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은밀한 중개인(1)
점심 식사 시간이 끝나갈 무렵 박찬익 한스 다모아 사장이 지태를 찾아왔다.
신설 매장에 관해 보고하러 온 거다.
다모아는 론칭 당시 개설한 5개 매장과 그 후 추가로 개설된 10개 매장을 합해 현재는 전국 15개 매장이 성업 중이었다.
박찬익의 제안서에는 이제 그 범위를 좀 더 넓히자는 의견이 첨부돼 있었다.
가령 인구 백만이 넘는 광역도시를 중심으로 2~3개의 매장을 더 늘리자는 것과 인구 30만 이상이 되는 도시에도 매장 개설을 고려하자는 내용.
기존 매장이 성업 중이라는 점에 한껏 고무된 박찬익 사장의 자신감과 의지가 담긴 제안서였다.
지태가 괜히 엄살을 한번 부려보았다.
“너무 성급하게 추진하는 거 아닙니까? 좀 더 검증된 다음에 하셔도 무방할 듯싶은데…….”
“하하. 경영하는 사람은 도전과 모험을 결코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게 누구인지를 모르겠네요.”
박찬익 사장이 확실한 방어막을 치며 지태를 몰아갔다.
“크큭!”
말빨로야 어디 박찬익 사장을 따라잡겠는가.
지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에~ 난 박 사장님의 그런 도전적인 추진력과 결단력을 믿습니다. 결심이 확실하다면 밀어붙이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박찬익 사장이 고개를 살짝 숙여 묵례를 해오자 지태가 맞절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동시에 해외 매장도 추진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예?”
박찬익 사장은 뜻밖의 제안이라는 듯 되물었다.
지태가 입가에 그윽한 미소를 그렸다.
“저번에 통화할 때 민성이가 그러더군요. 케냐 나이로비에 다모아 매장을 개설하면 어떻겠냐고. 우리 한스전자 제품뿐만 아니라 협력사 제품 또한 수출길이 열리는 것이니 일거양득이 아니겠냐고 말이죠.”
“아하!”
참으로 좋은 생각이라는 듯 박찬익 사장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진지하게 검토해 보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한스전자의 사장단과 협의를 해보셔도 좋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박찬익 사장이 웃는 낯꽃으로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뷔이익, 뷔이익.
응접 테이블 위에 놓아둔 지태의 스마트폰이 바르르 몸을 떨어댔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김성욱 부국장이다.
“그럼 전 이만.”
편하게 전화를 받으라는 것 같았다.
박찬익 사장이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걸 보며 지태는 통화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예, 한지탭니다.”
- 회사 근처네. 지금 시간 괜찮은가?
그건 출발하기 전에 물어보는 것이 예의 아닌가?
지태가 괜히 스마트폰에 대고 눈을 한번 흘기더니 대답했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그냥 갈 거요?”
- 어쭈, 이젠 제법 도발할 줄도 알고……. 허허허!
김성욱은 제 말끝에 마치 도인처럼 웃어젖혔다.
* * *
지태가 회사를 나와 달려간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빈 공터였다.
새 건물을 올리려는 듯 기존 건물을 허문 다음 평평하게 터를 닦아놓은 곳이었다.
김성욱이 먼저 와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지태가 다시금 막연히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빠앙, 빵.
10미터 후방쯤에서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지태가 돌아보자 김성욱이 헤드라이트를 한번 켰다 껐다.
‘니미, 무슨 첩보영화를 찍나.’
지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김성욱의 승용차 쪽으로 걸어갔다.
조수석에 오르자 김성욱이 친한 척 반갑게 웃었다.
“웃지 마쇼. 괜히 정드니까.”
“세무조사 건을 무마시켜 주니까 이젠 볼 장 다 봤다?”
“부국장님이 개입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털어낼 것이 없는 회삽니다. 난 하늘에 맹세코 깨끗하게 회사를 경영했으니까.”
“진짜로?”
“그럼 이번엔 국정원이 나서서 우릴 한번 털어보시던가.”
“털긴 뭘 털어, 이 친구야. 우리가 뭐 청소부야. 대한민국의 국정원이 그리 한가한 곳처럼 보여?”
“아이고, 그러세요? 그렇게 할 일이 많아서 예전엔 그 바쁜 와중에도 댓글까지 달고 그랬구나!”
“허허, 이런!”
김성욱이 정곡을 찔려 민망하다는 듯 헛웃음을 날렸다.
그러다 문득 정색하며 지태를 돌아보았다.
“자네, 혹시 오신환 의원하고 사적인 원한이라도 있나?”
“누구요, 오신환? 미래한국당의 그 오신환 의원?”
“응. 근데 눈치를 보니까 모르는 것 같네? 그런 거야?”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지금껏 만나본 적도 없는데 뭘….”
“그래? 그러면 아주 이상하네. 그 사람이 국세청에 제보해서 한 회장의 회사를 청소해달라고 의뢰한 당사자거든.”
“그 양반이요?”
“서울 국세청장 본인의 입으로 실토를 했으니 아마 틀림없을 거야.”
“허!”
지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다가 김성욱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근데 국세청장이 순순히 실토하던가요?”
지태의 물음에 김성욱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경박한 웃음을 쏟아냈다.
“흐헤헤헤. 설마! 처음엔 생사람 잡지 말라고 팔짝 뛰더구먼.”
“근데요?”
“뭐가 근데요야! 지금 나더러 우리 회사의 영업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싫으면 관두시던가. 언제는 우리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업자 관계라더니, 그거 순전히 다 립서비스였었네.”
지태가 기분이 상했다는 듯 떨떠름한 입맛을 다셔대자 김성욱이 소리 없이 웃다가 다시 정색했다.
“정권이 바뀌고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엔 죄다 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런 게 빈번했었지.”
김성욱이 그 영업 비밀이라는 것을 슬슬 털어놓기 시작했다.
언뜻 들으면 뜬금없는 소리 같았지만, 지태는 그게 뭔지 퍼뜩 감이 잡혔다.
“사찰 말입니까?”
“어쭈, 이제 척 하면 삼천리네!”
“그게 무슨 영업 비밀씩이나 된다고. 그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그니까 그 공공연한 비밀조차 지금은 싹 다 사라졌단 말이야. 암튼 끼어들지 말고 잘 들어. 그게 본질은 아니니까.”
“……!”
“여하튼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그것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동안 축적해 놓은 귀한 자료들을 전부 내다 버린 건 아니야. 자네 같으면 버리겠어, 돈 주고도 못 살 재산인데?”
형식적으로 묻는 것 같아 지태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것들을 좀 뒤져봤지. 나도 자네의 부탁을 받고서야 일부러 찾아봤는데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하더군. 주요 공직자들은 물론 정·재계 인사들의 면면까지 말이야. 그걸 토대로 백서를 써도 되겠더구먼. 다만 자기의 치부를 일부러 드러낼 때나 가능한 얘기겠지만…….”
김성욱은 제 말끝에 의미를 잔뜩 담은 웃음을 흘렸다.
“서울 국세청장도 그렇던가요?”
“그러니까 우리의 공작이 먹혔지. 뒤가 구리지도 않은 사람이 어디 제풀에 두 손 두 발을 들겠나.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지태가 쓰게 웃었다.
이것을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싶어서다.
그가 만일 뒤가 구리지 않은 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다면 국정원의 협박이 과연 먹혔을까를 생각하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긴 애당초 그가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면 오신환 의원의 청탁 따위에 선뜻 넘어가지도 않았을 거다.
“자네 궁금증을 풀어줬으니 이제는 자네가 보따리를 풀 차례야. 그치?”
기브 앤드 테이크.
지태가 괜히 뺨을 긁었다.
“그야,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걸 털어놓음으로써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는 거니까.
과연 이들과 어우러져도 괜찮을까 하는 의심 때문에 지태는 여전히 찜찜한 마음이었다.
“아까 사실은 김영철과 통화를 했습니다.”
“그, 랬어…?”
김성욱이 의아하다는 듯 말을 약간 늘어 빼면서 되물었다.
지태를 담당하고 있는 부하 직원으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한 거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네를 감청한 바에 의하면 그런 사실이 없던데, 라고 묻기도 좀 곤란했다.
대놓고 속 보이는 짓을 언급하는 것은 자칫 지태의 심기를 건드릴 염려가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고맙게도 가려운 데를 지태가 먼저 알아서 긁어주었다.
“감청할 것 같아서 공중전화를 이용했어요. 그러니까 부하 직원의 게으름을 질책하거나 감청 장비가 고장 났나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헛험! 그래서 무슨 말들이 오갔는데?”
“귀국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중국을 통해 평양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아, 씨이! 그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아직 스케치도 못 끝냈는데 이젤을 걷어차 버린 꼴이 되잖아!”
김성욱이 낭패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보며 지태가 픽 웃었다.
고개를 젓다 말고 김성욱이 퍼뜩 돌아보았다.
그 웃음이 왠지 긍정적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뭐 있지. 글치?”
“눈치가 아주 귀신이셔.”
“아, 뭔데?”
“만나자고 하더군요, 중국에서! 귀국 전에 얼굴을 한번 보자고 합디다.”
“오, 그랬어?”
그제야 김성욱의 낯꽃이 활짝 펴졌다.
* * *
“요즘 너무하시는 거 아녜요?”
이지원은 짐짓 교태 섞인 콧소리로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배우라서 그런지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임에도 남자 홀려대는 연기가 아주 뛰어났다.
임경남이 눈웃음으로 그런 이지원의 아양을 받아주었다.
예전에 애정을 쏟아부었던 유미라와는 여러 면에서 같은 듯 색다른 이지원이었다.
그중 도드라진 한 가지만 콕 찍으라고 한다면 그녀의 육체에서 풍기는 신선한 맛이었다.
유미라가 30대의 농염한 맛을 지녔다면, 이지원은 아직 설익은 풋사과 같은 싱그러움이라고나 할까.
잠시 두 사람을 속으로 비교하던 임경남이 문득 인상을 썼다.
지태에게 받은 치욕과 수모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유미라와의 관계도 계속 이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랬다면 농염한 유미라와 싱그러운 맛의 이지원을 동시에 품는 쾌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들자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았다.
지태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속에서 벌컥 분노가 치밀었다.
“씻고 나오세요.”
이지원이 침대 옆 협탁 위에 곱게 개켜놓은 실크 잠옷을 가리켰다.
임경남이 흘깃 돌아볼 뿐 반응이 없자 이지원이 괜히 낯을 붉혔다.
“아잉, 어서요오!”
다시금 색기가 철철 넘치는 콧소리로 재촉했다.
‘썩을 년.’
아무래도 요사이 눈여겨봐 둔 명품 신상이 있나 보다.
“잠시 숨 좀 돌리고. 그보다 와인이나 먼저 한잔 갖다 줘.”
임경남이 슈트를 벗어 침대 위로 던지며 말했다.
이지원이 주방 겸 미니바로 와인을 가지러 간 사이 임경남은 몹시 피로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의욕을 가지고 추진하는 일마다 뭐 하나 제 입맛대로 척척 되는 일이 없으니 더욱 짜증스러운 요즘이었다.
모처럼 호기를 잡았다 싶었던 한스그룹의 특별 세무조사마저 허무하게 어그러지자 그 스트레스는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미치지 않고 제정신으로 버티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였다.
임경남은 내던져놓은 슈트의 안주머니를 뒤져 작은 비닐봉지에서 알약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만일 이것마저 없었다면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선 너무 빈번하게 약을 찾는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 횟수가 너무 잦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여서 스스로 경계하려 하지만 이미 중독 증상을 보이는 신체에서는 쉬지 말고 끊임없이 계속 넣어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시발!”
임경남은 제 못난 의지를 탓하는 욕설을 내뱉었다.
바로 그때였다.
뷔이익, 뷔이익.
슈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 시간에 어떤 새끼야, 하는 시선으로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임경남이 느릿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오한표 비서실장이었다.
“뭡니까?”
대뜸 퉁명하게 내뱉는 소리에 오한표 실장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일단 제 소임은 다해야 한다는 듯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사장님.
“말해 봐요.”
말소리는 짧았고 느렸는데, 그건 시답잖은 보고라면 단단히 각오하라는 경고와 협박 같았다.
- 한지태가 내일 아침 일찍 중국으로 출국한다고 합니다.
“중국?”
- 중국 선양행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만, 한스무역이 중국 시장에서의 거래가 그리 크지 않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아마도 시장 개척 차원이 아닐지…….
“그걸 회장씩이나 달고 있는 새끼가 직접 나간단 말이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급기야 임경남이 폭발하고 말았다.