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은밀한 중개인(3)
김영철이 말하는 뉘앙스가 왠지 좀 달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손해를 볼 것 같다는 느낌보다는 자신에게 득으로 작용할 듯싶다는 사업가로서의 촉도 있었고.
그래서 지태는 곧 성질을 누그러뜨린 표정으로 털털하게 물었다.
“돈이 되는 거라면 내 목숨도 걸겠다는 것과 북한의 어려운 사정을 살펴봐 달라는 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어?”
“있디. 아암, 있고말고. 보상해 주갔어.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
“그동안 남조선은 꼴통 보수 아새끼들이래 정권을 잡은 이후로 북남 관계가 바가지 깨지듯 한 방에 깨지딜 않았네. 그걸 원상 복귀할 수 있도록 내래 힘을 써주갔다 이거야.”
“니미! 난 또 뭐라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얼어붙은 남북 관계가 해빙되든 말든 그게 내가 사업을 하는 것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고! 난 말이지 정치적 해법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거 전혀 관심 없어. 그런 건 저기 높은 데 앉아서 방귀깨나 뀌어대는 정치꾼 나리들한테나 맡기면 되는 거고.”
“흐흐흐.”
김영철이 재미있다는 듯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얘가 지금 날아가는 참새 거시기를 봤나. 실없이 웃긴!”
“동무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아서 길티.”
“뭐가 둘이야?”
“북남 간에 화해 무드가 펼쳐지게 되면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공로자로 추앙받을 사람이래 누구갔나? 바로 지태 동무가 아니갔어! 그럼 남조선 당국에서 가만히 두고 보고 있간? 동무래 사업하는 데 있어 각종 혜택이 떨어지면 떨어졌지 모자라진 않을 기야.”
“그런 막연한 기대감만 믿고 나더러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라고? 내가 미쳤냐?”
“흐흐흐.”
지태가 완고한 거부의 뜻을 밝히자 김영철이 예의 야릇한 웃음을 다시 흘렸다.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기래. 내래 웃음을 거두도록 하디. 대신 이것 하나만 따져보라.”
“뭘?”
“남조선 정보 당국에서 동무를 왜 중국으로 보냈갔나? 나와 만날 걸 뻔히 아는데도 말이디.”
“그, 그거야…….”
지태는 뭔가 궤변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대신 정답을 알려줄까? 기건 말이디 남조선 당국에서도 지금 내가 말한 그거와 비슷한 기대심을 갖고 동무를 보냈을 거다 이거야.”
“쩝.”
지태는 급기야 소리 나게 쓴맛을 다셨다.
그의 추측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으니까.
정곡을 찔리니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괜히 머쓱한 마음마저 들었다.
“혹시 아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북남 간에 앞으로 어떤 역사적인 사업 거리가 만들어질지 말이야. 새로운 역사를 쓰는 일에 동무와 내가 그 선봉에 서는 거이야.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 되갔네. 좋게 좀 생각하라, 지태 동무.”
“여하튼 잠시 생각해보고. 아니, 내 복잡한 머리통부터 정리해보고.”
지태는 일단 한발 뒤로 내빼며 시간을 벌고자 했다.
사실은 이 엄청난 제안에 관한 판단을 독단적으로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김성욱에게 먼저 의사를 타진해 보려는 거였다.
“잠깐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
그의 의도를 간파한 김영철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상관하디 말고 편하게 전화하고 오라.”
* * *
지태는 지금껏 김영철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김성욱은 자신이 고대하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잘 진행되고 있다며 반겼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당장 즉답은 해줄 수 없다고 했다.
보고 라인을 타고 최종 결재권자까지 올라가야 하므로 시간적 여유를 달라는 거다.
지태는 통화를 끝내고 김영철이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누구와 통화했는지는 이미 눈치챘지?”
김영철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보나 마나 좀 기다려 달라고 했겠디, 뭐. 어차피 결정을 내릴 꼭대기까지 보고가 올라가려면 말이디.”
“그럼 자넨 전권을 위임받았어?”
지태가 묻자 김영철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큰 그림을 그리는 것, 그 합의를 끌어내는 데까지가 내래 받은 명령이야. 나머지 세부 사항은 다시 또 공화국의 지령을 받아야갔디.”
“그럼 뭐 시간은 남아돌겠네. 일단 나가자고. 나도 어차피 연락이 올 때까진 별로 할 일도 없으니까 바람이나 쐬면서 노닥거리지, 뭐.”
지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김영철 역시 오랜 벗처럼 덩달아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화답했다.
“그러디.”
* * *
훈허강 근처 카페를 나온 지태와 김영철은 목적지를 두지 않고 산책하듯 걷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는 처지라서 두 사람은 거래니 뭐니 하는 현안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참 미얀마 소식은 들었네?”
김영철이 돌아보며 물었다.
“어떤?”
“그 탕 마이라는 아새끼 말이디.”
“몰라. 그 이후론 알려줄 만한 라인이 사라져버렸으니까. 왜, 시체라도 발견했대?”
“기랬다더구만. 놈을 내다 버린 근처로 사냥 나왔던 원주민이 발견했다나 봐.”
“근데 꼭 죽여야 했어? 그냥 병신만 되게 했어도 됐잖아. 굳이…….”
지태가 책망하듯 돌아보자 김영철이 쓰게 웃었다.
“만약 기랬다면 지태 동무래 나랑 함께 엮여 들어갔을 기야. 연관된 놈들을 불라고 고문을 해대면 견딜 턱이 있간.”
듣고 보니 수긍이 갔다.
지태가 연신 힐끔대는 김영철의 시선을 외면하며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생각하니 문득 아론의 안위도 궁금했다.
“아론은?”
“그 아새끼래 듁이딘 않았디. 하지만 남은 평생은 바퀴 달린 의자 신세일 거이야. 두 다리를 작살 내버렸거든.”
“죽은 친구들의 목숨값은 받아냈고?”
“공화국 일등전사들의 목숨값치곤 만족스럽다 할 순 없갔디. 그래도 뭐…….”
김영철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받아낼 만큼은 받아냈다는 이야기다.
지태가 풀썩 웃었다.
“좀 남겨주지 그랬어. 평생 병신으로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내래 그 정도의 잔정은 있어야!”
김영철이 자신을 너무 매정하고 차가운 냉혈인간으로 보지 말라는 시선을 던져왔다.
지태가 그 시선을 받으며 피식 웃었다.
비록 만남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자신과 비슷한 면모를 발견했다.
누구보다 강한 사내라는 것, 그리고 은원관계에 대해선 무엇보다 주고받는 게 확실하다는 점 등이다.
김영철은 그의 말마따나 잔정이 있는 사내였고, 그리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라는 게 지태의 결론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두 시간 남짓을 걸었을 것이다.
김영철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지태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배가 좀 출출하지 않네?”
생각해보니 배가 고팠다.
선양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거르고 왔던 식사부터 챙겼지만 몇 술 뜨지 않았다.
중국요리가 워낙 기름기가 많아 느끼할뿐더러 입맛에도 맞지 않았다.
지태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공화국 음식점으로 가디.”
“북한 음식점엘? 거기가 어딘데?”
“택시를 타고 조금만 가면 서탑(西塔)이란 데가 나올 기야. 중국말로는 시타라고 하는데 조선인들의 음식점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이디.”
들어 본 기억이 있다.
선양의 서탑 거리가 한인 타운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태가 픽 웃었다.
“가서 결정하자. 우리 남한 식당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너희 북한 음식점으로 갈 것인지.”
“그러디 뭐. 일단 가서 입맛에 맞을 아무 식당이나 찾아들어가자우.”
김영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비공식적이나마 특사 자격을 띤 것이어서 설령 지태가 김영철과 더불어 북한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해도 국정원에서 그것을 시비 걸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곧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 * *
임경남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오한표 실장의 급한 보고 전화를 받았다.
어제 입국한 부경물산의 대주주인 미국계 헤지펀드 엘레나의 고위 임원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다.
더 많은 배당 확대를 요구하며 부경물산의 경영 압박을 가하는 엘레나 측의 임원과 격론을 벌였다.
하지만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어서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다.
“뭔데 호들갑이오?”
임경남의 목청이 높아졌다.
- 한지태에 관한 보고 건입니다, 사장님.
지태에 관한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즉각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렸었다.
그런 터라 임경남의 높아졌던 목청이 이내 낮아졌고 곧 안정을 되찾았다.
“뭡니까?”
- 중국 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 그니까 뭐냐고?”
답답하게 우물쭈물하는 폼이 뭔가 안 좋은 소식이라고 직감한 임경남은 다시 목청을 높였다.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 쫓겨났답니다.
“이런 씨!”
말귀를 알아듣게 보고를 해야지 앞뒤 꼭지 다 자르고 몸뚱이만 토해내면 어찌 알아듣는단 말인가.
오한표 실장은 금세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런데도 임경남의 성정을 잘 알기에 쉬이 대답을 주지는 못했다.
“말 안 할 거야?”
- 예, 말씀 올리겠습니다. 저, 그것이…… 공항에서부터 한지태를 밀착 마크했던 우리 직원들이 국정원 요원들에게 가로막혔다고 합니다.
“가로막히다니? 국정원 애들이 어떻게 알아차리고?”
- 한지태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쥐도 새도 모르게 뒤를 밟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걔들도 하는 말이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그걸 말이라고! 그나저나 국정원 새끼들은 왜 한지태를……. 걔들이 놈을 보호하는 거야, 아니면 따로 감시를 하고 있는 거야?”
- 그건 잘…….
“그럼 당신이 아는 게 도대체 뭔데? 물어보는 것마다 모른다, 모른다!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는 거야?”
- 죄송합니다, 사…….
뚝.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임경남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시발,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 도대체가 되는 일이!”
임경남은 신경질적으로 후우- 하며 날숨을 뱉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정원에서 무슨 일이지? 미얀마 건으로 무슨 냄새라도 맡은 건가?’
국가 정보기관의 주시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곧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는 방증이다.
그러자 임경남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개새끼, 뭔가 몰라도 걸리긴 된통 걸린 모양이군.”
고것 참 고소하다는 식으로 말을 내뱉은 임경남이 다시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좀 더 정확한 경위를 알아보려는 거다.
그러자면 오지용이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국회 정보위 소속이면서 국정원에도 나름의 라인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 * *
서탑의 한인 타운에 도착한 지태와 김영철은 곧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김영철은 북한 음식점을 추천했지만, 지태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정치적 고려니 뭐니 하는 까다로운 이유로 제동을 건 것은 아니었다.
다만 택시에서 내려 맨 처음 눈에 띈 아귀찜 전문식당에 필이 꽂혔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로 먹은 중국요리에 대한 반발심 때문인지 깔끔하게 매운 한국식 음식이 당긴 것이다.
김영철도 지태의 선택에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피식 웃으며 끄덕이는 것으로 공감의 뜻을 내비쳤다.
한국의 정을 듬뿍 담은 푸짐한 밑반찬에 미더덕과 낙지, 그리고 통통한 콩나물로 궁합을 맞춘 메인 요리 아귀찜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김영철도 꽤나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먹을 만하구만, 기래. 우리 공화국의 맛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만 말이디.”
“그냥 맛있으면 맛있다고 해, 이 친구야. 거기에 꼭 너희 위대한 공화국 타령을 양념으로 넣어야겠냐? 그리 배배 꼬아야 직성이 풀리겠냐고!”
“흐흐. 말이야 바른말이디 우리 공화국의 음식이래 담백하고 맛깔스러운 건 인정해줘야디. 참, 기나저나 미얀마 반군하고의 거래는 어드럭 할 거이네?”
“뭘 어떻게 해?”
지태는 입안에서 씹고 있던 미더덕 껍질을 탁자 위에 뱉어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