 상황은 아니어서 지태는 미지근한 미소로 대충 때웠다.

그런데도 김영철은 계속 부담스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때마침 지태를 구원하는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김성욱이었다.

“나 잠깐 전화 좀!”

지태가 김영철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김성욱이 말했다.

- 많이 기다렸지?

“뭐 그거야 상관은 없습니다만, 어떻게 됐습니까?”

- 아! 윗선들은 환영하는 입장이야. 우리 원장님부터 BH 안보실장까지.

“그래서 결론은요?”

지태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최종 결재권자의 입장이 나오지 않은 거다.

- 그게 말이지…….

김성욱은 조금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NO 사인이 나왔습니까?”

- 아냐. 그런 건 아니고 한 회장에게 미안해서 그래.

“뭐가요?”

- 아직 보고를 올리지 못했어. VIP께서 어제 방한한 아프리카 쪽 국가원수와 오찬 겸 회담을 가지셨고, 오후에도 중요 일정이 연달아 잡혀 있는 터라…….

“그럼 언제쯤 보고가 가능합니까?”

- 아무래도 늦은 저녁때쯤이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한 회장이 수고스럽겠지만 아무래도 거기에서 하루 묵어야 할 것 같네.

“하, 이거 참!”

지태가 불만 섞인 탄식을 토로했다.

그때 김성욱은 자기 나름의 당근이랍시고 얼른 덧붙여왔다.

- 자네가 거기에서 쓰는 모든 경비는 우리 쪽 특활비로 부담하지. 뭐든 최고급으로 이용하시게.

“그거 잘못 받았다가 나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청문회다, 특검이다, 그런 곳으로 불려 다니는 거 아닙니까?”

- 하하. 문제 될 거 하나도 없네. 이건 엄연히 대북 공작 차원에서 쓰는 정당한 특활비라고, 이 사람아.

“그런 건 됐고요. 뭐 하나만 물어보죠.”

- 살살 물어주게. 하하.

그것도 농담이라고.

지태가 스마트폰에 대고 가볍게 눈을 흘긴 다음 입을 뗐다.

“만약에 말입니다. VIP의 결재가 떨어지고 북측에서 어떤 거래를 제시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만약 거래를 하게 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습니까?”

- 어떤 문제를 말하는 건가?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지금 북한은 유엔 제재를 받고 있는 처지 아닙니까. 그런 때에 북한과 밀거래를 한 것이 들통이 난다면 나 혼자 독박 쓰는 거 아니냐고요. 혹시 모르죠. 꼬리 자른다고 나를 국가보안법이니 뭐니 해서 손발을 다 묶어버릴지도.”

- 에이, 설마! 어차피 정부에서 묵인하게 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야. 자네와 더불어 공범이 된다는 얘기지. 그리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자네를 지원할 것이고. 미 CIA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히 말이야.

김성욱은 자신의 이야기 말미에 더욱 힘주어 강조했다.

단순히 이 순간만의 곤란함을 모면하기 위해 달콤하게 꾀어대는 임기응변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지태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잠시 번졌다.

“그리 오래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내가 느낀 점은 정부미들이 하는 말은 절대 믿지 마라, 이런 거였어요. 언제 자기네들 편한 쪽으로 말을 바꿀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번엔 조금 믿는 쪽으로 하죠. 부국장님의 말투에서 약간의 진솔한 면이 보이니까.”

- 허허, 이거 참! 때렸다가 어르고, 병 주었다가 다시 약을 주는 식이로구만.

“여하튼 밤늦게라도 연락 주기 바라고요. 그럼 이만 끊습니다.”

지태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식당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여기에서는 안 보이지만, 김영철은 분명 바깥으로 전화를 받으러 나간 지태를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겉으론 대범한 척 굴어도 속으로는 애가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다급하고 간절한 것은 북한 쪽이니까.

지태가 생각 많은 표정으로 피식 웃고는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 * *

“강창근 씨!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길 원한다면 일단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어요?”

지난번 연락해온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이루어진 통화였다.

강성원은 모처럼 이루어진 강창근과의 연결선이 끊어지는 것을 경계하며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강창근이 씁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 형사님! 나도 나름 선을 대어 알아봤어요. 강 경위님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 예, 결론은 외압 따위에 절대로 굴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겁니다. 믿어요. 믿으니까 내가 강 형사님께 먼저 연락을 드린 것이고. 한데 아직은 아닙니다. 당장 성급하게 나서기엔 놈들의 위세가 무섭습니다. 그 새끼들은 넘사벽이에요, 감히 넘볼 수 없는!

“압니다. 놈들의 배경이 무섭다는 것은. 사실 나도 이번 일에 발을 담그는 게 두렵긴 해요.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순 없잖습니까. 더구나 강 회장은 그들과 공범입니다. 만일 놈들의 위세가 무서워 피하기만 한다면 나중엔 혼자서 독박을 쓰고 말 거요.”

- ……!

강창근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묵직한 날숨이 연신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그의 깊은 고민이 느껴진다.

“강창근 씨! 아니, 강 회장…….”

침묵이 길어지자 조바심을 느낀 강성원이 강창근을 불렀다.

- 잠시만! 그래요,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쇼.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결론을 내릴 테니까.

강창근이 긴 한숨 끝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강성원은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이해된다는 몸짓을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이 증인으로 세상에 나서는 순간 그 또한 공범으로 법의 강력한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을.

하지만 현재 그가 고민하고 갈등하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는 듯했다.

과연 자신이 커밍아웃했다고 해서 임경남과 양재동 패거리들까지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까 하는 의심 말이다.

놈들은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과서에나 존재하는 격언일 뿐.

권력과 금력 앞에서 법전은 한갓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강창근이 갈등하고 고민하는 바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강성원이 마침내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강 회장이 무엇을 염려하고 고민하고 있는지. 시간을 드릴 테니 좀 더 숙고해 보세요. 대신 이거 하나만은 꼭 알아두시고. 아니, 약속이라고 수정하십시다. 난 놈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것!”

강창근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 알겠습니다. 강 형사님을 믿도록 하죠. 예,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민하겠습니다.

강성원은 전화를 끊고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의 사무실이 자리한 복도 끝자락이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디붉은 기운이 세상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피를 토하듯 세상을 물들인 저 붉은빛은 머지않아 검은 무리와 타협을 할 것이고, 곧 그 어둠으로 파묻혀 갈 것이다.

이제 힘을 잃어가는 저 붉은 노을처럼 자신의 운명 또한 어둠에 묻히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강한 의욕과 의지를 갖고 매달리고는 있지만, 강창근의 말마따나 그 자신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현실은 현실이니까.

강한 자들이 휘두르는 불의 앞에서 정의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

강성원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태를 떠올렸다.

중국으로 급히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며 어젯밤 느닷없이 전화가 왔었다.

무슨 출장이냐고 물었지만, 지태는 우물쭈물 대충 얼버무렸었다.

정황상 국정원과 관련이 있을 거란 느낌은 들었지만, 지태가 곤란해하는 터라 더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강성원은 이내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금은 지태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닌 것이다.

자신이 아는 지태는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한 사내였다.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난관을 헤쳐나갈 독종인 거다.

그런 지태를 강성원은 닮고 싶었다.

친구지만 언젠가는 꼭 그렇게 살고 싶은 자신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야, 강 경위! 거기서 뭐 해? 팀 회의 들어간다. 어서 들어와!”

강력팀 선배 형사였다.

강성원은 목을 한 바퀴 돌려 근육을 푼 다음 천천히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 * *

밤 9시가 가까워지자 임경남이 양재동 빌라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무대의 주인공은 맨 나중에 등장한다는 규칙을 오늘도 끝내 지켜냈다.

그러므로 나머지 멤버 셋은 이미 도착했다고 보면 된다.

임경남이 비워둔 상석으로 가서 당연하다는 듯 앉았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던졌다.

“오늘 특별 게스트로 지용이를 초대했는데, 다들 괜찮지?”

“지용이를?”

다리를 꼬고 앉아 술잔을 들던 이현욱이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 문제라기보다는 레벨이 맞느냐 이거지, 내 말은.”

“무슨 레벨, 우리처럼 재벌가의 자식이 아니라서? 우리만큼 가진 건 없어도 그 아버지가 깡패잖아, 권력 깡패! 그거면 되는 거 아냐?”

“아이, 씨!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나이대가 안 맞는다 이거지.”

임경남의 곱지 않은 시선에 이현욱은 어설픈 궤변을 늘어놓았다.

“물어볼 말도 있고 해서 부른 거야, 오늘만! 그래서 특별 게스트라고 했잖아.”

“아, 그래! 경남이가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불렀겠지. 일단 들어나 보자고.”

두 사람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허영만이 불쑥 끼어들었다.

뒤를 이어 송영완까지 고개를 끄덕이는지라 이현욱만 괜히 머쓱해져 애꿎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임경남이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그러고는 힐끗 이현욱을 돌아보았다.

“삐쳤냐?”

“내가 애냐, 삐치게! 새끼,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거봐, 삐친 거 맞네, 이놈.”

임경남이 피식 웃고는 오지용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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